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피 나는데 안 아파?”
“서준 씨가 말하기 전까지 피 나는 줄도 몰랐거든요. 빨리 타기나 해요. 내가 운전할까요?”
혜수의 눈동자가 기민하게 반짝이자 서준이 서둘러 차에 올랐다.
“와, 반응 속도 봐. 저도 운전면허 있거든요?”
“알아.”
벨트를 매며 서로가 어이없다는 듯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나 운전 잘해요.”
“그래, 나중에 하자. 배는 안 고파?”
“교수님이 간식 주셔서 먹었어요. 서준 씨는요?”
“그다지. 교수님이랑은 어땠어?”
“손이랑 그림 얘기 했어요. 우셨는데……. 아, 더는 말 안 할래요. 매번 내 얘기만 하잖아.”
“……말 안 할 거면 손이라도 잡아 줘. 오늘 종일 착하게 잘 기다렸잖아.”
서준이 내민 손을 보고, 혜수가 샐쭉 웃더니 기꺼이 잡아 줬다.
“인정. 진짜 배 안 고파요? 보면 얼마 안 먹는 것 같아요.”
“이 몸매가 괜히 나오는 거겠어?”
“그러니까, 그렇게 조금씩 먹고 어떻게 그 우락부락한 덩치를 유지해요?”
“유전이야.”
“아, 아버지……. 아, 버님?”
더듬더듬 어색하게 말하는 호칭에 웃느라 핸들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응, 아버진 씨름 선수 하라는 말도 많이 들었대. 근데 아버지라는 말이 뭐가 그렇게 어렵고, 어색해?”
“불러 본 지 오래됐어요.”
“그건 나도 그래.”
“안 뵌 지 오래됐어요?”
“……돌아가셨어. 가족 없는데, 이거 혹시 결격 사유 될까?”
혜수가 어림없다는 듯 비웃었다.
“아버지 돌아가신 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그런 거 따질 것 같으면 없느니만 못한 가족들 가진 내가 더 심하죠. 두 눈으로 봤잖아요.”
“아버님은 일찍 돌아가셨어?”
“지병이 있으셨어요. 중학교 졸업할 때, 돌아가셨어요.”
“일찍부터 가장 노릇 하느라 힘들었겠네.”
더 일찍 알았더라면, 진작 관심을 가지고 다가갔더라면 조금은 네가 덜 힘들었을까.
“그다지. 가끔 스케일 큰 사고 칠 때 도와주는 게 힘들어서 그렇지 정작 한 건 없어요. 아, 이언 오빠한테 연락 왔는데 아무래도 금방 강의할 것 같아요.”
“근데 작가님. 왜 김이언 씨는 오빠고, 나는 서준 씨지?”
“오빠……라는 말이 듣고 싶어요?”
혜수의 입에서 나온 호칭에 그가 급하게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 와중에도 혹시 다치진 않을까 혜수의 가슴 앞쪽으로 손을 뻗었다.
“다시 불러 봐.”
“표정 음흉해서 싫은데.”
“하아, 우리 작가님. 요즘 말을 호락호락 듣는 법이 없네. 막상 들으니 오빠 소리는 별로야. 다른 거 없어?”
“빨리 출발이나 해요.”
“얼른 대체 단어 찾아봐. 애인, 자기, 여보 많잖아.”
“미쳤나 봐.”
혜수는 새 호칭을 원하는 그가 누군지 더는 궁금하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차창 밖의 야경 채도는 점점 더 진해져 아름다웠지만, 고개를 돌려 볼 시간조차 없었다. 그저 서로에게 허덕였다.
***
며칠 지나지 않아서 이언에게 연락이 왔다. ‘언덕’이 아닌 다른 곳에서 고정적으로 일해 주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해도 아직 뜨지 않은 무척 이른 시간. 마침 일어나 있던 혜수가 답장 대신 전화를 걸었다.
― 나 때문에 깼어?
“일찍 일어났어. ‘여름 아틀리에’가 어딘데?”
― 얼마 전에 친구가 연 곳인데, 너 혹시 정……여름이라고 기억하니? 예전에 IY 홀에서 같이 단체전 했었는데, 얼굴 보면 알 거야.
사람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마음에 들었던 그림이나 작품은 절대 잊지 않았다.
“누군지 알아. 수채화로 야경 그리시는 분.”
― 오, 역시. 그림 얘기 하니까 바로 아네. 최근까지 인지도 없다가 스케치하면서 고민 들어 주는 콘텐츠로 대박 났거든. 사람들 요청으로 공방 만들고, 강의까지 시작했는데 일이 좀 커졌나 봐. 혼자서 도저히 감당 못 하겠대.
“근데 나를 찾았다고?”
― 원래는 나한테 오라고 요청했지. 근데 알다시피 나는 너랑 다르게 바쁘잖아. 그래서 네 이름 얘기했더니 당장 모셔 오래.
“내가 강의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개인 작업만 하다가 어쩌다 한 번씩 한 건데……. 모르는 사람한테 기대받으니까 좀 부담스럽네.”
― 얘 좀 봐. 프로가 왜 이러니? 사람 가르치는 게 좋아서 시작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어. 그럴 거면 예술 안 하고, 선생님 했겠지.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거지. 커리큘럼도 구체적으로 잘 짜였어. 혹시 작은 데는 가기 싫어?
“그런 건 아니지. 감사하지.”
― 그쪽에선 네 이름 얘기하자마자 꺅, 소리 질렀어. 진짜 팬이래. 개인전, 단체전 할 것 없이 경력 화려하고, 수상 경력까지 많은데 미디어가 사랑하는 인재라며 좋대.
괜히 민망해진 혜수가 잠기운이 남아 있는 얼굴을 문질렀다.
“그럼 뭐 해, 지금은…….”
― 개인 작업 시작하기 전까지라도 좋으니까 와 달래. 너 사실 정여름, 그 여자한테 이용당하는 거야. 이참에 사업 키우고 싶은가 봐.
“언덕은…… 어떻게 되는 거야?”
― 네가 신경 쓸 건 없어. 아, 계약 때문에 처리할 서류는 조만간 메일로 보낼게. 아무튼, 얘기해 놨으니까 내일 편할 때 찾아가. 여름이는 종일 공방에 있을 거라고 했어.
“고마워.”
잠깐 대답을 못 하던 이언이 기지개라도 켜는 듯 늘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 내가 고맙지. 나도 슬슬 움직여야겠다. 새해 복 많이 받아, 이혜수.
“응, 오빠도 새해 복 많이 받아. 고마워.”
전화를 끊자마자 습관처럼 휴대폰 옆면을 꾹 눌렀다. ‘밀어서 전원 끄기’라는 문구를 따라 중간까지 그었다가 관뒀다. 더는 쓸데없는 전화가 오지도 않았고, 배터리도 닳지 않아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순식간에 꺼진 사람들의 관심이 참 신기했다. 그렇게 맛있다는 듯 물고, 늘어지더니 시간이 지나자 불 위에 눈을 뿌린 것처럼 잠잠해졌다.
통화 목록엔 방금 통화한 이언을 제외하고 온통 한 사람 이름뿐이었다. 그 화면을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림을 그릴까 하다가 서준이 거실에서 손가락으로 먼지를 훑었던 게 기억나 버렸다.
입술을 비쭉 내밀고 잠깐 고민하던 혜수가 머리를 묶었다. 아직 찬 공기를 밀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11. 별채의 재재
별채의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들어간 혜수가 잠든 서준을 확인하고, 고양이를 찾았다.
“재재.”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도 잠이 덜 깬 건지 소파에 누워 눈만 끔뻑거렸다. 익숙한 침입자를 반기는 게 꼬리에만 티가 났다.
고양이가 재재가 된 이유는 어느 소설에서 ‘아이가 재재거렸다.’라는 문장을 보고 지은 이름이었다.
가까이 가자 사랑스러운 검은색 고양이가 배를 보이며 애교를 부렸다. 유독 혜수에게 강아지처럼 애교가 많았다. 작은 몸체에 붙어 있는 눈과 코, 발, 꼬리 따위를 일일이 확인하고 애정을 고백하는 게 일상이 됐다.
키 낮은 테이블엔 노트북과 위아래로 내용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종이들이 뒤덮여 있었다. 그것들을 밟지 않으려 까치발로 움직이며 의자에 앉았다.
“재재, 잘 잤어?”
조용히 하느라 숨소리가 더 많이 섞인 목소리에도 서준은 눈을 떴다.
“……왔어?”
가뜩이나 낮은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미안해요. 밥만 챙겨 주고 가려 했는데.”
사과 듣는 게 민망할 정도로 깊이 자고 일어난 참이었다. 단지 그의 몸이 혜수의 목소리에 심하게 반응하는 탓이었다. 서준은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십여 년간 그를 괴롭혔던 수면 장애는 그 세월이 무색하게 끝났다.
일하고, 몸을 심하게 움직여도 매일 두세 시간씩밖에 못 자던 서준에게 갑자기 나타난 건 이 여자밖에 없었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결과가 그랬다. 모로코에서 푹 잤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불면증과 두통에 약을 달고 살고, 늘 기민하게 서 있던 성질머리가 스스로 생각해도 많이 죽었다.
혜수가 손 닿는 거리에 닿자마자 붙잡아 당겼다. 품에 안은 몸에서 방금 씻은 향기가 났다.
“더 자요.”
“다 잤어.”
“밤 11시에 회의한다더니, 늦게 잤어요?”
“좀 길어졌어. 그래도 고양이 키우길 잘했네. 이혜수가 제 발로 찾아오고.”
“재재 어제도 새벽에 밥 먹었나 봐요. 배가 통통해요.”
“내 배도 좀 만져 봐.”
“그건…… 귀여운 게 아니라서 싫어요.”
눈을 가늘게 뜨며 내려 보더니, 장난스럽게 코끝을 살짝 깨물었다. 눈을 찡그리면서도 아프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서 받아 줬다. 영락없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면도하기 전이라 혹시 그것마저 아플까 봐 꼭 끌어안기만 했다.
“일찍 일어나서 뭐 했어?”
“대청소.”
“그런 거 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자꾸 집안일 찾아 하면 사람 쓸 거야.”
싫어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관심을 바라고 일부러 솔직하게 한 말에 정색했다. 이럴 때마다 제대로 반응하는 그가 좋았다. 혜수는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고 비볐다. 불리해지거나 바라는 게 생기면 요즘은 늘 이런 식이었다.
“청소 정도는 내 손으로 해야 마음 편해요. 새해기도 하고…….”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던 서준은 뭔가 생각난 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혜수는 몸만 옆으로 돌려 누워 곧은 허리와 빚어서 만든 것 같은 서준의 상체를 멍하니 바라봤다. 단단하고, 강인했고, 아름다운 걸 보고 그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런 욕망을 알아차리지 못한 서준은 서류와 자료들이 잔뜩 쌓인 테이블에서 뭔가를 찾느라 바빴다.
“언제까지 그럴 거야?”
“……뭘요?”
앞뒤 없는 질문과 불쑥 내민 종이 한 장에 음흉한 눈길을 숨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