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수학여행으로도 가 본 적 없어서 혜수에겐 제주도가 처음이었다. 옥빛의 바다, 야자수, 집집마다 마당에 감귤이 주렁주렁 걸린 나무와 돌담, 온화한 날씨. 모든 게 낯설고, 좋았다.
은재와 그녀의 부모님은 친가족보다 훨씬 더 따뜻하게 혜수를 대해 줬다.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은 행복한 기억이었다.
여행 마지막 날엔 오후부터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종일 흐리고, 을씨년스러운 날씨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행복한 날이기도 했다.
밤바다를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혜수야, 오늘 마지막 날인데 괜찮았니? 아줌마가 뭐 실수한 거 없어?”
“그런 거 없어요. 너무 즐거웠어요.”
“그럼 또 오자.”
“그래. 앞으로 자주 오자.”
끼어들어야 할 사람이 조용해서 보니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잠든 은재를 보고, 코를 찡그리며 셋이 조용히 웃음을 참았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은 오름에 둘러싸여 있고, 노루 생태 공원이 있을 정도로 깊은 곳이었다.
“자연 친화적이고 조용해서 좋긴 한데 접근성이 별로네.”
“그러게, 다음엔 그냥 시내로 잡아야겠어.”
“아들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놈 새끼, 너무 빨리 독립시켰어.”
“여전히 내가 불편한 걸지도 몰라.”
혜수는 깨어 있었지만, 자는 척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 듣는 ‘아들’ 얘기에 의아했지만, 끼어들거나 아는 척할 문제는 아니었다.
언젠가 우주가 은재의 배다른 오빠에 대해 말한 적이 있긴 했다. 일찌감치 독립해서 친하지도 않고, 가족들을 싫어한다고 했다. 당사자에게 직접 들은 얘기가 아니기에 흘려들었다.
차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썰렁해졌다.
추운 날씨에 여전히 눈은 내리고 있었지만, 분명 적절한 속도였다. 문제가 있다면 깜깜한 도로. 띄엄띄엄 서 있는 주홍빛 가로등은 시야를 밝히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길 한복판에 4.5t 트럭이 도로에 누워 있는 걸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어?”
늦게나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하필 도로가 얼어붙어서 아무런 완충 효과도 주지 못했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작은 경차와 트럭은 벼락이라도 치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충돌했다.
귀가 찢어질 것 같은 큰 소리. 이내 머릿속의 뇌가 흔들리는 것 같았고, 척추가 천천히 후드득 소리를 내며 스프링처럼 튀었다. 골반과 다리가 붕 뜨더니 혜수는 순식간에 세 사람과 멀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도로 옆의 수풀 위였다. 목뒤가 축축하단 생각에 만졌는데 그게 피라는 건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스산한 소리, 몰려오는 추위, 숨 쉬는 게 점점 힘들어졌다.
“혜, 혜수야……. 살려, 살려…… 주세요. 살려, 흐, 주세요.”
은재의 목소리에 굳은 몸을 억지로 움직여 팔꿈치로 기어갔다. 돌과 차량의 파편, 눈이 팔꿈치와 배, 다리에 박혔지만 그런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출혈과 추위에 기절했다 깨어나기를 반복하며 마침내 다다른 현장에 혜수는 땅을 치며 울부짖었다.
“윽, 흐윽…… 흑. 은, 은재야. 은재. 흐윽…….”
트럭에 부딪혀 처참하게 부서지고, 찌그러진 검은색 경차는 뒤집힌 상황이었다. 은재의 부모님 얼굴과 몸은 도저히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게 망가져 있었다.
그때, 벨트를 매고 있던 은재가 거꾸로 매달린 채 손을 뻗었다.
“혜수야…….”
“으, 은재야.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내가…… 가서…… 사, 사람 불러올게.”
말할 때마다 몸 안에서 뭔가가 터지는 것 같았지만, 은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몸을 움직이게 했다.
“아, 가지 마. 가지 마. 혜수야. 그냥…… 그냥 여기 있어. 나, 나 무서워…….”
차마 부모님이 계신 곳을 바라보지 못하는 은재의 시선이 혜수에게 고정됐다. 이를 악문 채 눈물을 참았지만, 뒤집힌 은재의 얼굴 쪽으로 후드득 떨어지는 핏덩어리가 너무 잔인해서 차마 참지 못했다.
엉엉 울었다. 낼 수 있는 최대의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살려 달라고 발악했다. 이름도 모르는 신을 찾았지만, 한겨울 밤중에 거기까지 찾아오는 이는 없었다.
눈도 다 감지 못한 은재의 피에 젖은 손이 축 늘어지는 걸 확인하고, 혜수 역시 눈을 감았다.
다시 의식을 차렸을 때 눈앞에 보이는 건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 있던 윤 회장이었다. 혜수가 깨어난 걸 보고 나서야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흔들리고, 온몸이 깨진 것처럼 아팠지만 안 움직이는 다리를 억지로 끌고 그를 따라 내려갔다.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지만, 가야 할 것 같았다.
온통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들 틈바구니에 치이며 찾아 헤맸다. 넘어질 때마다 아물지 않은 몸에서 피가 새어 나와 흰색 환자복을 적셨다.
“이혜수!”
놀란 우주와 은하가 벌떡 일어나 혜수를 붙잡았지만, 세 사람의 사진이 나란히 놓여 있는 걸 목격했다.
“하……, 아아……. 흐, 윽……. 아…… 아악! 아아아악!”
***
나란히 앉은 이혜수와 강서준은 같은 풍경을 보며, 같은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날, 그 도로에 있던 다섯 명이 나 빼고 다 죽었어요. 어떻게 차에서 튀어나온 건지 아직도 기억 안 나요.”
눈이 소복이 쌓인 정원을 바라보던 혜수가 제 다리를 끌어안으며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응.”
“은재 손이 엄청 예뻤거든요. 가느다랗고, 길고, 상처 하나 없이 매끄럽고 하얘서 자주 손 모델도 해 줬어요. 근데 마지막엔 피범벅이었어요. 벨트를 하고 있었는데도 워낙 세게 부딪혀서…….”
힘든 기억을 상기하며 계속 내뱉는 이혜수와 그만하라고 하지 않는 강서준.
서준은 혜수를 살짝 끌어당겨 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다른 모양으로 남아 있던 가시가 만나 서로에게 같은 상처를 주고 있었다.
10년 전처럼 울고불고하거나 쓰러지지 않았다. 무뎌진 건 아니었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둘을 지탱했다.
“활동하다가 이름 하나가 더 필요한 상황이 생겼는데, 그때 은하 언니가 은재랑 제 이름을 따서 ‘은혜’라고 지었어요.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든 잊지 말고, 은재 몫까지 열심히 그리라고. 은재가 저보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림 포기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붙어 있던 몸이 천천히 떨어졌다.
눈을 마주했다. 처음 만난 그때처럼, 서준은 섣부른 위로나 응원을 건네지 않았다.
그저 그 차가운 눈동자는 온전히 이혜수를, 혜수로 담을 뿐이었다. 그 탓인지 잘 참았던 눈물이 기어코 차올랐다.
“난 겨울이 정말 싫어요. 눈도…… 너무 싫어. 그래서 뒷좌석에 타는 것도 무섭고, 눈이 오면 몸이 떨려요. 죽기 직전까지 그 사람들 몫까지 열심히 살겠다고 했는데, 겨우 이러고 있네요.”
오른쪽 볼에 손을 가져다 대자 혜수는 눈을 꼭 감으며 살포시 기대 왔다. 눈물 한 방울이 그의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술과 울음에 데워진 눈앞의 체온이 무척 소중했다.
“그냥 네 몫만 살아. 그거면 돼.”
혜수가 그의 손을 잡아 제 다리 위에 내리곤 양손으로 꼭 붙들었다. 한 마디 이상 차이 나는 커다란 손을 깍지 껴서 잡았다.
둘 다 한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을 꺼낸 혜수도, 물어본 서준도 머리와 가슴에 남아 있는 슬픔의 잔상들을 지워 냈다.
쏟아지는 거대한 감정을 맨몸으로 맞으며 눈물이 튀어나오지 않게 숨을 골랐다.
혜수가 여전히 조용한 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왜 하필 나예요?”
아직도 잡고 있는 손가락을 문지르며 서준이 되물었다.
“왜 너면 안 되는데?”
“우연히 만나서 하룻밤 잔 것뿐이잖아요. 정우주 때문에 예전에 날 봤다고 해도, 나는 여태껏 서준 씨랑 어디서, 어떻게 만났었는지 기억도 못 해요. 가진 건 없고, 이젠 그림도 못 그려요. 거짓말하면서 비겁하게 정우주 뒤에 숨어서 기만했고, 아까처럼 자격지심 때문에 말도 못되게 할지 몰라요.”
“그래도 좋아.”
그가 잡은 손을 끌어다 부드럽게 입 맞췄다.
“장난치지 말고. 정말 이해가 안 돼서 그래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서준 씨 얘기도 해 줘요.”
“소원은 내가 쓴 거야. 수작 부리지 마, 작가님.”
“치사하네. 그냥 모르는 척 얘기하지.”
“나중에, 천천히. 급하게 했다간 또 나 버리고 갈 것 같아.”
밑으로 처져 있던 입매와 눈가가 기분 좋은 곡선을 그렸다. 혜수의 허벅지까지 내려온 블랭킷을 다시 어깨 위로 덮어 주었다.
“정우주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몰아붙인 건 누구죠?”
“정우주가 안 나갔어도 그랬을 거야. 확신했거든.”
“뭘 확신해요?”
“밥 먹은 것도, 번호 물어본 사람도, 여행지에서 같이 다닌 것도 다 내가 처음이구나. 살벌한 첫 해외여행이 행복했구나. 작정하고 꼬드긴 게 통했구나. 이혜수도…… 날 좋아하는구나.”
제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는 남자를 보고 눈을 찡그렸다.
“사람 놀리는 게 재밌어요?”
“어, 좋아서 미쳐 버릴 것 같아.”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매 순간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져 버렸다. 마라케시에서도, 평창동에서도, 이 집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지금도.
브레이크를 잡을 수 있는 순간은 언제든 있었다.
그럴 수 없어서 결국 여기까지 왔지만, 후회는 없었다.
“이유가 다 무슨 상관이야? 지금 이러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좀 민망해진 혜수가 손을 빼고 다시 제 무릎을 껴안았다.
“잘하다가 또 피하지. 그렇게 쳐다보고, 껴안아 주고, 어? 막 이렇게 손도 잡아 주더니 이제 또 이건 아닌 것 같다면서 선 그으려고? 진짜 그러기만 해.”
“정우주 나간 지 고작 하루 지났어요.”
“하, 진짜 못할 짓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말하네. 그냥 좋다고 인정하면 편할 텐데.”
“나는 누구처럼 그렇게 확신이 쉽고, 빠른 사람이 아니라서.”
“그럼 여태까지 정말 나한테 아무 감정도 없이 섹스만 했어?”
“그건…….”
이리저리 빠져나갈 말을 찾으며 당황하는 얼굴을 보고, 그게 또 귀여워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