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옛날얘기는 이쯤 하자.”
“그럼 요즘 얘기 해 봐. 작업은 왜 안 하는 건데? 은하한테 물어봐도 성질만 내고.”
대답을 망설이던 혜수가 결심을 굳히고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보였다.
“이게 무슨 그림인데? 누구 가르쳐? 초등학생?”
“내가 그린 거야.”
“뭐?”
“나 전시는 참가 못 해.”
“무슨 일…… 있니?”
“손이 안 움직여.”
이어지는 얘기를 들은 이언의 표정이 점점 더 굳었다. 테이블 위로 맞잡고 있던 혜수의 손으로 시선이 뚝 떨어졌다.
“갑자기?”
“전부터 그런 기미는 보였는데, 부산에서 아트 페어 참가하고 확 심해졌어.”
웃어 보였지만, 혼자서 괴로웠을 걸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졌다.
“씩씩하네. 아니, 씩씩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건가?”
“괜찮아. 원인이 없어서 뚜렷한 치료 방법도 없다고 할 땐 우울했는데, 요즘은 조금씩이나마 다시 그려. 크로키도 하고, 유화로 채색도 해. 크레파스도 쓴다니까. 그리고 은하 언니랑은 어…….”
“하아. 분위기 보고 대충 눈치는 챘다만, 무슨 일인데? 은하 말로는 뭐 네가 건방지게 어쩌고 하던데.”
“일리 있네.”
“정우주는 네 상태 아니?”
혜수가 건조한지 계속 입술을 건드렸다.
“몰라.”
이언은 우주를 알지만, 모든 걸 알진 못했다. 함부로 솔직해질 수 없었다. 제삼자가 개입하는 순간, 거짓말을 지키는 게 힘들어졌다.
“전 남친한테나 현 남친한테나 선 긋는 거 여전하네.”
“내 그림도 못 그리는 상황이라 강의에 대해선 회의적이었어.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하고 싶어. 주말만이라도 좋고, 스페어나 대타여도 좋아.”
간절한 얼굴에 이언이 맥없이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떻게 그러냐?”
“안…… 될까?”
“소속 작가 중에 전시나 수상 경력 너만 한 사람 없어. 그런 스타 작가를 어떻게 대타로 써? 마침 잘됐어. 네 비밀 들었으니까, 우리 비밀도 하나 얘기해 줄게.”
두 사람의 목소리가 작아질수록 서준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지금 스튜디오, 은하가 독립하면서 가져갈 거야.”
“그럼 언덕은 어떻게 되는 건데?”
그림 그릴 때처럼 또랑또랑하던 눈빛이 순식간에 불안함에 휩싸였다.
“고급화해서 새로 만들 거야. 산책하러 나온 사람이 그림 사는 그런 동네에다가 내고, 강의도 꼼꼼하게 꾸려서 로테이션으로 돌려야지.”
“그게 가능해?”
금세 다시 반짝거리는 얼굴을 보고, 이언이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장들이 자기들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노는 것 같아도 착실히 돈도 벌고, 인지도도 쌓았잖아. 나도 언덕 덕에 성공했으니 이제 베풀어야지. 나머지는 은하랑 얘기한 다음에 설명해 줄게.”
디자인을 전공한 이언은 팝 아티스트로 활동했다. 직접 만든 캐릭터를 꾸준히 밀었지만, 국내 시장에선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 한 유명 브랜드 컬렉션의 액세서리 작업에 협업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뉴욕과 파리, 일본에서 전시회를 하거나 각종 브랜드와 일했고, 그의 작품들은 찍어 내듯 만들어졌다. 위상을 펼치던 중 정말 오랜만의 귀국이었다.
자기 일만으로 충분히 바쁠 텐데 언덕이며, 챙기지 않아도 되는 협업까지. 다정한 오지랖 사업도 여전했다.
“작업이랑 그 준비만 해도 시간 부족하겠네. 청춘 책임자까지 맡았다며.”
“지금은 이래도 너나 나나 청춘전(展) 병아리들이었잖아. 하아, 근데 나도 설마 전시회 맡아 달라는 소리는 들을 줄 몰랐지. 신 교수님 아니었으면 도망쳤다. 오랜만에 뵀는데 세 시간을 잔소리하시더라. 늘 겸손해라, 후배들 길을 내줘야 한다, 나도 잊으면 안 된다.”
‘청춘’은 이제 막 졸업하여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헤매는 신인들을 위한 등용문이었다. 2년에 한 번씩 전시회를 열고, 옥션 형태로 작품을 판매했다.
“오빠는 참가할 거야?”
“일본에서 가져온 게 있어서 그거 내놓을까 해. 은하한테도 도자기든 뭐든 하나 내놓으라고 했어.”
그들의 작품만으로는 홍보가 어려워서 데뷔를 마친 작가들 역시 참여를 종용당했다.
이 같은 기성 예술가들의 참여와 신인 등용에 적극적인 신 교수 같은 사람들의 후원 덕에 수익성이 거의 제로인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네 그림도 걸자. 오빠가 기획하는데 네 그림이 없다는 게 말이 돼?”
“하고 싶어도 못 한다고, 말했잖아.”
“지금 당장 그리라는 거 아니야. 혹시 이거 기억 안 나?”
이번엔 이언이 제 휴대폰을 꺼내 그림 사진을 보여 줬다.
잿빛의 유화 그림은 분명 혜수의 최근작이었다. 마티에르(Matière_재질감)가 울퉁불퉁한 게 보일 정도로 선명했고, 모로코에서 잃어버렸던 그림과 흡사했다.
“이거…… 어디서 났어?”
본격적으로 ‘파도’를 그리기 전에 60호짜리 캔버스에 고민 없이 물감을 쏟아부었던 그림, 이를테면 ‘파도’의 습작이었다.
“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했잖아. 버릴 게 분명하니까 내가 가져갔지.”
그 이후로 이언은 떠났고, 혜수는 부산 아트 페어에 참가하며 작은 ‘파도’를 그려 냈다.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
“이건 안 돼.”
“왜? 마음에 안 들어? 네 이름 거는 것만으로 홍보 효과도 무시 못 할 거고, 난 솔직히 옥션에 올려도 손색없다고 보는데. 바니시(Varnish_그림이 완성된 후에 작품을 보호하거나 수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처리제)도 발랐어!”
“생각 없이 그린 거야.”
“이혜수, 넌 그게 문제야. 생각이 있고, 없고가 뭐가 중요해? 작품에 큰 철학을 담으려고 하지 말라고 했잖아. 열심히 그려서 완성했으면, 그때의 네가 담긴 것만으로 충분한 거야.”
“잔소리 들을 시기는 지났거든? 아무튼 안 돼. 이거 지금 어디 있어?”
“싫어, 안 알려 줄래.”
“아, 오빠!”
이언이 도망치듯 자리를 비우자마자 혜수가 몸을 돌려 서준의 상태를 확인했다.
“지루해요?”
“지루할 틈이 어디 있어? 가짜 남자 친구 쫓아낸 지 얼마나 됐다고, 이번엔 전 남자 친구야? 대단해, 이혜수.”
“하아. 또 이러네.”
“어떤 전 남자 친구가 전 여친을 만나는데 장미 꽃다발을 들고 나타나? 막 껴안고, 머리까지 쓰다듬어?”
돌아보지도 않고 툴툴댔다. 그래도 얌전히 있어 달라는 말에, 잘 참고 있는 건 기특했다.
“난 저 사람한테 여동생이나 다름없어요. 그리고 조금 이따가 들를 곳이 있는데…… 거긴 혼자 다녀올게요. 괜찮죠?”
“이번엔 진짜 숨겨 둔 애인이라도 보러 가는 건가?”
인내심이 먼저 증발한 혜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테이블 위의 커피는 얼마나 휘저었는지 코스터가 엉망으로 얼룩져 있었다.
서준이 날 선 눈으로 올려다봤다. ‘오빠’라는 호칭에 으르렁거리던 그날 밤과 똑같았다. 넥타이도 신경질적으로 풀려 있었다.
얼굴만 보면 영락없는 강서준이었다. 오만하고, 늘 자기가 우위에 있는 게 익숙하며 질투 같은 건 평생 느껴 본 적 없어서 더 화내는 것 같은 사람. 그럼 요즘 가끔 보이는 그 불안함의 원인은 무엇일까.
눈썹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혜수의 표정을 오해한 서준은 지지 않기 위해 눈에 힘을 줬다.
허나 이혜수는 그의 예상을 부수고, 무릎을 구부리고 앞에 앉았다. 허벅지 위에 올라가 있던 서준의 손을 끌어다가 제 오른쪽 볼 위에 올리고 예쁘게 웃었다.
“금방 끝나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응?”
제 마음을 고백한 이후로 혜수는 가끔 이런 식으로 불쑥불쑥 사람을 놀라게 했다.
때때로 안기거나 애교를 부리며 사람을 가지고 놀았다. 내장까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끼 부린다고 뭐라고 하더니, 여태 이런 얼굴을 잘도 숨기고 있었다.
“너 진짜…… 말 돌리지 말고. 누구 만나러 가는 건데.”
“근처에 교수님 작업실이 있거든요. 서준 씨를 데리고 갈 순 없잖아요.”
단정하게 입은 옷차림이 그제야 이해가 갔다.
“알았어.”
완벽하게 무장이 해제된 서준의 입매가 떨리는 걸 보고 손등 위로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착해.”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앞쪽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지 못했지만, 건물 뒤쪽 화장실에서 나오던 김이언은 그 장면을 모두 목격했다. 당황한 그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몸을 숨겼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위해 다시 화장실로 가 찬물로 세수까지 했다.
이언이 제자리로 돌아왔을 땐, 혜수밖에 없었다.
***
언덕으로 돌아온 이언이 마침내 작업실에 은하와 둘만 남게 되자 참지 못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정은하. 혜수 말이야. 우주랑…… 요즘 어때?”
당황한 은하가 몸을 휙, 돌렸다. 단발머리가 찰랑거렸다.
“둘 다 연락 안 한 지 꽤 됐어. 왜?”
“아무래도 혜수한테…… 다른 남자가 있는 것 같아.”
“뭐?”
이언이 오늘 카페에서 본 광경을 재연까지 하며 말해 주자 은하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말도 안 돼. 이혜수가?!”
“네 동생 여자 친구가 바람났다는데 왜 즐거운 얼굴이지?”
“자세히 얘기해 봐. 잘생겼어?”
“뭐, 같은 남자가 봐도 인정. 덩치도 크고, 남자답고 잘생겼어. 근데 지금 상대방 외형이 문제야? 천하의 미대 여신이 바람을 피운다니까.”
“혜수, 상태 어땠어?”
“그럭저럭. 근데 왜 안 놀라는 거냐고.”
은하가 콧방귀를 뀌며 작업대로 몸을 돌렸다. 붉은 기가 도는 흙을 주물러 쌓았다.
“……너한테도 천천히 얘기하려 했는데 애초에 혜수랑 정우주, 아무 사이도 아니야. 의도적으로 스캔들만 낸 거야. 혜수가 남자를 만난다면 그건 바람이 아니고, 연애겠지. 아니, 근데 누구지? 만날 사람이 없을 텐데.”
그때, 누군가 이언의 시선에 웅장한 배경 음악이라도 깔린 것 같은 분위기로 불쑥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