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뭐를 위한 사과지?”
“답답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는 사과.”
서준이 다가와 불을 끄고, 혜수의 손에 있던 집게를 빼앗았다. 고기 위에 포일을 잘라 덮고, 꺼내 놓은 당근과 감자를 씻기 시작했다. 껍질을 벗겨 내는 채칼이 그의 손엔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작아 보였다. 한 걸음 물러나 불안한 광경을 지켜보던 혜수가 곁에 다가가 거들었다.
“나도 할게요.”
“그럼 모서리를 둥글게 해서 작게 잘라 줘.”
흙 묻은 것들을 깨끗이 씻어 건네면 혜수가 껍질을 까고 솜씨 좋게 잘라 냈다.
물 흐르는 소리만 한참 적막함을 채우다 이번엔 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면서 감정적으로 굴어서 미안해.”
“……이미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원래 그림 그리는 거 말고는 해 본 게 별로 없어요. 가져 본 것도 없고. 정우주랑 손잡고, 거짓말한 것도 내가 가진 게 없어서 그런 거잖아요.”
관계의 원인을 온전히 제 잘못으로만 돌리는 게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이혜수와 가까워졌다 한들 그 문제에서 강서준은 여전히 완벽한 타인이므로.
“자격지심이 뿌리 깊어서인지 돈이든 호의든 무작정 받는 게 힘들어요. 답답하다고, 등신 같다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잘 안 돼요.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서인지 잘 안 고쳐져요. 기분 나쁘게 해서 미안해요.”
“경험상 미리 겁먹고 사과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널 ‘등신’이라고 말할 사람처럼 보이는 거야?”
“……겁먹어서.”
“귀여우니까 봐준다. 사정하는 게 안 통해서 밥으로 꼬셔 볼까 했더니 이런 식으로 반격하면 어떡해? 꼼짝도 못 하겠네.”
“의도한 건 아니었어요.”
“의도했든 안 했든, 억지로 고치지 마. 내가 맞출게.”
“맞춰 달라는 거 아니에요. 내가 이래요. 자격지심 있어서 가까운 사람일수록 선 긋고, 뾰족하게 굴어요.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괜히…… 이런 데서 나 같은 사람한테 시간 낭비 하지 말고, 가요.”
아무래도 돌아오면 안 되냐는 요한의 간절한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네가 정 꺼지라고 하면 꺼질게. 근데 그게 지금은 아니야.”
어느새 둥글게 손질된 야채들이 그릇 위에 자리를 잡았다. 혜수는 개수대 안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손을 씻으며 눈을 맞춰 왔다.
“……그럼 잘래요?”
시작이 그래서였을까.
이혜수가 섹스로 감정적 갈등을 해소하려는 시도를 할 줄은 몰랐다. 서준이 어금니를 살짝 물었다 떼며 대답했다.
“지금 자면 그냥 세컨드 직위가 연장되는 기분일 것 같아서 싫어. 고기나 먹자.”
제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도 몰랐다.
***
다용도실에 차린 식탁은 꽤 그럴싸했다. 유리로 된 천장 위와 텅 빈 정원으로 굵은 눈이 떨어지는 하얀 풍경. 요한이 칭찬하던 스테이크와 버터에 살짝 익혀 후추와 소금만 뿌린 가니시. 그 옆에 아까 사 온 레드와인까지.
“먹어.”
먹기 좋게 잘라 놓은 고기를 기대 없이 집어 먹었다.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육즙과 함께 부드럽게 녹아 없어졌다. 그 식감과 고소하고, 달큰한 끝맛에 놀란 혜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원래 요리 잘해요?”
“할 줄 아는 거 이것밖에 없어.”
혜수는 처음으로 깨끗하게 접시를 비웠다. 와인까지 빠르게 비워 내는 걸 보면 그것조차도 꽤 마음에 든 눈치였다. 연신 배부르다면서 눈 오는 풍경을 보고, 계속 잔을 비웠다.
“잘 먹으니까 좋은데, 너무 빨리 마시진 마.”
“취해서 달려들까 봐?”
취기가 올라 반쯤 잠긴 눈과 달콤한 웃음에 서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 가요?”
“콘돔 가지러.”
“이미 늦었거든요? 세컨드 연장될 것 같아서 싫다고 할 땐 언제고. 그냥 앉아요.”
“그럼 소원이라도 쓸까?”
어이가 없어서 혜수가 먹던 와인을 뱉어 냈다.
“이상한 거 시키려고 그러는 건 아니죠?”
뜻밖의 말에 소파에 몸을 깊게 기댄 그가 야릇하게 웃었다.
“난 그런 건 생각도 못 했는데…… 정말 대담하다.”
혜수 쪽으로 몸을 돌려 앉은 서준은 눈을 살짝 찡그리고, 텁텁한 욕구가 담긴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실언했어요.”
민망해진 혜수가 손을 휘두르며 주변에 떠오르는 이상야릇한 생각들을 지워 냈다.
“아쉽지만 이런 건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그냥 얘기가 듣고 싶어.”
“무슨 얘기?”
“음, 비밀 얘기가 좋겠다.”
긴 밤을 예견하듯 눈은 그칠 줄 몰랐고, 더 거세게 내렸다. 흩날리기만 하더니 이젠 제법 무게를 두고 쌓였다. 주변은 점점 더 어둡고, 조용해졌다.
“……재미없을 텐데.”
말을 잇지 못하고 망설이는 잠깐 사이, 서준은 재빠르게 빈 그릇을 치우고 거실에 있던 블랭킷을 가져와 혜수의 어깨 위를 덮어 줬다.
그가 이름을 부르고, 듣는 게 자연스러워진 게 언제부터였더라. 다정함을 온전히 받아 내며 손을 잡을 수 있게 된 건 언제였을까.
서준과 함께한 찰나가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악몽 같았던 현실이 이 남자가 나타난 이후로는 꿈결처럼 변해 있었다.
애정과 애증, 욕정 따위를 제게 쏟아붓는 그가 어떤 이름이나, 형태로든 곁에 있는 것만으로 살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세컨드든 뭐든 좋았다.
이 얘기를 누군가에게 하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통증의 원인을 찾기 위해 마지막으로 찾아갔던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혹여 그게 원인이라고 할까 봐. 정말 그렇다면, 사지 멀쩡한 상태로 살아 있는 게 염치없어질 것 같았다.
이 일을 고백하는 첫 상대가 이 사람이라면 좋을 것 같다고. 어렴풋이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었다.
“내 필명, 기억해요?”
“개인적으로 별로야. 좀 촌스러워.”
살짝 웃는 입매가 떨렸다. 잔 안에 있던 와인을 모두 들이켜고, 혜수는 말을 이었다. 깊숙이 잠겨 있던 무언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
‘은재’는 학기 중간에 갑자기 나타난 아이였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무렵. 시기에 흔하지 않은 갑작스러운 전학생의 등장은 모두의 흥미를 끌었다.
예쁘장한 얼굴이었지만, 키가 크고 차가운 인상이라 범접하긴 힘들었다.
애초에 우주와 은하 남매의 친척 동생이라고 소개받긴 했지만, 처음부터 혜수와 친하게 지낸 건 아니었다.
혜수가 먼저 인사를 하거나 말을 걸어도 은재는 남매 뒤에 숨어서 낯가리는 고양이처럼 날을 세웠다. 그건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은재를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성질 나쁜 정우주와 더 성질 나쁘고, 힘까지 센 은하 뒤에 있었으므로.
같이 점심시간에 밥 먹는 것도 꺼리는 바람에 졸지에 혜수가 혼자 다니던 시기도 있었다. 쓸쓸하고, 적막해서 세 사람이 몰려다니는 걸 지켜보고 속상해하기도 했다.
그러다 두 사람의 사이가 가까워진 건, 우연히 미술실에서 은재가 혜수의 그림을 본 이후였다. 고양이처럼 올라간 눈이 반짝거리며 커다래지더니 그제야 한마디를 붙여 왔다.
“너 진짜…… 잘 그리네.”
뜬금없는 말에 집중하던 어린 혜수가 붓을 내려놓고 말했다.
“고마워.”
“너는 진짜 꼭 그림 그려야겠다.”
그 말에 혜수의 얼굴이 그림의 노을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뒤늦게 깨달은 은재의 볼도 빨갛게 상기됐다.
눈과 입이 한 번씩 트이자마자 둘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음식이며, 듣는 음악, 관심사도 무척 비슷했다. 그 와중에 특기는 똑같이 ‘그림’이었지만, 잘하는 건 서로 달라서 부족한 걸 보충해 줬다. 평평하기만 하던 세계가 깊어졌다.
자라 온 환경도 가진 상처도 너무 달랐지만, 나중에 정우주에게 격한 질투를 받을 정도로 친해졌다. 은하가 입학한 대학까지 수시로 나란히 합격했다.
혜수는 이미 그 시기부터 각종 아르바이트에 전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보다 못한 은재가 먼저 여행을 제안했다.
“가족 여행을 같이 가자고?”
단어조차도 낯선 말을 되물었지만, 은재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제주도. 모레 같이 가!”
반짝거리는 눈과 이미 결론 난 것 같은 대답에 당황한 혜수가 눈을 끔뻑거렸다. 여행도 낯선데, 가족 여행이라는 건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은재가 완벽한 타인인 자신을 불러들이는 게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내가 왜?”
“너 대학 가도 과제에 아르바이트만 하느라 그럴 시간 없을 게 뻔하니까. 마침 우리 아빠가 마트에서 제주도 여행권 받았어! 정원 4인!! 같이 가자. 응?”
“아니, 나는…….”
“아, 가자아! 대학 가면 가고 싶어도 못 간다니까? 은하 언니 봐! 맨날 술 아니면 과제에 찌든 괴물이잖아. 여행 같은 거 꿈도 못 꿔. 가자! 응? 응?! 그래 봤자 2박 3일이야. 경비랑 일정 같은 거 아무 신경도 쓰지 말고, 나랑 재밌게 놀 생각만 해.”
사랑만 받으며 자란 아이라고, 은재와 같은 나이면서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이따금 부럽기도 하고, 유복한 생활에 질투가 날 때도 있었다.
“정우주도 있잖아.”
“그놈이랑 가면 피곤해. 엄마, 아빠도 바로 네 이름 꺼냈어. 다른 후보 없었어. 제발! 평생소원이야!”
손을 붙잡고 흔들며 늘어졌다. 질투 같은 건 금방 잊을 정도로 늘 따뜻하고, 밝고, 아이처럼 순수한 은재가 좋았다. 평생소원이라는 말에 괜스레 기특하고 마음이 쓰여서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 당일, 은재의 부모님은 혜수를 직접 데리러 오기까지 했다.
“안녕하세요.”
창문만 열어도 충분한데 굳이 세 가족이 다 우르르 내려서 혜수를 반겼다.
“우리 혜수!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어쩜 이렇게 예쁘고, 귀엽게 생겼지? 여보, 그냥 이참에 혜수 우리 집으로 데려가자. 응?”
“영주야, 진정해. 그건 납치잖아.”
“찬성! 이혜수랑 자매 하고 싶어!!”
은재와 그녀의 어머니가 혜수를 붙잡고 눈을 반짝이자 옆에 있던 형도가 두 사람을 차 안으로 차례차례 밀어 넣었다.
셋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자주 웃는 사람들이었다. 다정하고 따뜻한 분위기에 어쩐지 우울감이 몰려왔지만, 티 내지 않았다. 그 내용을 알지도 못하면서 애써 따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