[66화]
“보고 싶어요. 형이 너무…… 보고 싶어요. 다른 사람 만났다가도 흑, 으윽, 꼭 돌아왔는데…… 이젠 정말 끝인 것 같아요.”
허세 부리던 모습은 어디 가고, 넘어진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혼자 남은 애정을 끝내지도 못하고 여기까지 끌고 왔을 것이다.
“누나……, 흑. 저 어떡해요?”
피가 섞인 남동생에게도 들어 보지 못한 호칭에 당황했지만 달래는 게 급선무였다.
“알겠으니까 일단 울음 참고, 좀 진정해요. 밖에 사람들 있잖아요.”
“눈물이, 으흡. 안 멈춰요, 누나. 으흑…….”
“어, 어쩌지.”
등을 토닥이는 손놀림이 점점 빨라졌다. 죄짓는 것도 아닌데 초조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우려했던 대로 작업실 문이 열렸다. 평소와 다르게 유독 무겁게, 천천히 열리는 것 같았다.
누가 들어오는 걸까. 몸을 떼어 내려 해도 슬픔에 빠져 있던 솔은 혜수를 놔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차라리 같은 멤버나 매니저면 좋으련만.
그런 혜수의 바람과 달리 나타난 남자의 등장에 절망적인 비지엠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하필 이런 상황을 가장 봐서는 안 되는 남자가 나타났다.
평화롭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타오르는 걸 목격했다.
“이솔 씨, 이솔 씨. 잠깐만요!”
“……네?”
다급해진 혜수의 속삭임에 느릿하게 고개를 든 그가 뒤를 돌아봤다. 눈물이 남아 있는 빨간 눈가를 문지르며 남은 울음을 삼키느라 목 안에서 끅끅거리는 소리가 났다.
키가 큰 남자가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이미 생긴 것만으로 살벌한 것 같았다. 불안함이 엄습했다. 무섭기도 했고, 이런 모습을 타인에게 들킬 수는 없었다.
“죄송해요, 누나…….”
천천히 팔짱을 끼는 서준의 상체 근육이 불거졌다. 어금니를 물은 듯, 저작근이 튀었다.
“일단 가요. 내가 연락할게요.”
“네, 죄송해요.”
사과하며 나가려 했지만, 문을 가로막고 있는 남자는 도저히 비켜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자 혜수가 이솔을 가려 주며 앞에 나섰다.
“그냥 보내 줘요. 서준 씨!”
이솔은 그가 어떤 존재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처음 집에서 만났을 때도 긴가민가했지만 자신을 죽일 듯이 바라보는 눈빛과 위압감은 분명 혜수를 투영한 채 제게 닿는 것이었다.
겨울바람처럼 차가운 남자를 보아하니 해명하거나, 상대해 봐야 좋은 결과가 없을 게 불 보듯 뻔했다. 도망이 현명한 답이었다.
“서준 씨!”
혜수가 다시 소리를 빽, 지르자 그제야 문에서 조금 물러났다. 지나갈 때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급한 상황을 넘긴 혜수가 숨을 헐떡였다. 인질은 풀려났지만, 여전히 사나운 짐승을 진정시켜야 했다. 마른침이 연신 넘어갔다.
“내가 진짜 널 어떻게 해야 하지?”
“오해예요! 일단 진정하고 내 말을 좀…….”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순간, 여름이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해맑게 나타났다.
“혜수 작가님 제가 왔습니다요.”
냉장고에 들어온 것처럼 차가운 분위기와 처음 보는 흉흉한 남자의 모습에 여름은 즉각 반응했다.
“어, 어…… 저기…… 누구……시죠?”
“친구예요! 친한 친군데 수업을 듣고 싶다고 해서요.”
달래 보려는 혜수의 노력에도 서준이 아무 말 하지 않고 서서 노려봤다.
“그, 그러신가요? 안녕하세요. 저는 정여름입니다.”
“서준 씨, 일단 나가서 잠깐만 기다려 줘요.”
쾅!!
작업실 문이 부서질 듯 닫혔다.
“하아.”
그가 나간 곳을 바라보던 혜수가 풀썩 주저앉았다.
“헉, 작가님!!”
“죄송해요. 친구가 좀 화나는 일이 있어서…… 빨리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일단 다음 수업 일정 알려 주시겠어요?”
휴대폰을 꺼내 여름이 알려 주는 대로 일정을 적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했다.
재료는 공방 안에 모두 구비된 상황이었고, 내용도 이미 다 숙지하고 있었지만, 미리 알아 둬야 실수를 줄일 수 있었다.
“일단 내일이랑 모레는 제가 수강생들한테 키트 나눠 주고 수업할 거라 쉬셔도 돼요! 대신 주말에 풀타임 가능하실까요? 오전엔 평일반 보충, 오후엔 지난주에 했던 거랑 똑같이 미러 아트 수업. 이벤트 당첨자들 수업이에요.”
“여름 작가님은, 대체 언제 쉬세요?”
혜수의 질문에 여름이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떴다.
수업 진행에 드로잉 영상, SNS에 직접 홍보까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텐데 힘든 내색 없이 늘 밝은 얼굴로 해내는 게 대단했다.
“저 오래 쉬었잖아요. 혼자 작업하는 것도 재밌는데, 지금 너무 행복해요! 일하는 것도, 사람들 만나는 것도 너무너무 그리웠어요!”
“그러셨구나.”
“그림으로 성공하겠다고, 큰소리 떵떵 쳤어요. 이 사랑방 같은 느낌도 좋지만, 돈도 많이 벌 거예요. 그러니까 작가님도 같이 파이팅해 주세요!!”
두 손을 불끈 쥐는 여자가 퍽 귀여워서 같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우주의 옛날 모습이 떠올랐다.
‘남녀 할 것 없이 사이즈만 찾아서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을 바랐고, ‘남녀 할 것 없이 좋아하는 향수’를 꿈꿨던 어린 정우주. 끝이라고 했지만 솔의 얘기를 듣고 나니 심하게 걱정됐다.
아니, 지금은 문밖에 서 있을 강서준을 걱정하는 게 먼저일 것이다.
여름과 짧게 대화를 나누고, 아틀리에 밖으로 나왔다. 죄를 저지른 자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시동이 켜진 서준의 차를 보고도 평소처럼 달려가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짧은 시간 안에 정리해 보려 했지만, 도저히 입을 뗄 엄두가 나질 않았다. 자꾸 우주의 모습이 생경하게 그려졌다.
“하아.”
차 옆에 쪼그려 앉았다.
시동 켜진 자동차의 진동이 몸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코끝이 빨개지고, 다리에 감각이 사라지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함께해야 하는 이상 더는 피할 수 없었다.
근본적으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현실에 화가 나기도 했다. 게이인 게 뭐 어때서. 그게 뭐 대수라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버려지게 하고 기어코 엉망으로 만드는 걸까. 아니, 정우주가 문제일까.
보편적인 사회적 법칙과 철학적 견해 따위로 깊어지려는 고민에 혜수가 결연한 얼굴로 조수석 문을 열었다. 핸들에 기대어 있던 서준이 고개를 틀어 쳐다봤다.
“무슨 변명을 하려고 고민을 그렇게 오래 해?”
차마 타지 못하고 밖에 있었던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일단 타.”
***
서준은 아무 말 없이 10분 정도 차를 몰았다. 아틀리에와 같은 동네였지만, 처음 가는 길이었다.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낯선 표정에 말도 걸지 못했다.
얼어붙은 것 같은 공기를 견디는 게 힘들었다.
공용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그가 먼저 내렸다. 와중에도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고, 손잡아 주는 걸 잊지 않았다. 여태 당연하게 받았던 이 친절과 다정함이 새삼 고마웠다.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커다랗고 차가운 손에 이끌려 어두운 골목을 걸었다. 건물 사이의 길을 따라 따뜻한 조명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 끝엔 작은 간판이 걸린 가게가 있었다.
서준이 문을 열고, 혜수의 등을 안아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어서 오십시오. 아! 강 사장님, 안녕하세요.”
메뉴판을 안은 여자는 허리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깔끔하게 가르마를 타고 포니테일로 올려 묶은 머리, 새초롬한 얼굴로 서준을 반갑게 맞이했다.
“오늘은 예약 못 했는데, 괜찮을까요?”
“그럼요. 강 사장님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안으로 모실게요.”
‘사장님’이라는 호칭에 궁금증이 일었다. 서준을 향해 호감이 넘치는 시선에 의문을 품기도 한 것 같다.
반면 아무 생각도 없던 여자는 혜수에게도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팔을 뻗어 방향을 제시한 후에 앞장섰다. 바와 테이블로 나뉜 공간은 어두컴컴했지만, 테이블마다 놓인 작은 조명 덕에 식사 상대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안으로 들어설수록 공간은 넓어졌다. 두 사람이 안내받은 곳은 다른 테이블과는 거리가 좀 있는 편이었고, 의자마저 달랐다.
앞쪽으로 물이 흐르는 작은 정원이 보였고, 벽 한쪽에 와인이 잔뜩 박힌 투명한 저장고가 있었다.
여자는 친절한 얼굴로 혜수의 의자를 빼 주기까지 했다. 테이블 위의 예약석이라는 팻말을 치우며 왼쪽 겨드랑이에 끼우고, 조용하고 정확하게 메뉴를 읊었다. 중간에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도 있었다.
고급스러우면서 아늑한 분위기에 죄지은 범인은 괜히 긴장했다. 물을 따라 주는 소리에 갈증만 일었다.
“우선 아뮤즈 부쉬로 명란부각과 크림치즈로 속을 채운 호박꽃튀김을 준비하겠습니다. 혹시 싫어하시거나, 기피하는 음식 있으신지요.”
명확하게 혜수를 향한 문의였다.
“아, 저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우주나 은하를 따라 좋은 레스토랑을 다니긴 했지만, 이런 식의 주문은 처음이었다.
“이 사람은 처음 오는 거라서, 내가 대신해도 될까?”
서준이 혜수를 향해 부드럽게 물으며 끼어들었다.
“향이 과한 해산물이나 지난번에 먹었던 닭날개수프처럼 뼈째로 나오는 요리가 있다면 빼고 부탁드려요. 술은 메뉴에 맞춰서 가벼운 거로.”
얼핏 지배적으로 보일 수 있는 행위는 과하지 않고 친절했으며, 다정했다. 그러니까 아직 자격지심이 바닥에 남아 있는 이혜수가 괜찮다고 느꼈을 정도로.
“감사합니다. 강 사장님도 똑같이 맞춰 드리면 될까요?”
“네.”
누군가 자신도 바로 말하지 못하는 취향을 완벽하게 대변해 주는 게 이렇게까지 부끄러운 일일까. 황송할 지경이었다.
조금 두렵기도 했다. 조금 전의 상황이 마무리되지 못한 채 이어지는 캐주얼 하지만, 로맨틱한 분위기의 장소. 일부러 여기까지 데리고 온 그의 의중을 헤아리기 힘들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게 이런 걸까. 아니면 실컷 맛있는 거 먹여 놓고 ‘더는 안 되겠다, 헤어지자.’ 같은 말로 끝을 내는 건 아닐까. 황당한 상상과 결말이 줄줄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