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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접점-57화 (57/76)

[57화]

“안 데이셨어요?”

현진이 서준 쪽으로 고개를 돌려 소리 없이 욕하고, 다시 혜수를 보며 활짝 웃었다.

“괜찮습니다. 좀, 어, 놀랐어요. 은혜 작가님.”

“저야말로 두 분이 친구 사이일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서준이 말한 ‘음침한 놈’이 혜수가 아는 수의사와 동일 인물일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세상이 좁다고 해야 할지. 이 상황이 신기하고, 그가 반가워서 밝게 웃는 혜수의 얼굴을 보고 현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흑…….”

“머리 아프세요?”

“이 정도로 안 죽어. 괜찮아.”

“네가 뭔데 날 대신해서 괜찮다고 하지? 하, 사실…… ‘누가’ 제 좋은 차를 가져가는 바람에 택시를 타고 왔거든요. 이 꼭대기까지 도저히 올라갈 수 없다고 그러셔서 맨몸으로 올라왔어요. 솔직히 ‘누가’ 제 전화만 제대로 받았어도 이럴 필요까진 없었죠. 저 추워요, 작가님…….”

“이불 더 가져다드릴까요?”

“별채가 좁아서 훨씬 따뜻하니까 거기로 데려갈게.”

현진의 쇼를 관망하던 서준이 참지 못하고 뒷덜미를 잡아 들었다.

“잠깐, 별채가 어딘데? 지하실 같은 데 아니지? 아니지? 어?! 자, 작가님! 이대로 절 놓치시면 안 돼요! 저 이대로 가면 죽을 거예요! 안 돼!! 살려 주세요!!”

질질 끌려가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봤지만, 두 남자는 눈 쌓인 정원으로 금방 사라졌다.

서준의 발자국 뒤로 양다리가 질질 끌려가는 모양이 눈 위로 선명하게 새겨졌다.

“강서준…… 나 안아 줄래? 양말 다 젖어…….”

“그냥 다시 나갈래?”

“나쁜 새끼.”

별채에 다다라서야 뒷덜미를 놓아주자 현진이 먼저 후다닥 안으로 들어갔다. 눈이 묻어 다 젖은 바지를 털어 내고, 양말을 벗어 아무 데나 던져뒀다.

“야옹, 야아옹. 어디 있니?”

다 큰 남자가 내는 고양이 소리에 서준은 이대로 혜수에게 돌아갈까 고민했다. 침대 밑에 숨어 있던 고양이가 어깨를 세운 채 옆으로 걸으며 나타났다.

“어이구, 많이 컸네! 어디 보자.”

경계하는 고양이를 휙 안아 들어 눈, 귀, 항문을 비롯한 몸 전체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고양이는 그게 기분 나빴는지 내려 주자마자 하악거리며 서준의 곁으로 도망쳤다.

“인간 같지 않은 인간한테 애정과 애착심이 생기다니……. 음, 좋은 변화네.”

현진이 흡족한 표정으로 집 안을 둘러봤다. 널찍한 침대와 작은 부엌, 샤워 가능한 화장실, 테이블에 작은 의자 두 개까지 들어 있는데도 깔끔했다. 조금 좁긴 해도 고양이가 쓰는 방석과 집도 자리 잡고 있었다.

“합격. 방 안에서 냄새도 안 나고, 숨을 곳도 많고, 크기도 적당해서 좋네. 상태도 나쁘지 않아. 막 울거나 아무 데나 실례하지 않아?”

“그냥 밥 먹을 때 빼고 종일 잠만 자.”

“새끼 고양이들 수면 시간이 어림잡아 스무 시간이야. 그건 괜찮아. 조만간 중성화해야 하니까 병원 데려와. 날짜 잡으면 알려 줄게.”

“꼭 해야 해?”

“그럼 암컷 데려와서 가족이라도 만들어 줄래?! 네 생활이랑 건강을 위해서라도 해 주는 게 좋아.”

“임시 보호라고 해 놓고 일생의 문제를 왜 나한테 묻는 거야?”

진지하게 고민하던 서준은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지만, 현진은 자연스레 본론을 꺼냈다.

“자, 이제 우리 서준이 얘기 좀 들어 볼까요? 선생님께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설명할 시간이에요. 쓰읍, 어허. 주먹 내려놓으세요. 주먹 휘두르는 순간, 은혜 작가님한테 쫓아가서 너의 그 잔인하고, 상도덕 없는 실상을 낱낱이 일러바치겠어요.”

“말하기 싫어. 그냥 그러려니 해.”

“설마 강서준, 너…… 우리 작가님 납치해 온 건 아니지? 하긴, 그랬으면 이미 팬 커뮤니티에 난리가 났을 텐데. 빨리 말 안 하면 작가님한테 갈 거야.”

현진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동안 서준은 눈으로 욕을 하며 일어났다. 찬장에서 위스키와 잔 두 개를 꺼냈다.

글라스의 반씩이나 술을 채웠고, 그걸 세 번 비우는 동안 그간의 얘기를 끝냈다. 그 와중에 낯가림이 끝난 고양이가 둘의 곁으로 다가와 앉아 잠이 들었다.

“지금 그 얘기를 나보고 믿으라고?”

“믿기 싫으면 그냥 꺼져.”

“너 같으면 믿겠냐? 아프리카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신기했어! 그래, 거기까지 그럴 수 있어. 근데 950만 명이 사는 서울에서 또 마주쳤지. 뭐, 그것도 은하라는 접점이 있었으니 그렇다 쳐. 근데 정우주가 하필 이혜수를 데리고 온 게 여기라고?!”

“곽 소장님은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정 남매를 불쌍히 여기니까. 거기다 내가 호텔이 아니라 굳이 이 집에 오게 된 건, 네 책임도 있어.”

테이블 밑에 앉아 꼬리를 흔드는 고양이를 힐끗 쳐다봤다.

“마, 말이 되는 소릴 해! 네가 집이 여기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핑계 대지 마. 이거 다 우리 순진한 작가님 꼬드기려는 네 계략이지?!”

“차라리 그런 거면…….”

새삼 세컨드까지 자처했던 제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계략이라면 계략일까. 서준은 손안에 든 잔을 둥글게 돌리며 웃기만 했다.

“너 한국인한테 말하다 마는 게 얼마나 큰 죄인지 아냐? 이게 도대체 무슨 난리야. 아니, 스캔들은 도대체 왜 낸 건데?! 공식적으로 인정도 다 했잖아. 그것 때문에 작가님이 악플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데! 봉 잡았다, 어장 관리 하다가 잘되니까 사귄 거다, 임신 얘기에 정우주가 스폰서라는 얘기까지 돌았다고! 작가님은 뭐라는데? 말 안 해?”

“안 해. 그 사태에 책임질 사람은 책임져야겠지.”

술을 들이켜는 그의 눈빛이 벼려졌다. 이혜수는 모두 제 잘못이라고 했다.

다 자기가 가진 게 없는 탓이라고. 정우주는 도와준 것뿐이라고 했지만, 요란한 스캔들은 분명 뭔지 몰라도 무언가를 급하게 가리기 위함이었다.

“그래. 정우주랑 작가님은 그렇다 치자. 그러는 너는 앞으로 어쩔 건데?”

“행복하게 살아야지. 혜수랑.”

평생 상상해 본 적 없던 대답에 현진이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 방방 뛰다가 하악거리는 고양이를 보고 금방 이성을 되찾았다.

“네가 누구라고 얘기는 하고 당당하게 구는 거냐?”

“아직.”

“미친놈, 미친놈, 미친놈! 진즉 알고는 있었지만, 너도 진짜 보통 미친놈은 아니다.”

“안 한다는 거 아니야. 시기가 일러.”

“하아. 장난하냐? 그 시기 이후엔 상처 덜하냐고! 얼마나 충격이 클지 입장 바꿔서 좀 생각해 봐. 아프리카에선 못 알아봤다고 하더라도 한국에 왔을 때 바로 말했어야지. 그게 자신 없었으면 그냥 공기처럼 굴든가!”

“장례식장에서 나랑 마주친 건, 기억 못 하는 것 같더라. 내가 누군지 짐작조차 못 해. 그냥 정우주가 아는 형이라고만 알고 있어.”

“……작가님이 너한테 그 얘기까지 했어?”

“이제 막 마음 정한 참이야. 이 시점에서 혼란스럽게 하고 싶지 않아.”

“옆에 있기로 한 이상 네가 누군지 걸리는 거, 시간문제야. 주변에서 가만둘 것 같아?”

“알아. 상황 정리되면 바로 얘기할 거야.”

“하아. 모르겠다, 난. 난 정말!! 모르겠다.”

이후로도 시끄럽게 잔소리를 하긴 했지만, 술이 약한 현진은 금세 곯아떨어졌다. 자기 집인 것처럼 침대 위에 대자로 뻗어서 코까지 골았다. 밥 한 그릇을 비운 고양이가 그 곁에 다가가더니 발라당 누워 같이 잠들었다.

현진의 말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어느 시기건 이혜수는 제 존재에 상처받게 될 것이다. 최현진은 자꾸 현실을 보게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해진 마음은 통했고,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독이나 다름없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이전에 이혜수의 손을 고치고, 근처에서 나는 구린 일들을 처리하는 게 먼저였다.

찬 공기를 맞으며 눈 위에 나 있던 발자국을 따라 그대로 걸었다. 자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혜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웃으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

저렇게 웃는 걸 보는 게 얼마 만일까. 반갑고, 좋아서 문을 열었다.

“아, 오빠. 내일 다시 연락할게.”

좋았던 기분이 와장창 무너졌다.

#10. 크리스마스와 이른 여름

“우와 세상에! 이거 다 작가님이 하셨어요?”

눈이 내린 다음 날은 예보보다 온화했지만, 거실 분위기는 냉랭했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쇄신시켜 보기 위해 현진이 노력했다.

혜수가 차려 준 식탁은 황송했다. 무와 두부가 들어간 맑은국은 해장에 탁월했다. 어디 그뿐일까. 아침부터 직접 만들었다는 계란말이, 감자와 당근이 들어간 조림, 버섯구이도 하나같이 간이 딱 맞았다.

“으흐! 국물 죽여주네요.”

“라면보다는 이게 나을 것 같아서 했는데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이네요.”

“너무 맛있습니다!”

아무리 밝은 리액션을 취해도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차라리 어젯밤 눈보라 맞았을 때가 더 따뜻할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왜 저기압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작가님, 작가님. 혹시 그거 아세요? 예전에는 이성한테 ‘우리 집에서 라면 먹고 갈래?’라고 했다면 요즘은 어떻게 할까요오?”

“그, 글쎄요.”

“‘우리 집에 고양이 보러 갈래?’라고 한대요.”

“고양이요?”

“네! 고양이 키우는 집이면 까짓것 진짜 보여 주면 되는 거고, 안 키우면 없는 고양이를 만들어 내는 거죠.”

“어떻게요?”

“집에 가서 상대방이 고양이를 찾으면 귓가에 속삭인대요.”

혜수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눈을 끔뻑이자 현진이 킥킥대며 속삭였다.

“야옹.”

이어지는 적막에 농담을 던진 현진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혜수는 도무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단 얼굴을 했고, 맞은편에 앉아 있던 강서준은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작가님은 그렇다 쳐도 강서준은 왜 저 지랄이지?!’

멱살을 잡아 사람을 깨우는 것도 모자라 눈 쌓인 정원에 처박더니 내내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하하!! 작가님, 근데 그림만 그리셔도 바쁘셨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요리도 잘하셔요?”

“대학 때부터 자취하고…… 레지던시(Artist in Residence_예술가에게 입주 공간을 제공하며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사업) 같은 데 들어가도 밥은 직접 해 먹었거든요.”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 식당 하셔도 될 것 같아요. 그치, 강서준?”

어느새 그릇을 싹 비운 강서준이 대답 없이 일어나더니 정원 밖으로 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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