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부동산 임대차 계약서」
자세한 계약 내용은 이미 빈칸 없이 채워져 있었고, 임대인의 서명까지 모두 마친 준비된 서류였다. 뜻밖의 선물에 놀란 혜수가 몸을 일으키며 받아 들었다. 그는 바닥에 앉아 침대에 턱을 괴고 대답을 기다렸다.
“제대로 계약도 안 한 집을 쓸고 닦지 말고, 정식으로 여기서…… 나랑 살자.”
계약 내용의 보증금 액수를 보고, 어쩐지 손이 점점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저…… 월세는 그렇다 쳐도 보증금은 바로 준비 못 하는데.”
기껏 생각해서 준비한 선물이 수포로 돌아갈까 봐 걱정부터 들었다. 순진하게도.
“이미 받았어.”
“네?”
침대 밑으로 손을 집어넣은 그가 순수하게 웃었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을 것 같은 모자에서 하얀 비둘기를 꺼내는 마술사 같은 모습이었다.
드르륵.
무언가가 마룻바닥을 세게 끄는 소리가 났다. 숨겨 뒀던 것을 꺼내며 그가 일어서자 아래에서 위로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의 정체에 혜수의 입이 벌어졌다.
서준은 씩 웃으며 얇은 포장지를 조심스레 찢어 냈다.
“설치 기사까지 보내 주겠다고 했는데 내가 직접 걸어 주고 싶어서 거절했어.”
뜯긴 종이 사이로 익숙한 무늬가 보였다.
“어떻게…….”
이언이 갖고 있다던 ‘파도’의 습작이었다.
“뺏어 왔어.”
“네?”
“보증금 대신 받을 거야.”
혜수의 입술이 움직이자마자 말을 뺏어 버렸다.
“우기지 말아요. 집 크기나 가치에 비해서 너무 저렴하잖아요.”
물론 혜수는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대신 월세 많이 받잖아. 아, 서울에서만 살아 봐서 모르는구나. 여기 주택 단지가 도시 개발 사업 망하면서 부동산 가치 많이 떨어졌어. 동네에 아무것도 없잖아. 들어왔다가 나가는 사람도 많대. 유령 동네.”
“아무리 그래도…….”
혜수가 번지르르한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썼다. 서준은 그림을 벽 한편에 세워 두고, 뻔뻔하게 아무나 말할 수 있는 근거를 갖다 댔다.
“정말이야. 인터넷 뉴스 검색하면 다 나와.”
“뺏어 왔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설마 싸운 건 아니죠?”
“전 남친 협박하고, 때리기라도 했을까 봐 걱정돼?”
“그 전 남친이라는 호칭은 도대체 언제까지 우려먹을 생각……. 하, 됐어요.”
“앞으로는 그냥 네 이름 그대로 활동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까 싶다가도 그림을 감상하는 옆얼굴을 보면 웃음만 나왔다. 정우주 때문에 저 사람을 놓쳤으면 얼마나 땅을 치고 후회했을까. 들켜서 다행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그건 그림부터 그리고 생각해 볼게요. 그리고 유화가 다 마르긴 했어도 좁은 곳에 두면 건강에 안 좋아요. 재재도 있잖아요.”
“그럼 2층에 가져다 둘까.”
“2층?”
“2층의 침실 말이야. 거기를 아예 작업실로 꾸미는 게 어떨까? 거실은 조명이 별로고, 생활은 1층에서 해도 충분하니까.”
“우주 방에서요?”
“여기 정우주 방이 어디 있어? 그 새끼 이름 꺼내지도 마.”
나름 심각한 얘기를 하는데도 혜수의 시선은 우아하게 움직이는 그의 대흉근과 복근, 그 옆에 상어의 아가미처럼 자잘하게 나 있는 근육들을 따라 움직였다. 저기를 뭐라고 하더라.
“무슨 생각 해?”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가 혜수의 얼굴 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전거근.”
자기도 모르게 번쩍 떠오른 단어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뭐?”
“아니! 아녜요!”
뭘 말하는지 알아차린 서준이 일단 웃음을 참았다. 종이를 들고 그대로 도망가려는 혜수를 다시 붙잡아 앉혔다. 종이를 받칠 만한 것을 찾다가 여의치 않아 노트북을 받쳐 줬다. 펜을 들려 주고, 종용했다.
“남의 몸 훔쳐보면서 야한 생각 그만하고, 얼른 사인부터 하시죠. 그거 다 적고, 한 부 더 있어.”
“아, 안 했어요.”
“우리 임차인이 변태라서 큰일이네.”
***
“이제 길 찾아갈 수 있지?”
차창 밖을 두리번거리는 혜수의 얼굴에서 약간의 걱정을 감지한 서준이 물었다.
“지금까지 혼자서도 잘 찾아다녔거든요?”
“워낙에 길을 잘 찾으셔야 말이지. 또 바로 앞에 두고 빙글빙글 돌까 봐.”
“자꾸 놀릴 거예요? 한 번 간 길은 기억해요.”
“기특하네. 근데 오늘, 너무 옷이…….”
“응? 왜요? 이상해요?”
베이지색 니트에 검은색 슬랙스. 지극히 평범한 차림이었다. 뒤집어 입기라도 한 걸까, 혜수는 입고 있던 니트 안쪽을 괜히 한 번 더 확인했다.
“예뻐서.”
“잘못 입은 줄 알고 놀랐잖아요.”
“이상한 사람들은 없어? 여기 블로그 찾아보니까 젊은 남자들도 혼자 와서 수업 듣던데.”
그런 건 또 언제 찾아봤담. 부쩍 일 때문에 밤낮없이 바빠진 것 같다가도 저런 것까지 알고 있는 걸 보면 한가한가 싶기도 했다.
“대부분 정우주 여자 친구라고 알고 있는데 무슨 일이 있겠어요? 그리고 여름 작가님이 기존 수강생들한테 수업 우선권을 줘서 지금은 거의 동네 사람들이나, 여름 작가님 팬뿐이에요. 아, 오늘은 기다리지 말고 먼저 집에 가요. 홍보용 수업이 하나 더 있어서 늦을 거예요.”
“몇 시?”
“다섯 시간 정도라고 했으니까…… 6시쯤?”
“어차피 퇴근 시간이라 밀리겠네. 시간 맞춰서 데리러 올게. 같이 저녁 먹고 들어가자.”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한 서준이 옆으로 손을 뻗어 혜수의 하얀 볼을 톡 건드렸다.
“그런 게 벌써 몇 번째예요? 나 때문에 일부러 시간 맞추는 거, 하지 말아요. 혼자 다니는 습관도 들여야죠.”
“손 치료 꾸준히 받고, 차 생긴 다음에 그런 습관 생겨도 늦지 않아. 아니면 순순히 차를 받든가.”
“버릇 나빠지면 다 서준 씨 탓이에요.”
“바라는 바야. 내가 다 책임지는 게 속 편해.”
한마디도 안 지고, 애정이 과한 말을 내뱉는 남자에게 혜수는 결국 오늘도 이기지 못했다.
“과하다, 정말.”
고정된 멘트를 내뱉으며 벨트를 풀었다. 문을 열려는데 다시 잠가 버렸다.
“버릇 들여야 하는 건 따로 있어.”
“또 뭐요?”
남자는 제 오른쪽 볼을 검지로 톡톡 치며 자기가 원하는 걸 주지 않으면 내려 주지 않겠다는,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매일 아침 이런 실랑이로 시간 낭비 하는 게 일상이 됐다.
한숨을 팍 쉬며 혜수가 주변을 살폈다. 선팅까지 되어 있다고는 해도 엄연히 직장 앞이었고, 대외적으로 아직 정우주의 여자 친구였다. 들킬 경우 일이 커져 버린다.
혜수가 몸을 밀어 그의 볼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서준이 타이밍을 맞춰 고개를 휙 틀어 버렸다.
쪽!
입술과 입술이 만나 짧고, 사랑스러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좋은 하루 보내.”
애정이 넘치는 관문을 거치고 나서야 문이 열렸다.
차가 떠나는 걸 확인한 혜수가 제 몸을 살짝 안고, 떨었다. 적응이 안 됐다. 오히려 거칠게 섹스할 때가 차라리 덜 부끄러운 것 같았다. 민망하면서도, 좋은 이 기분을 아직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
혜수가 일하기 시작한 ‘여름 아틀리에’는 비교적 언덕과 가까운 동네에 위치했다. 물론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언덕은 공간이 워낙 넓어서 수강생들끼리의 소통은 상상도 하기 힘들었는데, 여기선 긴 책상 하나 위에 소형 이젤을 올려놓고 그리는 모습이 부쩍 친밀해 보였다. 물론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도 따로 있긴 했다.
언덕은 정해진 커리큘럼에 정해진 기법을 신청해서 수업하는 반면 이곳은 수강생들의 선택에 맞춰 자유로운 수업 내용을 고수했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그곳의 주인인 여름은 이름답게 굉장히 밝고, 싱그러운 여자였다. 칠흑 같은 검은 생머리에 쌍꺼풀 없는 눈, 도톰한 입술이 매력적이었다.
그런 여름은 혜수가 그린 작품들을 다 읊으며 팬이라고 했다. 언덕에서 만든 포스터도 벽에 걸어 둘 정도였다.
윤 회장이나 정 남매와 아무 연관이 없는 이혜수의 첫 직장은 그런 곳이었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는 사무실에서 작업 좀 하고 있겠습니다.”
이미 도착한 수강생들이 긴 책상에서 자리를 하나씩 띄우고 앉아 그림 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둘러 머리를 묶고, 앞치마를 했다.
혜수는 주말만 하겠다는 처음 약속과 달리 매주 수, 목, 금 오전 수업과 주말 특강을 병행했다. 여름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혜수의 이름으로 홍보하자마자 순식간에 자리가 채워졌다.
안 그래도 화제성을 갖고 시작한 아틀리에가 혜수의 이름을 원료 삼아 더더욱 주목받기 시작했다.
SNS와 인플루언서들의 방문은 물론이고 심지어 방송국에서까지 수업에 대해 물었지만, 여름은 최초 수강생들에게 그 기회를 먼저 주었다.
몇 번 만난 것만으로 느껴졌다. 여름은 성공에 대한 갈망이 강했고, 준비된 만큼 현명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줬다. 동시에 정이 많은 따뜻한 사람이기도 했다. 믿음이 갔다.
혜수는 수강생들에게 조용히 다가가 인사를 건네며 차례차례 살폈다. 색연필, 오일바, 아크릴, 수채 물감 등……. 커리큘럼은 개인에게 맞춰지는 만큼 다양했다.
하루 두 시간, 꼬박 한 달 내에 그들이 원하는 걸 그려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혜수의 일이었다.
“어르신, 손목 아프시죠?”
나이가 지긋이 든 안경 쓴 남성이 놀란 눈치로 물었다.
“선생님은 어찌 그리 아는 게 많소?”
“저도 그릴 땐 잘 몰랐는데, 옆에서 보니까 보이네요. 붓을 잡을 때 지금 잡는 것보다는 좀 길게 잡으셔야 부담이 덜 갈 것 같아요. 길게 잡더라도 손목이 아니라 팔 전체에 힘을 쓰면 터치는 지금처럼 나올 거예요.”
“혼자 그릴 때부터 아팠다오. 먹고살 것도 아닌데 너무 열렬히 지랄한다, 생각했지.”
나이 든 남자의 너스레에 같이 있던 수강생들이 웃었다.
“선생님, 근데 저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네?”
혹시 사생활에 관련된 질문은 아닐까 걱정했지만, 아크릴로 초상화를 그려 내던 젊은 여자 수강생은 순수한 물음을 던졌다. 여름의 오랜 팬이라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