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접점-61화 (61/76)

[61화]

“아…… 직접 보면 되겠다.”

이언의 말을 끝으로 은하의 등 뒤가 싸늘해졌다. 흙 묻은 손과 몸이 천천히 돌아갔다. 기름칠하지 않은 의자에서 삐거덕, 소리가 났다.

“오랜만이네.”

낯선 이의 목소리에 작업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변했다.

은하가 입을 쩍 벌린 채 눈을 끔뻑거렸다. 서준은 벽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작업실 안을 훑었다. 정말 이질적인 존재감이었다.

“이게 누구야? 살아 있었네?”

따분하지 않은 인사말에 감동한 그가 고개를 치켜세우며 비웃고 본론을 던졌다. 실로 거만한 태도였다.

“혜수 자리는 어디야?”

“……잠깐, 잠깐만. 김이언! 아까 네가 봤다던 덩치 크고, 잘생겼다는 남자가 설마 저놈이야?”

둘이 아는 사이라는 사실에 놀란 이언이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어떻게 아냐는 눈이었다.

은하가 관자놀이를 붙잡고 일어섰다. 손은 여전히 흙투성이였다. 옆에 있던 이언과 테이블을 붙잡고 겨우 중심을 잡았다.

“괜찮아?”

“안 괜찮네. 그 미친년은 네가 누군지 알고도 만나는 거야?!”

날카로운 목소리를 들은 이언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갑작스러운 이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잔뜩 날이 선 은하와 낯선 저 남자에게서 벗어나야 했다. 여기에 어떤 형태로든 끼고 싶지 않았다.

그는 구석에 숨어 있던 접이식 의자를 끌고 와 펼쳐 주며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난 내려가 있을게. 편하게 얘기 나누시죠.”

급히 몸을 돌렸지만, 은하가 손목을 붙잡았다.

“이언, 가지 마! 어차피 돌아온 이상 너도 알아야 할 얘기야. 두 번 말하기 싫어.”

“그러시죠. 전 남자 친구분.”

단호한 호칭에 은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너 이혜수 뒷조사라도 했냐?!”

“사생활 조사는 따로 안 했는데, 지인치고는 진한 재회를 보여 주시더라고.”

기본적인 뒷조사는 이미 끝냈다는 얘기였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에 껴 버린 이언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 하하……. 김이언입니다. 네, 혜수 전 남자 친구고, 은하와 이곳 공동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독특한 캐릭터 디자인의 명함을 건네자 서준 역시 품 안에서 명함을 꺼냈다.

“강서준입니다. 숨겨 둔 남자 친구고, 이런 일 하고 있습니다.”

“아, 미국 회사네요? 데나로(DENARO)랑 연계된 마케팅 회사 맞죠?”

“……잘 아시네요.”

“얼마 전에 데나로 어페럴이랑 협업할 기회가 있어서 관심이 많았거든요. 대표가 사고를 치면서 무산됐지만. 한국에도 지사가 있습니까?”

“아직 없죠. 뉴욕에서 근무 중이었고, 휴직 상태입니다.”

옆에 앉아 있던 은하가 벌떡 일어섰다.

“데나로? 너 혹시…….”

“그런 로맨틱한 얘기는 네가 알 것 없고. 본론부터 하지. 이혜수가 정우주랑 요란하게 스캔들 낸 이유, 알지?”

“진도 빠르네. 그 전에 너부터 얘기해. 이혜수랑 너, 뭐야?”

“아까 김이언 씨 얘기는 뭐로 들었어?”

“미쳤냐?!”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이혜수 방관한 너는 제정신이고? 정우주 팬들 인신공격에 악플, 추측성 소문, 얼굴로 먹고산다고 비난하는 예술계 인간들, 이때다 싶어서 물어뜯었던 기자들……. 네가 뭐가 다르지?”

화를 참지 못한 은하가 손을 뻗어 그의 멱살을 쥐었지만 서준은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옆에 있던 이언이 이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차며 만류했다.

“정은하, 그만해. 그쪽도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말씀이 심하시네요.”

“그쪽이 할 말이 아니죠. 여기, 이혜수 전속 갤러리나 다름없는 거 아닌가. 아니면 이름 써 가면서 홍보하고, 파생 상품 만들어서 장사하면서 정작 작가가 힘들 땐 나 몰라라 하는 게 이 동네 룰이야?”

서준의 말에 이언의 시선이 은하에게 닿았다.

“공적으론 그래. 우린 작가 예술 활동에 지원하면서 작품에 관한 것만 관여해. 사생활에 대해서 책임질 의무는 없어. 그리고 스캔들은 이혜수 선택이기도 해.”

“인터뷰에서 봤을 땐, 작가들이랑 공생하는 선량한 이미지로 홍보하더니……. 아니면 유독 그 여자한테만 박한 건가?”

어느새 말라서 굳은 흙을 떼어 내며 생각에 잠긴 은하가 씩씩거리며 호흡을 골랐다. 강서준이 여기까지 온 이상, 숨겨 봤자 제게 큰 이득이 없다는 걸 안다.

“인터뷰까지 찾아봤을 줄은 몰랐네. 그 정성이 갸륵해서라도 말해 줄게. 평창동에서 내 전시회 열렸던 날. 윤 회장님 회사로 그 새끼가 애인이랑 노는 사진들이 배송됐어. 남자 아이돌 애인.”

“……고작 그딴 거 숨기려고.”

어이없다는 듯, 한숨 섞인 비릿한 웃음을 뱉어 낸 그의 표정은 삽시간에 차게 식었다. 은하는 기죽지 않고 반박했다.

“그딴 거래. 외국에 잠깐 나가 있었다고 이 나라 정서 잊었냐? 너한텐 고작 그딴 거일지 몰라도 여기선 매장감이야. 거기다 정우주는 고아하신 윤 회장님의 유일한 약점이지. 너는 절대 못 하는 하나뿐인 손자, 그거! 그런 애가 이제 막 사람들한테 인정받기 시작했는데, 너라면 손 놓고 있겠니?”

“이 나라 정서는 몰라도 그 집안이 여태까지 이혜수를 어떻게 이용해 왔는지는 훤히 보이네.”

“피해자인 것처럼 말하네. 이혜수가 말 안 해? 아니면 여태까지 자기가 받아 온 이득들은 쏙 빼놓고 말하디?”

“그 이득들이 충분했으면 그 여자가 여태 집 한 채 없고, 빚에 시달리진 않았겠지.”

“몰랐구나?! 걔 내일모레 서른인데도 소녀 가장인데. 때마침 집도 없었어. 타이밍이 기가 막혔지. 가뜩이나 정우주 사업도 망해서 기죽은 마당에 그 사진까지 터졌어 봐. 걔만 죽을 것 같아? 제이 윤 모델까지 하잖아. 그래서 둘이 거래한 것뿐이야. 누구도 강요한 적 없어.”

가운데 낀 이언은 이 사태에 충격받아 울상을 지으면서도, 주고받는 대화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잊고 있던, 아니 외면하고 있던 이혜수의 사정과 미처 몰랐던 사실에 두통이 몰려왔다.

“10년 동안 그 여자한테 일방적으로 시킨 일들에 정말 강제성이 없었을까. 여태 그 여자가 제이 윤에 갖다 바친 작업들 양만 봐도 너나 외할머니 존재 자체가 반강제적이었겠지.”

고양이 같은 눈꼬리 끝이 미묘하게 떨렸다. 이언의 눈치를 살폈다.

“곁에서 무슨 일이든 다 하겠다고 한 것도 그 애야!”

“그러니까 넌 다 알고도 시켰다는 거네, 정은하.”

방관하고, 동참했다.

매주 수요일마다 무슨 일을 당하는지 알고 있었고, 기업에서 필요한 디자인과 그림들을 착취하며 로비에 이용하기까지 했다.

“……넌 이혜수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지? 100년, 200년 지난 이후에도 인정받을 거라는 무형적 가치까지 평가받아. 그런 대단한 이혜수는 내 도움 원하지도 않았고, 다 자기가 원해서 한 거야!”

다리를 꼬고 거만하게 앉아 있던 서준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질리도록 비웃었다.

“그래. 3년 동안 그림 한 점 그리지 않았는데 여긴 여전히 ‘은혜’가 주력 상품인 것 같더라. 인센티브만 따져도 어마어마하겠어. 전시회 기회조차 한번 없는 젊은 작가들 사이에선 넌 추앙받던데, 돈은 이혜수가 다 벌어다 줬네.”

“아무것도 모르면서 비꼬지 마!!”

“너나 정우주나 치부와 약점을 적극적으로 숨기지 않는 방만함은 무식함에서 나오는 건가. 내가 설마 아무것도 모르고 당당하게 널 찾아왔을까.”

강서준은 이미 이 작은 스튜디오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뭐?”

“이혜수 그림으로 로비하고, 기업에 필요한 작품들 착즙한 건 그럴 수 있다 생각했어. 윤 회장님 부탁일 테니까. 근데 지명도 적당한 작품들 외국에 비싸게 팔아 탈세 도와주는 건, 나도 좀 놀랐어. 받는 수수료도 어마무시하던걸.”

정은하는 흙 묻은 손을 꼭 쥐며 티 내지 않으려 했지만, 어깨가 떨렸다.

“그림 좋아하는 중국인 친구 덕분에 우연히 알았지. 역시 넌 외할머니 닮아서 예술보다는 장사 쪽이 어울려.”

창백해진 정은하와 이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는 걸 확인한 서준이 만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나가는 그의 뒤로 은하가 소리를 빽 질렀다.

“은재 이름만 나와도 벌벌 떠는 애야! 이혜수한테서 떨어져!”

다시 가까이 다가온 그가 살벌한 눈빛으로 정은하를 내려다보며 협박했다.

“떨어져야 하는 건, 죄책감 담긴 이름까지 지어 주면서 사람 이용해 먹은 너겠지. 경고야. 그나마 쥐고 있는 거 털리기 싫으면 입 함부로 놀리지 마. 이혜수랑 이혜수 그림에서 손 떼.”

슬슬 혜수에게서 연락이 올 시간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정은하를 두고, 서준이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때, 이언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그를 뒤에서 잡았다.

“잠시만요!”

뒤돌아보는 그의 눈동자가 어둠 안의 짐승처럼 시퍼렇게 빛났다.

두 남자가 주위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으며 가게 밖으로 나가 차 앞에 섰다. 이언이 태우던 담배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서준의 입꼬리가 불쾌하게 올라갔다.

“이혜수가 그쪽한테 배웠나 보죠?”

“아, 혜수도 아직 태웁니까?”

“아뇨. 끊었습니다.”

“다행이네요. 여러모로 죄송합니다. 은하만 믿고, 자금 출처나 영업 활동 제대로 확인 못 한 제 잘못이 큽니다. 솔직히 안 했어요. 제 일이 너무 재밌어서 거기에만 한눈팔렸었네요.”

“나쁜 짓 하는 수법이 교묘해서 알아내기 힘들었습니다. 문제는 착취당한 이혜수죠.”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방관한 건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혜수가 괜찮다고 해서 정말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뭐, 이쪽 세계에서 탈세 정도야 애교 아닙니까. 문제는 숨은 돈이죠. 뒤로 빼돌린 게 수면 위로 올라온다면 김이언 씨, 당신 이름도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 것도 알아보셨습니까?”

“더한 것도 많은데.”

차에 기대어 삐딱하게 서 있던 그가 목을 돌리고, 스트레칭하며 ‘원한다면 언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은근한 협박성 웃음을 지었다.

“혜수랑 언덕 문제는 제가 빨리 시정하겠습니다. 은하도 막을게요. 그러니까 더는…….”

“하나 더요.”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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