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근데 선생님은 왜 흑백으로만 그리셔요?”
“제 그림…… 아세요?”
“그럼요. 완전 유명하시잖아요. 그런 걸 임파스토(Impasto_물감을 두텁게 칠해서 질감과 입체적인 효과를 표현하는 기법)라고 하나요?”
“임파스토라고 하기엔 거칠지 않은 것 같던데.”
“그럼 혹시 물감에 다른 걸 섞어서 사용하시는 건가요?”
또 다른 학생의 말에 갑자기 나타난 여름이 말을 이었다. 쟁반을 들고 있었는데, 그 위에는 김이 올라오는 따뜻한 커피와 과자가 한가득이었다.
“아뇨, 거친 것도 있어요. 홍콩이나 미국에서도 극찬받았던 ‘용린’ 시리즈나, ‘겨울 전나무’, 최근에 모로코에서 전시했던 ‘파도’만 봐도 남자가 그린 것 같다는 차별적 표현이 나돌 정도로 거친 터치였죠! 중첩되는 건 비슷하지만 불꽃처럼 섬세하고, 얇게 덧발라서 그리신 것도 있고……. 우리 혜수 작가님은 정해진 틀이 없는 분이랍니다. 천재죠.”
수강생들이 입으로 오오, 소리를 내며 손뼉까지 쳤다. 이젠 숨기지도 않는 열성적인 팬의 모습에 혜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제 얘기는 나중에 하시고, 작업에 집중해 주세요.”
“앗,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덕질을……. 헤헤.”
행복한 시간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캔버스를 채우는 광경을 보다 보면 시간도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럴수록 제 작품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 역시 점점 길어졌다.
사람들이 돌아가자 강의실을 깨끗하게 정리하며 여름이 걱정스레 물었다.
“혜수 작가님, 혹시…… 개인 작품 얘기까지 하는 거 불쾌하셨을까요?”
“전혀요. 제 표정 이상했나요?”
여름이 고개를 마구 저으며 부정했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늘 예쁘셔요. 사실 제가 김이언한테도 얘기했지만, 정말 작가님 팬이라서 최근에 작업 발표 안 하고 계신 거 알고 있었거든요. 혹시 부담되셨을까 봐 걱정했답니다.”
“저는 얼굴이나 누구 여자 친구라는 얘기 말고, 그림에 관한 얘기를 해 주셔서 좋았어요.”
“어머나……. 그러셨구나.”
혜수가 조금 풀어진 머리를 다시 묶었다.
“다음 수업 얘기 할까요?”
“아, 네. 이게 연예 기획사에서 운영하는 채널이거든요.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체험하는 건데, 오늘은 유행하는 백드롭 페인팅 시연할 거예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제가 나서긴 할 건데 그쪽에서 혜수 작가님 잠깐이라도 출연하면 안 되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당연히 안 된다고 했는데 아마 방송에 짤막하게 소개는 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괜찮……으실까요?”
“월급 받는 입장이니까 조금 더 편하게 대해 주세요. 사적인 질문만 없다면 상관없어요. 시연까진 어렵겠지만 옆에서 보조 정도는 확실하게 할게요.”
쌍꺼풀이 드러나는 선한 웃음. 옆으로 넘긴 머리카락 한 가닥이 자연스레 흘러내리는데 그것마저 예쁘다고, 여름은 생각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오늘 드로잉 하는 사람들이 아이돌이래요. 릴리즈. 혹시 아세요?”
“아뇨. 저는 관심이 없어서.”
“저도 한 명밖에 기억 안 나는데……. 주호, 라고 연기도 엄청나게 잘해요. 그리고 또 한 명이 누구더라.”
여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네! 들어오세요!”
높고 청명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요정 같은 남자들이 둘씩이나 등장했다. 키가 크고, 선이 가늘었으며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심지어 목소리도 고왔다. 잘 모르고, 관심도 없다던 여자들의 눈빛이 좀 달라졌다.
“어머, 오늘 출연하기로 하신 아이돌분들이시구나. 안녕하세요! 근데 다른 분들은 어쩌고,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굳이 소개하지 않아도 정체를 대번에 알아차린 여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스케줄이 붕 뜨기도 했고, 사실 제가 정말 그림을 못 그려서 미리 배워 두면 좋을 것 같아서요. 방해……될까요?”
예쁘장한 남자의 애교에 여름이 고개를 크게 저으며 의자를 빼 줬다.
“어서 이리 와 냉큼 앉으십시오.”
반면 혜수는 둘 중에 키가 큰 남자를 보고 묘한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그 역시도 마찬가지였을까. 여름과 다른 멤버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사이 혜수를 쫓아왔다. 그림을 말리고, 서무까지 볼 수 있는 사무실.
“오랜만에 봬요.”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 그가 누구일까 생각하는 사이, 옆에 와 있는 줄도 몰랐던 혜수가 깜짝 놀라 움찔거렸다.
별을 심은 것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로 혜수를 내려다보며 생긋거렸다.
“얼굴이 더 좋아 보이시네요.”
“……그때, 집 앞에 오셨던 분. 맞죠?”
“벌써 절 잊어버리신 줄 알았어요. 쉽게 잊힐 얼굴 아닌데.”
“그땐 너무 많이 우셨잖아요.”
혜수의 말에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솔이 씨, 맞죠? 우주랑은 연락했어요?”
“아직 못 했어요. 형 요새 다른 사람이랑 사는 것 같아요. 혹시 모르세요?”
새벽에 나간 이후로, 우주와 연락한 적은 없었다. 방송엔 드라마나 예능 할 것 없이 꾸준히 나오는 것 같았다. 괜찮을 거라고 짐작만 할 뿐, 소식은 전혀 몰랐다.
“네.”
“그렇구나. 드라마 촬영하면서 잠잠해진 것 같더니 최근에 다시 소문이 더러워졌거든요.”
“……잘 아시겠지만,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아서요.”
“네, 그래서 이혜수 작가님은 다른 연애 하면서 행복하신가 봐요.”
갑작스러운 비아냥거림이었지만, 올려다보는 얼굴에 두려움 같은 건 없었다.
그럼 그렇지. 반갑다고 인사할 사이는 아니었다.
“작가님도 잘 아시겠지만, 이쪽은 소문이 빨라요. 이미 파다하게 퍼졌어요. 쇼윈도 커플에 각자 연애하고 있다고. 증거나 계기가 없어서 안 뿌리는 것뿐이죠.”
“듣고 싶지 않은 소문 남발하지 마시고, 할 말만 하고 끝내시죠. 이왕이면 간단하게.”
“이왕 손잡은 동지시니까 형, 지켜 주세요. 쇼윈도 커플이기 전에 친구잖아요.”
“……직접 못 하니까 부탁하는 건가요?”
“네, 아직도 제 연락 안 받아요. 그러면서 다른 놈들이랑은 만나고, 술도 마시고, 폐인처럼 산대요. 이대로 두면 정말 위험해요. 사진 보여 주는 얼굴이 너무 심각해서 일단 헤어져 준 건데 이렇게 확 끊어 버릴 거라는 생각은 못 했죠. 형, 겁 많잖아요.”
이솔은 아직 우주의 상황에 대해 모르는 눈치였다.
“진짜 애인도 하지 못한 걸, 남한테 떠넘기는 건가요?”
“이혜수 작가님, 형한테는 없어선 안 될 존재라고 들었어요. 소울메이트, 그런 거라던데. 생각보다 관심이 없으시네.”
혜수가 제 마음대로 따라 주지 않자 좀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제 일이 아닌 것 같아서요.”
오전에 강의를 끝낸 그림들을 정리하려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는 건조를 위해 비스듬하게 걸어 둔 그림들을 하나하나 바닥에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저 지금 협박하는 거예요. 혹시라도 형한테 무슨 일 생기면, 작가님한테도 책임 있어요.”
“상대를 잘못 찾아왔네요. 저는 정우주, 도와주지 못해요.”
혜수는 덤덤한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그림들을 하나하나 주워 제자리에 두었다.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점점 강해지는 햇살을 가리기 위해 블라인드를 내렸다.
***
촬영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 성공적으로 끝났다. 카메라가 익숙한 여름은 제집 안방처럼 편하게 수업을 진행했고, 요정 같은 남자들은 제 얼굴 같은 페인팅 작품을 만들어 냈다. 숙소에 걸어 두겠다는 귀여운 말도 잊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혜수는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지만, 정우주의 얘기로 여전히 머리는 어지러웠다.
오랜만에 물어뜯어 본 손끝은 아주 아팠다. 손톱도, 정우주 때문에 생긴 손바닥의 상처도 이젠 흔적 하나 없이 매끄럽기만 했다. 서준이 보고 싶었다.
몰려오는 피곤함에 어깨를 주무르는데 작업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솔이 또 혼자 돌아왔다. 예민하게 시선이 벼려지자 고개를 꾸벅 숙여 왔다.
“아깐 버릇없이 굴어서 죄송해요.”
연하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 사과에 나이 차가 실감 났다. 청바지에 하얀 셔츠를 걸친 그는 그저 풋풋했다.
“괜찮아요. 우주랑은 오래 만났어요?”
혜수의 질문에 귀가 빨개졌다. 귀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헤어졌다가 만난 것까지 포함하면 5년도 넘었어요. 제 얘기, 정말 안 했어요?”
“함부로 아웃팅 할 수 없잖아요.”
아웃팅에 심각하게 트라우마가 있는 정우주는 안 그런 것 같아도 제 연인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아끼는 사람일수록 말하지 않았다.
“사실 저는 사귀기 전부터 형한테 정말…… 작가님 얘기 많이 들었거든요. 질투했어요. 죄송합니다.”
제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곧바로 자신의 추함을 인정하며 사과할 수 있다는 것도 부러웠다. 그건 나이와 상관없는 이 남자의 순수함이겠지. 정우주와 오래 만났다는 것도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연락, 한번 해 볼게요. 이솔 씨 얘기도 할게요.”
“형은 아직도 제가 사진을 보낸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좋아하는 사람한테 미쳐서 모든 걸 내던질 만큼 멍청하지만, 다 같이 죽어 보자는 생각을 할 만큼 등신은 아니에요. 그 말이 하고 싶었어요.”
“……혹시 이솔 씨나 회사 쪽으로 사진이 온 적은 없었나요?”
“없었어요.”
혜수는 제 생각이 맞을지도 모르겠단 확신이 처음으로 들었다.
우주에게 겁을 주려는 것 같았던 편지와 상대방에게 더 초점이 맞춰져 정확하게 찍힌 사진. 어쩌면 협박한 범인은 정우주를 가장 생각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까 말한 대로 우주, 겁 많잖아요. 이솔 씨 다치는 게 두려웠을지도 몰라요.”
“……흐윽.”
돌연 그가 또 우는 소리를 냈다. 손등으로 눈을 가리더니, 정말 울기 시작했다.
“흐, 윽…… 흑. 으윽…….”
“이, 이솔 씨.”
널따란 어깨가 튀어 올랐다. 메이크업 없이도 붉은 입술이 깨물어서 점점 더 빨개졌다. 당황한 혜수가 곁에 다가가 안절부절못했다. 좌우로 왔다 갔다 하다가 등을 토닥여 주자 더 서럽게 울었다.
그러더니 혜수를 지난번처럼 와락 끌어안았다. 어깨가 또 금방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