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접점-62화 (62/76)

[62화]

“갖고 계신다는 60호짜리 파도, 저한테 보내 주십시오.”

“뭐, 어차피 훔친 거나 다름없으니 돌려주는 게 맞겠지만…… 굳이 그쪽한테 보내 드려야 합니까?”

“가치 제대로 매겨서 주인한테 돌려주겠습니다. 보증이라도 필요하면 하시죠.”

“알겠……습니다.”

“아까 받은 명함 연락처로 주소 보내 드리죠.”

담배 하나를 다 태우고 나서야 이언은 고민하던 말을 꺼냈다.

“근데 혜수 손 상태, 심각한가요? 아, 별 뜻 없습니다. 그저, 제가 이혜수 팬이라서.”

“주변에 팬이 많은 걸 본인만 모르니 안타깝네요. 손은 괜찮을 겁니다. 그렇게 만들 거니까.”

이언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주제넘게 아는 척해 보자면 이혜수는 사고 충격 때문에 못 그릴 애는 아닙니다. 오히려 힘들면 붓을 100개씩 쌓아 놓고 다작했습니다. 그중에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게 거의 없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제이 윤에 필요한 그림들도 다 소화했어요.”

“……너무 잘나가는 게 두려웠을 수도 있죠.”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초면에 큰일 떠넘기고 가는 기분이네요.”

“무관심했던 벌, 받는 거죠.”

“네, 벌받는 김에 앞으로 이혜수랑 단둘이 만나는 것도 삼가시면 좋겠습니다.”

미련 없이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보며 이언이 웃었다.

어떻게 된 게 이혜수 주변엔 정말 미친 사람들밖에 없는 것 같았다.

“굿이라도 해 줘야 하나.”

스튜디오 안으로 돌아온 이언이 1층에 들어오자마자 삼삼오오 몰려 있던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김 대표님, 저 남자 누구예요?”

그를 시작으로 기다렸다는 듯이 서준을 주제 삼아 떠들기 시작했다.

“들어오자마자 ‘정은하 씨, 어디 있습니까.’ 하면서 각 잡고 찾던데? 정 대표님 어장 안에 있는 사람 중 한 명인가?”

“……쓰읍. 그런 것치고는 분위기가 너무 살벌하던데, 빚쟁인 줄.”

“분위기가 다 무슨 소용이에요? 겁나 잘생겼던데! 은하 언니한테 물어보고 소개해 달라고 해야지!! 목선 봤어요? 인생 뮤즈 각이라고.”

“운동하는 사람인 것 같던데.”

“인상 봐서는 그쪽 사람 같지 않아요?”

탐미적인 안목을 가진 인간들 아니랄까 봐, 그 찰나 스캔을 끝낸 모양이었다.

“자자, 진정들 하고 저 사람 여자 친구도 있고 뮤즈도 아니니까 내 얼굴이나 봐.”

“에이…….”

“알고 보니까 이언 작가님 애인이고 그럼 웃기겠다.”

“하지 마! 가질 수 없으면 게이가 되라는 사상 너무 만연하고, 폭력적이라고!”

“아니, 누가 조 화백님 보고 게이 되라고 했어요?!”

소란한 이 분위기가 오랜만이라 적응 안 되는 이언이 진절머리를 쳤다.

“그만!! 그냥 나도 알고, 은하도 아는 손님이야. 하아. 다들 미안한데, 작업실 쓰던 사람들 오늘은 끝내자.”

“왜요? 휴대폰 저기 있는데……. 사장님들 회의라도 하시나요?”

“내가, 내가 갖다줄게! 카페 정리도 다 내가 할 테니까 오늘은 출근 안 한 사람들까지 다 불러서 고기 먹어.”

“오, 김 대표님이 쏘는 겁니까?”

옆에 있던 이들이 모두 이언의 이름을 부르고 발을 구르며 요란하게 굴었다. 이언이 제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건넸다.

“거덜 내도 돼. 나갈 때 셔터만 좀 내려 줘.”

“예이! 사장님들은?”

“우린 좀 이따가 따라갈게. 자리 잡으면 문자 주라.”

“근데 우리의 ‘대’ 은혜 작가님도 불러야 하나?”

“스캔들 난 이후로는 요새 코빼기도 안 보이던데 뭘. 오겠어?”

“활동도 안 하잖아. 먼저 정 대표님 인터뷰 보니까 슬럼프라고 하던데.”

“됐어! 오늘은 우리끼리 먹자. 내 지갑 거덜 내려면 지금부터 가서 밤새도록 먹어도 모자라. 술도 많이 먹자!”

사람들이 미리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소고기’를 외치며 순식간에 밖으로 빠져나갔다.

셔터가 내려오는 것까지 확인한 그는 은하가 사용하던 노트북 앞에 앉았다.

모니터와 금고에서 장부까지 한참 확인하던 그가 시차에 적응 못 한 피곤한 얼굴을 문질렀다. 조명을 다 끄고,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아까까지만 해도 형태를 잘 쌓아 올리던 반죽 덩어리가 곤죽이 되어 있었다. 은하는 그걸 화풀이하듯 주먹으로 퍽퍽 치대고 있었다.

“정은하, 흙에 화풀이 그만하고 얘기 좀 해.”

“너도 나한테 뭐라고 할 자격 없어.”

“……우리 이러려고 같이 이거 시작한 거 아니잖아. 신입 작가한테 박하게 구는 갤러리들, 꼰대같이 구는 기성 작가들 싫어서 잘해 보자고 만든 거잖아. 근데 이게 뭐야?”

이언이 서류 뭉텅이를 테이블 위로 집어 던졌다.

“왜 이런 인간들한테까지 혜수 그림을 상납해? 네가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이런 사람들 그림 사는 거 도와주고, 로비하는 데 이용당해!”

“남들 다 아는 큰 곳에서 나쁜 짓 하면 너무 티 나거든. 넌 작품만 만드느라 몰랐겠지만, 요즘은 이렇게 언덕처럼 작은 곳에서 해. 그것뿐인 줄 알아? 이혜수 같은 적당한 작가 하나 만들어서 진짜 좋은 그림이랑 끼워 넣고 사고팔아. 6천만 원 이하로. 그럼 그건 탈세가 아니라 고고한 소비 정도로 보이거든. 중국 부자들도 그래. 여기선 1천만 원짜리 그림, 1억에 사 가. 그럼 나한테 1천만 원 고스란히 떨어져!”

“너 진짜…….”

“그럼 너는 지금까지 언덕 유지하고, 네가 작품 활동 하는 동안에 필요한 경비들이 전부 다 그림 팔고, 수업만 받아서 되는 줄 알았어?”

“아무리 그래도 하지 말아야 될 짓은 하지 말았어야지!! 너희 외할머니도 모자라서 너까지 이혜수한테 그럼 안 되잖아!”

잔잔하기만 하던 이언의 목소리가 급변하여 스튜디오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서준 앞에서도 당당하기만 하던 은하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나한테 소리 지르지 마.”

“……미안해.”

갑작스러운 사과에 놀란 은하의 눈이 커다래지더니 거짓말처럼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뭐?”

“너 이렇게 된 거 다 나 때문이야. 전시회 홍보 인력으로 써먹고, 강의할 때 혼자 잘났다고 떠들고, 택배 포장까지 이용해 먹고……. 그러면서 책임이나 귀찮은 일은 다 너한테 떠넘겼어. 나한테 비난할 자격 없어, 정말 미안.”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았던 얼굴에서, 차갑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려 얼굴을 적셨다.

울음을 참으려는 듯 호흡이 가빠졌다. 훌쩍거릴 때마다 어깨가 튀어 올랐다.

“앞으로 내가 더 잘할게. 그러니까 이제 안 하던 짓은 하지 말자. 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말고, 우린 우리 하고 싶은 것만 하자. 어? 이혜수나 윤 회장님도 빼고.”

“하아, 정말 대단한 이혜수 바라기들이네. 걔 아직 우리 소속이거든? 물 들어온 김에 노 저어서 장사 좀 해 보겠다는 것도 뭐가 그렇게 나쁘다는 거야? 기존에 그려 놨던 거로 포스터도 만들고, 굿즈도 만들어서 팔겠다는 게 뭐가 나쁘냐고!”

“그것도 이혜수가 원하지 않았잖아.”

테이블 위로 은하가 엎드려 징징거렸다.

“개 짜증 나. 시발! 그렇게 뼈가 빠지게 그림 그리고, 빚어도 작품이나 전시 물어보는 건 활동도 안 하는 건방진 이혜수, 은혜뿐이야!!”

“너 이제 막 사람들한테 보여 준 거야. 아장아장 걸음마 뗀 거나 다름없다고. 벌써 인정받기 원하는 건 욕심이야.”

“그년은 학부 시절부터 유명했는데, 왜 나는 안 되냐고! 걔가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앉은 채로 발을 마구 구르며 속상한 듯 아이처럼 우는 은하를, 이언이 꼭 끌어안았다.

“강서준 그 새끼도 미친놈이야, 진짜. 지가 뭔데 뒷조사까지 하고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지랄이야!!”

“그만큼 혜수한테 진심인 거겠지. 근데 아까 그 남자, 대체 누구야? 보통 아닌 것 같은데. 너도 혹시 그 남자 좋아하니?”

“미쳤냐? 저 새끼, 은재 친오빠야.”

“무, 뭐?”

“정확하겐 배다른……. 하, 몰라. 거기까지 설명하려면 복잡해. 아무튼 이혜수 위한답시고 괜히 건드리지 마. 그냥 미친 것도 아니고, 위험한 미친놈이니까. 사람 죽일 수도 있어.”

당황한 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렀다.

***

차에서 내린 서준은 조수석 차창에 기대서서 혜수가 나타날 길 끝을 바라봤다. 언제 나올지 모르지만 기다렸다.

오늘 새로 알게 된 사실들이 머릿속을 부유했다.

보고 싶었다.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울컥 올라오는 그리움, 불안함과 초조함에 끊으려던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한 대 태울까 싶었지만, 그만뒀다.

찬기 어린 오후의 공기가 볼과 코를 지나갔다.

또 눈이라도 내리려는 걸까.

그때, 멀리서 혜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귀에 바싹 붙이고 통화하다가 서준을 발견하더니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깨까지 오던 머리카락은 이제 가슴께까지 와서 찰랑거렸다. 봄의 색을 품은 스커트와 코트 자락이 작은 몸을 부드럽게 감싸며 휘날렸다. 닿기도 전에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눈에 보이는 주변의 모든 게 멈추고, 이혜수만 움직였다.

오랜만에 구두를 신은 탓인지 서둘러 오는 걸음걸이가 어색했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가와 립스틱이 지워졌는데도 붉은 입술, 진심이 담긴 미소가 가까워질수록 마음은 확신에 차 무거워지기만 했다.

결국 이 사랑스러운 여자를 가장 힘들게 만들 제 존재가…… 혐오스러웠다.

“미안해요. 너무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

“얼굴이 얼었는데 뭘. 왜 나와서 기다렸어요?”

조수석 문을 열어 주고, 손을 내밀자 이젠 척척 잡고 올라탔다.

문을 닫기 전, 서준은 몸을 숙여 혜수의 구두를 벗기고 발목을 만졌다.

“아, 괜찮……!”

까진 오른쪽 뒤꿈치에서 살색 스타킹 바깥까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 정도는 그냥 못 본 척 좀 해 주면 안 돼요? 민망하게.”

“더 민망하게 할 수도 있는데. 스타킹 벗어 봐.”

“어차피 집에 갈 거잖아요. 싫어요.”

잡힌 다리를 안쪽으로 접어 넣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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