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아무것도 없이 그렇게 하는 것도 능력이긴 하겠네. 그 작은 머리로 생각하느라 열 내지 말고, 그냥 좀 잘생긴 로또를 주웠다고 생각해.”
“……과하다, 정말.”
남자의 자신감에 어처구니가 없어 살짝 웃던 붉은 입술이 달싹거리다 다물렸다.
망설이던 혜수는 서준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 앉아 기댔다. 먼저 거리를 좁혀 온 작은 몸을 한쪽 팔로 끌어안으며 느껴지는 온전함에 서준은 환하게 웃었다.
“잘했어.”
밖은 이제 완전히 깜깜해졌고, 눈도 그쳤다.
“이제 눈 다 내렸나 봐요. 별 보인다.”
유리로 된 천장에 눈이 덜 쌓인 틈으로 정말 별이 보였다. 도심과 멀다고는 하지만 분명 도시임에도 무척 선명했다.
“생각보다 빨리 그쳤네. 아쉽게.”
“눈 싫어한다면서요.”
“싫지. 근데 많이 내리면 이참에 너랑 고립되려고 했지. 콘돔 다 쓸 때까지.”
서준이 마지막 말을 야하게 속삭이며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별이나 봐요.”
단호하게 웃으며 손을 쳐 내자 아쉬운지 어깨에 고개만 비벼 댔다.
“……이러려고 고기 먹인 건 아닌데.”
“마라케시에서 봤던 밤하늘도 예뻤는데, 다시 볼 수 있으려나.”
“당연하지. 살아만 있으면 돼.”
발밑이 언제 깨질지 모르는 빙판 위인 건 사실이었지만, 오랜만에 받아들인 두 사람의 겨울은 더할 나위 없이 따뜻했다.
***
거실로 나온 서준은 마트에서 사 온 어린이용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을 보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진지한 표정으로 뭔가를 그리려고 하더니 나중엔 안 되겠는지 이런저런 색을 섞어서 종이만 마구 채웠다. 자기는 원래 추상화가 취향이라며.
“흐음.”
“그렇게 보지 말고 그냥 욕을 하라니까.”
“하늘보다는 훨씬 나아요. 내가 좀 만져도 돼요?”
“허락받지 마.”
크레파스를 만져 보던 혜수가 스케치북을 받아 들었다. 과하게 뭉친 부분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오일 파스텔처럼 부드러워서 자연스레 색이 섞이며 번졌다. 파란색, 노란색, 흰색, 붉은색, 초록색 따위가 섞이며 물결처럼 변했다.
진한 갈색 크레파스로 가운데에 점 몇 개를 찍고, 쓱쓱 문질렀더니 배 한 척이 완성됐다.
“이 정도면 그리는 게 아니라 마술 부리는 것 같네.”
“배우면 금방…… 아!”
그림 위로 크레파스가 떨어졌다. 손가락이 휘었다. 혜수가 제 오른손을 숨기며 끌어안았다.
“괜찮아?”
“네, 오늘은 좀…… 짧았네요.”
“손.”
잠깐 망설이다가 고통에 멋대로 꿈틀거리는 손을 그에게 건넸다. 서준은 얇은 유리라도 건드리는 것처럼 혜수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꾹꾹 눌러 마사지했다.
“괜찮아요. 많이 안 아파요.”
떨어뜨린 크레파스를 왼손으로 잡아 괜히 만지작거렸다.
“더 그리고 싶어?”
“당연하죠.”
어떤 상황에서든 그림만 나오면 변하는 눈이 좋았다.
서준은 혜수의 머리를 살짝 헝클어뜨리고 일어나 바로 뒤에 앉아 자리를 잡았다. 좀 좁긴 했지만, 품 안에 쏙 들어오는 게 나쁘지 않았다.
“꼭…… 이렇게 붙어 앉아야 해요?”
등 뒤로 닿는 무언가의 감촉에 놀란 혜수가 테이블 쪽으로 몸을 살짝 당겼다.
“야한 거 의식하지 말고, 크레파스 다시 잡아 봐.”
“잘, 안 될 텐데.”
“어디 전시회에 내놓을 것도 아닌데 잘 안 되면 좀 어때. 길게 잡아 봐.”
그리다 만 갈색 크레파스를 길게 그러쥐고, 종이 위에 가져다 대자 서준이 그런 혜수의 오른손을 붙잡아 지탱했다. 그의 뜻을 알아차린 혜수가 천천히 움직였다.
“무슨 손이 이렇게 조그맣지? 숟가락이 너무 무거워서 밥을 안 먹는 건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크레파스를 다른 색으로 바꿔 들었다. 와중에도 큰 손은 계속 혜수의 손을 지지했다. 얼마 그리지도 않았지만, 물 위에 배를 띄운 것 같은 풍경이 완성됐다.
“다 그렸어요.”
어깨에 턱을 올리고 쳐다보더니 그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 낙서가 이렇게 된다고?”
“색의 조합이 좋았어요. 누구랑 같이 그린 거 처음이네요.”
“……아아.”
혜수가 밝게 웃으며 좋아하자 서준은 목 바로 뒤에 코를 박고 마구 비비고, 괴로운 듯 신음했다.
“왜요?”
“안 되겠다. 잠깐 나갔다 올게. 잠들면 안 돼.”
“담배?”
“겸사겸사. 별채에도 다녀올게. 담배…… 가져다줘?”
“아뇨, 괜찮아요.”
“남의 것까지 훔쳐서 태우더니 여기서는 피우는 걸 한 번도 못 봤네.”
마라케시에서 돌아온 이후로 중독됐다시피 태워 댔었는데 이 집에 오고 나서는 한 번도 생각이 안 났다. 통창 앞에 서서 자기를 내려다보는 남자가 금연의 원인이라는 걸, 눈앞에서 새삼 깨달으니 민망해졌다. 시선을 피했다.
“뭐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서준이 나가려다가 다시 돌아왔다.
“왜요.”
“이상한 생각 했지?”
“안 했어요.”
조금 더 괴롭혀 줄까 하다가 그랬다간 대책 없이 일이 커질 것 같았다. 블랭킷을 다시 어깨에 제대로 얹혀 주고, 그냥 몸을 일으켰다.
“금방 갔다 올 테니까 자면 안 돼.”
찬 바람이 달궈진 혜수의 얼굴과 몸에 닿았다가 금방 사라졌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다 쓴 크레파스를 정리하고, 스케치북을 쭉 찢었다. 별거 아닌 것 같은 그림이 왜 이렇게 특별하게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린이용 크레파스는 무슨 보존제를 발라야 하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하나를 밟은 순간, 현관으로 몸이 돌아갔다.
초인종이 울렸다.
이 시간에,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린 상황에서 초인종이 울릴 리 만무했다. 잘못 들었겠지, 하면서도 현관까지 발은 자연스레 움직였다. 혜수가 문 앞에 다다르자마자 누군가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올 사람이 없었다. 거실에서 정원으로 나 있는 문으로 나갔던 서준이 장난이라도 치는 건 아닐까.
“장난치지 말아요.”
쾅, 쾅, 콰앙!!
무거운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괜한 기대는 증발하고, 소름이 돋았다.
“누, 누구세요……?”
이 날씨에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보통 미친 사람이 아닌 게 확실했다. 아니면 혹시 정우주일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다급해졌다. 혜수가 천천히 얼어붙은 문을 밀었다.
한 남자가 내리는 눈을 다 맞기라도 한 건지 온몸이 눈에 뒤덮여 있었다. 안경에 김이 서린 채 바들바들 떨며 서 있었다. 위협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괜찮으세요?”
그는 혜수를 보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이상하게 올라가 있던 손으로 안경을 겨우 벗었다. 제대로 잡지 못해 심지어 눈 위에 떨어졌다. 그제야 보인 얼굴이 낯이 익었다.
“은……혜…… 작가……니임? 어흑…….”
현관 안으로 발을 들이던 그가 철퍼덕 엎어졌다. 옴팡지게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수, 수의사님? 수의사님!!”
“왜 그래?”
혜수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서준이 급하게 현관으로 쫓아왔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쓰러진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혀를 찼다. 그러더니 얼굴을 철썩철썩 소리 나게 때렸다.
“야, 일어나. 죽으려면 나가서 죽어.”
깜짝 놀란 혜수가 만류했다.
“쓰러진 사람한테 뭐 하는 거예요!”
“이혜수, 누군지 알고 문을 함부로 덥석덥석 열어 줘? 위험한 놈이면 어쩔 뻔했어.”
“지금 그게 중요해요? 하기 싫으면 비켜요. 내가 할 테니까.”
혜수가 바닥에 축 늘어진 현진의 어깨를 잡자, 서준이 이를 갈며 그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기고 부축했다. 혜수는 얼른 나가서 떨어뜨린 안경을 챙겼다.
다행히 현진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눈을 끔뻑끔뻑 뜨고, 파르르 떨면서 일어났다. 곁에 있던 혜수가 다가가 따뜻한 차를 건넸다.
“수의사님, 정신이 드세요?”
현진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차를 마시고, 얼어서 붉게 상기된 볼을 두어 번 소리 나게 때렸다.
“꿈 아닌 것 같은데……. 지금 저, 죽어서 환상을 보는 건가요?”
아직도 입이 얼었는지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건 아니에요.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그가 떨리는 손으로 주변을 살피더니 혜수를 보고 고개를 마구 저었다.
“여, 여기 사는 놈 때문에……. 그, 곧 발정이 날 시기인데…… 중성화를…… 해야 하는데…… 전화를 안 받아서…….”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혜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
“그, 그러니까 발정이 나서, 중성화를…….”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혜수는 친절하게 되물었다. 혹시 저체온증 때문에 어딘가 이상해지기라도 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누구를요?”
“여기 사는…….”
“여기 서준 씨랑 저밖에 없는데요?”
“그러니까 강서준이…….”
때마침 돌아온 서준이 그의 뒤통수를 소리 나게 때렸다. 현진의 머리가 앞으로 고꾸라졌고, 들고 있던 차를 흘렸다.
“서준 씨!”
“주어를 똑바로 해.”
혜수가 단호하게 소리 지르자 서준은 시선을 피하고 가져온 수건을 그의 허벅지 위로 던졌다. 현진은 그런 취급이 익숙한지 화도 내지 않았다. 그저 바지에 흘린 차를 닦고, 젖은 제 머리도 닦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