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접점-58화 (58/76)

[58화]

“하여튼! 진짜 저 싸가지.”

“죄송해요. 저 때문에 저러는 거예요.”

“저 새끼 싹수없는 게 어디 하루 이틀도 아닌데 그게 왜 작가님 탓입니까!”

아침 햇살이 싱긋 웃는 혜수의 얼굴에 번졌다. 민얼굴에 묻어 나오는 아름다움과 친절함에 온몸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괜한 말이 나올 정도로.

“작가님! 저는 늘 작가님 편입니다.”

“감사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은혜 작가님이 만들어 주신 아침밥을 먹게 됐다니……. 착하게 살았더니 크리스마스 선물을 다 받네요. 흑.”

너스레에도 상냥하게 웃던 혜수가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렸다.

“어제 서준 씨한테 얘기 들으셨죠?”

“읍, 크윽. 쿠훕……, 쿨럭!!”

갑자기 사레가 들린 현진이 고개를 돌리고 괴로운 듯 기침을 토해 냈다.

“괜찮으세요?”

건네받은 물을 꿀꺽꿀꺽 들이켜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아, 하. 크흠. 아 죄송합니다. 그, 작가님도 아시다시피 저 새, 아니 서준이랑 제가 워낙 오래된 친구라고 하긴 했는데, 별 얘기는 안 했습니다!”

“둘이 있는데도 이상하게 안 보시는 것 같아서 여쭤봤어요. 다행이네요.”

“예?”

“저 사람, 맨날 들을 줄만 알지 정작 자기 얘기는 하나도 안 해 주거든요.”

“아아……. 원래 좀 그래요. 답답하죠?”

“그래도 다정해요. 수의사님 같은 분이 곁에 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대신 수의사님이 얘기 많이 해 주세요.”

예쁘다고 생각은 했지만, 곁에서 본 혜수는 정말 아름다웠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현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심지어 마음씨도 착했다.

“나중에…… 나중에 알게 되더라도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저놈도 사정이 많았거든요! 아픔이 많은 놈입니다. 서툴러서 그렇지 진심이에요.”

“네?”

“하, 그러니까 제 말은…… 고양이 보러 가실래요?”

퍽!

소리도 없이 대문으로 돌아 들어온 서준이 그의 몸을 발로 차 버렸다. 예고도 없는 공격에 현진은 맥없이 풀썩 옆으로 쓰러졌다.

“내려가는 길 다 녹았으니까 꺼져.”

“어흑…….”

“수의사님, 괜찮으세요? 사람이 왜 이렇게 폭력적이에요?”

“내 앞에서 다른 사람 두둔하지 마.”

살벌하게 말하던 서준이 혜수가 째려보자 부엌 쪽으로 몸을 돌려 먼저 피했다. 현진은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팔을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작가님, 식사 다 하셨으면 잠깐 저랑 가실까요? 야, 우리 별채 갈 거니까 이거 치워라! 어? 나랑 작가님은 별채 갈 거야! 알겠냐?!”

신이 난 듯 떠들며 웃던 현진은 시퍼렇게 눈을 뜨고 나오는 그를 보고 황급히 정원으로 도망쳤다.

***

혜수가 현진을 따라 별채까지 오긴 했지만, 처음이라 망설였다. 반면 그는 뭐가 그리 신났는지 콧노래까지 불렀다.

본채와는 외관마저 딴판이었던 별채는 그 내부도 무척 포근했다. 온통 서준의 냄새가 났다. 침대 헤드 보드 위엔 마라케시에서 그려 준 초상화가 붙어 있었다. 심장 한편으로 따뜻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두리번거리는 혜수를 보고 현진이 물었다.

“혹시 여기 처음 오시는 거예요?”

혜수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찾은 적 없어도 집주인은 늘 제 발로 찾아왔으니까.

“깔끔하죠? 저 자식이 무뢰한처럼 떠돌아다니면서 괴팍한 일을 하긴 했어도 결벽증이 있거든요. 앉으세요. 마실 거 드릴게요.”

의자에 앉으며 서준에게 듣지 못한 그의 얘기를 물었다.

“위험한 일…… 하는 게 맞나 보네요.”

“예, 예전 일이죠! 남자 놈들 패기 넘칠 때가 한 번씩 있잖아요. 그땐 굳이 위험 지역 돌아다니면서 일부러 그런 일만 골라 했거든요. 경호 일부터 시작해서 한 번씩 통화하면 정글이나, 바다 위, 분쟁 지역에서 물품 나르고……. 말은 안 해도 총도 꽤 쐈을걸요. 걱정 마세요. 지금 하는 일은 그렇게까지 위험하지 않아요.”

얼마 전 총 쏘는 걸 제 두 눈으로 봤고, 그땐 본 적 없던 커다란 상처가 등에 생긴 걸 봤지만 현진이 걱정할까 굳이 말하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끄덕이며 웃었다.

서준은 자신을 호텔 관계자라고 했지만, 그러기엔 총기 사용이나 위험 상황에서의 대처가 익숙해 보였다. 그런 경험이 많거나 관련이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다. 늘 당당했고 겁 없는 포식자처럼 자신감 넘치는 태도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때,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르는 작은 고양이가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야옹, 미야아아―

화들짝 놀란 혜수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다리에 다가와 냄새를 맡고, 몸을 비비더니 폴짝 뛰어서 무릎 위로 올라왔다.

“혹시 고양이 무서워하세요?”

“좋아해요.”

“으하하! 다행이다. 이 자식, 우리 앞에선 조용하더니 혜수 씨 앞에선 엄청 시끄럽게 구네!”

현진이 따뜻한 녹차를 가져와 내밀었다.

“고양이가 있었구나.”

“강서준이 말 안 했죠? 얘가 좀 사람한테 상처가 많은 애라서 엄청 예민하고, 아팠어요. 다른 사람 보여 주긴 좀 그래서 일부러 안 보여 줬을 거예요. 근데 제가 누굽니까? 전문가가 보기엔 이제 환경에도 적응한 것 같고, 또 우리 작가님이라면 좋아할 것 같아서 모셔 왔죠!”

무릎 위에서 구르며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귀여워요.”

“하하!! 주제에 수컷이라고 또 미인을 알아보네요.”

“이름은요?”

“그게…… 저 자식이 아직 정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제가 애초에 임시 보호만 부탁한다고 떠맡긴 거라서. 아!! 이참에 작가님이 지어 주시는 건 어떨까요?”

“제가요?”

“예! 저는 아예 저놈을 집사로 만들어서 한국 못 뜨게 만들어 버리려고요.”

“그런 이유라면…… 저한테 권한이 없을 것 같은데.”

검은색 고양이의 발엔 아직 분홍색인 부분이 남아 있었다.

“흠, 제 생각엔 작가님한테 가장 있을 것 같은데.”

“네?”

“아,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원래 한국에 있을 생각이 없는 놈이었거든요. 그런데도 남아 있는 거 보면 꼭 고양이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서요.”

품에 있는 고양이가 대화에 끼어들 듯 연신 떠들어 댔다.

“고양이는 표현이 확실한 동물이거든요. 이 녀석, 작가님이 마음에 들었나 봐요.”

부드러운 고양이의 귀와 머리, 몸통을 쓰다듬는 혜수의 얼굴이 한층 온화해졌다.

“근데 사람한테 아픔이 많다는 게……. 무슨 일 있었어요?”

“사실 길에서 살던 고양이였는데 차에 치여서 가족들이 다 죽었어요. 맨 처음에 누군가 임보 해 주다가 새끼 주제에 너무 성질이 포악하다고 버림받고, 돌고 돌다가 병원까지 왔어요.”

“……그랬구나.”

급격하게 어두워진 표정에 놀란 현진이 급히 제 입술을 때리며 말을 돌렸다.

“예전엔 얼마 못 먹어서 말랐는데, 서준이가 잘 먹였는지 통통해졌어요! 저 배 좀 보세요!”

“그러네요. 통통.”

“작가님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이제 자주 들여다봐 주세요. 아,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가실 수 있을까요?”

“기어서라도 가야죠! 저는 이제 못 올 것 같으니까, 병원에 놀러 오세요. 기다릴게요.”

“코트랑 안경 찾아 드릴게요.”

“아마 강서준이 찾아 놨을 거예요. 갑자기 사람이 우르르 나가면 외로워할 테니까 여기 계셔 주세요. 그럼, 안녕! 아아, 그리고 제가 의뢰한 그림 말인데요.”

“그건 정말 죄송해요.”

“기한은 얼마든지 걸려도 상관없습니다. 그냥 그려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현진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고 별채 밖으로 나갔다.

한바탕 큰 폭풍이 지나간 기분이라 다리에 힘이 빠졌다. 소파에 다시 앉자마자 쉬지 않고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 때문에 마음은 금방 진정됐다.

“아팠는데 형이 지켜 줬구나. 다행이다.”

고양이를 살짝 들어 올려 코에 입을 맞췄다. 노랗고, 동그란 눈동자가 반짝이더니 문이 열리자 후다닥 내려가 버렸다. 집주인이 돌아와 기쁜지 다가가 다리에 몸을 비볐다.

“수의사님은요?”

“택시 불러서 갔어.”

“아직 화났어요?”

“화 안 났어.”

고양이를 품에 안은 서준이 혜수가 있는 소파 곁에 다가와 바닥에 앉았다. 화 안 났다는 말을 증명하려는 듯 혜수의 다리에 머리를 슬쩍 갖다 대고 기댔다.

“나, 다시 일하려고 해요.”

“일?”

“언제까지 여기서 빈둥거리고, 놀 수만은 없잖아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아요. 어제 통화도 그래서 한 거고.”

서준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뭐라 말하려는 순간, 혜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상체를 숙여 입을 맞췄다. 마른 입술을 물었다가 천천히 떨어졌다.

“미국, 안 갈 거죠?”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안 갈 거라고 약속해요. 앞으로 위험한 일 안 하겠다고, 약속해요.”

“……네 옆에만 있을 거야.”

“그럼 앞으로 괜한 질투로 시간 낭비 하지 말고 나만 봐요. 나도 그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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