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접점-59화 (59/76)

[59화]

***

혜수의 고백 이후, 정신없이 서로를 안았다. 감정이 맞닿은 섹스는 그 어느 때보다 격정적이었다.

여러 차례 끝을 본 서준이 포식한 짐승처럼 잠들었다.

그제야 혜수는 별채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잠들었다가 깨어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지만, 그는 쉽게 식지 않았다.

혜수는 미처 외투를 걸치지도 못하고 눈이 딱딱하게 언 정원을 달려 본채로 돌아갔다.

몇 번이고 절정에 다다랐던 몸이 물만 닿아도 망가진 것처럼 움찔거렸다. 피곤했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채워지는 만족감에 길게 숨을 내쉬었다.

머리를 말리고 거실 소파에 누워 잠들었다.

블랭킷만으로 추울까 걱정했지만 하나도 춥지 않았다. 이유는 새벽에 일어나서야 알았다.

언제 왔는지 몰라도 서준이 같이 누워 있었다. 좁은 소파, 그의 팔과 다리 사이에 안겨서 눈을 떴다. 혜수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언제부터 깨어 있었는지 그가 꽉 붙들었다.

“말도 없이 없어지지 마.”

목에 코를 박고 마구 비볐다. 허벅지 옆으로 올라온 손은 자연스레 티셔츠 하나만 걸친 몸을 탐하기 시작했다.

밤새 괴롭혔던 정점을 건드리자마자 신음하며 팔을 밀어 냈다. 혜수는 몸을 굴려 서준의 얼굴을 마주했다.

“아파요. 하지 말아요.”

“부었네.”

“누구 덕분에요.”

버둥거리는 몸을 놓칠세라 꼭 끌어안고, 일으켜 다리 위에 앉혔다. 이리저리 뻗친 서로의 머리를 보고 웃다가 조심스레 눌러 줬다. 잠이 덜 떨어진 긴 눈가를 매만졌다.

“보여 줘.”

혜수는 머리 위로 티셔츠를 벗어 내고, 무릎을 세워 그의 위에 앉았다. 여명에 드러난 여체를 눈으로 감상하던 서준의 눈빛이 다시 위험하게 빛났다.

“하아.”

만지기만 한다는 말은 지켜지지 않았다.

잡고 있던 손목이 빨개지는 걸 본 그가 놓아주었다. 자유를 찾은 팔이 유리로 된 테이블 위로 뚝 떨어졌다.

차가웠다. 깨끗했던 유리 위가 땀에 젖어 얼룩졌다.

온종일, 발정 난 짐승처럼 몸을 섞었다.

샤워하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자다가도 일어나 불시에 흘레붙는 통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와중에 먹이고, 마시는 건 꼬박꼬박 잊지 않았다.

그림 그릴 때만큼은 심하게 건드리지 않았다. 붓을 잠깐이라도 놓는 순간이 되면 어디선가 나타나 혜수를 낚아챘다.

이 집에 콘돔을 어디에 얼마나 숨겨 놨는지 몰라도 작정한 게 틀림없었다.

평생 겪어 본 적 없던 크리스마스가 지나가고 있었다.

불안함에 멀쩡한 적 없었던 손끝에 새살이 나서 자꾸 간지러웠다.

***

방해 하나 없이 달콤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짙은 남색의 슈트를 빼입은 서준이 본채의 거실로 들어섰다. 넥타이까지 한 게 오랜만이라 그런지 답답해 살짝 끌렀다.

검지로 벽난로 위를 훑었다. 정우주가 나간 이후로 집의 청결함은 유지됐다. 생활 먼지가 있긴 해도 눈 뜨고 보기 힘든 정도는 아니었다. 굳이 실내화를 찾아 신지도 않았다.

“먼지 많아요?”

계단에서 내려온 혜수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새하얀 블라우스에 연분홍색의 H 라인 스커트. 화장에 머리까지 예쁘게 말아서 내렸다. 처음 보는 차림새에 서준이 어금니를 물었다.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해도 표정이 풀리지 않았다.

“그러고 가려고?”

“이상해요?”

“그럴 리가. 외투는 따뜻하게 입어.”

“그러는 서준 씨는요?”

“시동 걸어 두면서 차에 뒀어.”

“……고양이는 다 챙겨 줬어요?”

“다 했어.”

“금방 내려올게요.”

혜수가 다시 계단 위로 발을 옮기는 걸 확인하고 한숨을 쉬었다.

오랜만의 외출에 기분이 들뜬 건지 아니면 ‘오빠’라는 사람과 만나는 게 좋은 건지. 어느 쪽이든 저 모습을 누군가와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이 서준에게 썩 기쁜 일은 아니었다.

매일매일 조금씩이지만, 그림을 그리는 혜수는 더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시간이 짧거나 결과가 좋지 않아도 웃었다. 긍정적이고, 씩씩한 모습은 처음 마라케시에서 마주쳤을 때와 똑같았다.

분명 좋은 징조였음에도 겁났다. 이혜수가 괜찮아질수록 최악의 결말이 그의 양쪽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이 여자가 재기 불능할 정도로 흔적도 없이 무너지거나 혹은 자기를 버리거나.

괜찮을 거라고 자위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향한 감정이 확실시되고, 정서적인 안정감을 되찾고, 그림까지 그릴 수 있게 된다면 나중에 제 존재를 알고,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금방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무슨 생각 해요?”

어느새 소리 없이 내려온 혜수가 계단 몇 개를 남겨 놓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어디 아픈 건 아니죠? 그럼 나 혼자 다녀올게요.”

“싫어.”

단호하게 말하며 손을 뻗자, 혜수는 들고 있던 코트와 가방을 떨어뜨리고 와락 안겨 왔다. 조금 위험한 거리감이었지만 겁도 없었다. 서준도 이젠 익숙한 듯, 한쪽 팔에 다 들어오는 몸을 안아 들었다.

“아직도 내가 이언 오빠 만나러 가는 것 때문에 기분 안 좋아요?”

발레리나처럼 발을 가볍게 바닥에 내려놓으며 새침하게 묻자, 서준은 립스틱 때문에 평소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입술을 매만졌다.

“모로코에서 발랐던 거네.”

“다른 건 기억 못 하면서 이런 건…….”

진득하게 입술을 물었다. 밀어 내려던 혜수가 점점 진해지는 입맞춤에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립스틱이 번진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 주며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건 나만 알고 싶어.”

“입술 번졌죠?”

“아니, 예뻐.”

“예쁘긴 무슨, 놔 봐요. 거울 다시…….”

“퇴근 시간에 안 걸리려면 이제 출발해야 해.”

서준이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려는 혜수의 손목을 잡아 서둘렀다.

두 사람이 언덕 꼭대기 집에서 칩거하다시피 지내는 동안 세상은 연말연시에 대한 기대로 반짝이고 있었다. 곳곳의 트리, 일루미네이션,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나와 있는 사람들.

손잡고 지나가는 연인을 보고, 한 걸음 뒤에서 저를 쫓아오는 서준을 슬쩍 쳐다봤다.

몰랐을 때보다 못한 사이란 사실이 새삼 서글펐다. 그런 기분을 알았는지 주머니 안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모르는 발신 번호. 잠시 망설이다 받았다.

― 자꾸 쳐다보면 끌고 돌아간다?

바로 뒤따라오고 있던 남자의 목소리에 푸훗, 웃어 버렸다.

“이 번호는 뭐예요?”

― 비상용 휴대폰. 힐끔거리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그만 헤매고 약속 장소로 가.

“안 헤맸거든요.”

당당한 태도에 서준이 비웃었다.

― 작가님 아까부터 같은 자리 세 번 돌고 있어. 지금 나오는 골목에 들어가자마자 왼쪽에 있는 카페. 하얀색 작은 간판 있는 거기.

“……오랜만에 나와서 그런 거예요.”

전화를 끊고, 그가 알려 준 대로 움직였다.

약속 시각보다 일찍 도착한 카페 구석에 자리를 잡았고, 그런 혜수의 뒤로 서준이 앉았다.

등을 맞댄 두 사람이 각자 주문을 마쳤다.

혜수가 대외적으로 정우주의 여자 친구 역할을 지속하기 위한 선택이었고, 굳이 이언과 부딪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 작가님, 길치구나. 혼자 보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오랜만이라 그런 거라니까…….”

길을 걷는 내내 같이 오길 잘했단 생각을 했다. 다는 아니어도 혜수를 알아보고 힐끔거리는 사람들도 많았고, 몇몇은 몰래 사진까지 찍으려 했다. 그때마다 등이나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가려 줬다. 경호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래도 뒤에 있으니까 든든하긴 하네요. 이래서 사람들이 경호원 고용하나 봐요.”

“끼 부리지 말아요, 작가님. 자꾸 그러면 옆자리에 앉아 버릴 거야.”

“그럼 오빠한테는 뭐라고 소개하게요?”

“까짓것 세컨드 하지 뭐.”

혜수가 웃는 사이 저 멀리서 장미 꽃다발을 안은 남자가 성큼 다가왔다.

“혜수야!”

“이언 오빠.”

이언을 먼저 발견한 혜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가 달려와 와락 껴안았다. 반갑다고 방방 뛰는 동안 고개를 옆으로 돌린 서준은 그를 꼼꼼하게 살폈다.

적당히 곱실거리는 갈색 머리에, 쌍꺼풀진 온화한 인상. 셔츠에 니트를 덧입은 깔끔한 패션이었지만, 목과 손에 범상치 않은 무늬의 문신들이 보였다.

어색하게 안은 등을 토닥토닥해 주며 혜수가 눈치를 살폈다. 생각보다 조용해서 안심했다. 그럼 그렇지. 사회성이 있는 사람이면 정도를 지킬 것이다.

“잘 지냈어?”

“나는 잘 지냈지. 너는 내가 없는 3년 동안 안 괜찮았다며.”

막역한 사이에나 가능한 직설적인 발언에 서준의 미간 사이에 주름이 하나 깊게 팼다.

“꼭 그렇진 않아.”

“아니긴. 오죽 힘들었으면 정우주 같은 놈을 만나? 은하가 입에 거품을 물고 닥치라더라.”

“그랬어?”

“얼굴은 나랑 사귈 때랑 전혀 달라진 게 없네.”

탕!

뒤에서 서준이 커피 잔을 테이블 위로 세게 올려놓는 바람에 깜짝 놀란 두 사람의 어깨가 튀어 올랐다.

이언은 같은 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온 선후배 사이였다. 은하는 물론 우주 역시 잘 알고 있었고, 혜수와는 잠깐 사귀기까지 했다. 첫사랑이었다.

“많이 말랐네. 잘 먹고 있는 거야?”

“잘 먹어. 걱정하지 마. 무슨 꽃다발까지 사 왔어?”

“돈 많이 벌면 꽃다발 사 주기로 옛날에 약속했었잖아.”

“……그랬나?”

붉은 장미가 가득 담긴 다발의 향기를 맡으며 잠깐 풋풋한 옛날얘기에 빠졌다. 그럴수록 뒤에선 흉흉한 기운이 느껴졌다. 괜히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혜수는 의자를 당겨 앉고, 황급히 말을 돌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