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접점-53화 (53/76)

[53화]

혜수는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식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식욕이 하나도 없었는데, 싱싱한 재료를 보고 있자니 사고 싶어졌다. 거의 외부 음식만 먹는 서준이 신경 쓰이기도 했다.

“두부 두고 오라고 했더니 어디까지 간 거야.”

결국 사고 싶은 재료 몇 가지를 안아 들고 사라진 그를 찾아 나섰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장난감과 책, 문구용품에 둘러싸인, 누가 봐도 어린이를 위한 노란 공간에 서서 뭔가를 보고 한참 고민하고 있었다. 참 이질적인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서 살 거라도 있어요?”

“이거 살까?”

손에 묻지 않고, 인체에 무해하다는 어린이용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이 묶여 나온 상품이었다. 엉뚱함에 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번엔 덥석 집어 오지 않고 허락을 구한다는 게 더 웃겼다. 귀엽다고 해야 할지.

“마음대로 해요.”

가지고 온 재료들을 카트에 담고 끌려는데 그가 얼른 다가와 스케치북을 던져 넣더니 대신 잡았다.

“책임지고 알려 줘야 해.”

“혹시 그림 배우고 싶어요? 그런 거면 스튜디오에 연락해 둘게요.”

“너한테 배우고 싶은 거야.”

저 남자가 선수라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혜수의 후드를 머리 위로 살짝 씌우더니 앞서 나갔다. 말 하나, 행동 하나에 처음 이성을 대하는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니, 여태 누구를 대할 때도 이렇게 떨린 적은 없었다. 그냥 미칠 것 같았다.

“혜수야, 라면도 먹어?”

“먹어요.”

“치킨은? 어떤 부위가 좋아?”

“순살 프라이드. 뼈 있는 건, 좀 그래요. 아니, 그렇다고 닭까지 사진 말아요!”

“그럼 치킨은 가게에서 가져다줄게. 생선은 뭐가 좋아?”

“오늘 내 취향 조사하러 나왔어요?”

“겸사겸사. 앞으로 같이 살면서 밥 먹으려면 이 정도는 알아야지.”

같이 살겠다고 아직 대답하지 않았는데 아주 제멋대로였다.

좀 슬프기까지 했던 고백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취하고, 대답 없이 미뤘다는 게 비겁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자기 하나만 보고 한국에 왔다는 게 믿기 힘들 정도로 기뻤지만, 그렇다고 마냥 좋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행복을 순순히 받아들이기엔 이혜수의 불행은 지나치게 길었다.

“고객님, 와인 보고 가세요! 크리스마스 기간 마지막 세일 하고 있습니다!”

무거운 얼굴로 고민하는 혜수의 손목을 서준이 잡아끌었다.

“술 사려고요?”

“우리 집에 위스키를 병째 들고 마시는 사람이 있어서 아무리 사 둬도 부족할걸. 좋아하는 거 골라.”

다정하게 구는 틈새로 이렇게 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혜수가 주먹으로 등을 툭툭 때리자 엄살을 피우며 아픈 척했다.

“잘 몰라요. 그냥 지난번에 마셨던 거…… 이거죠?”

“데나로는 별로야. 다른 거 사자.”

기나긴 쇼핑을 마친 둘이 마트 주차장에서 나오자 성질 급한 하늘은 벌써 굵은 눈을 뿌리고 있었다. 흩날리는 정도였는데 하늘이 심상치 않게 까맣게 변해 있었다.

“내가 이겼네.”

야릇하게 웃는 옆모습에 자포자기한 혜수가 작게 한숨을 쉬며 일찌감치 백기를 들었다.

“소원이 뭔데요?”

***

외출했다가 돌아온 두 사람은 짐을 다 정리할 때까지 연신 티격태격했다. 계좌 번호를 알려 주네, 마네로 싸우다가 나중엔 영수증을 보며 그런 계산법은 듣도 보도 못했다고 소리쳤다.

참다못한 혜수가 오만 원짜리 세 장을 들고 내려와 그의 바지 뒷주머니에 꽂았다.

“너 정말 사람 치사하게 만들 거야?”

난생처음 보는 행동과 주머니에 기어코 꽂힌 돈의 액수를 보고 서준은 혀를 둘렀다.

“같이 샀고, 같이 쓸 거니까 적당히 나눠서 내겠다는 게 뭐가 그렇게 이상하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돈 자랑이라도 하고 싶어요?”

이혜수가 이 집에서 보여 줬던 나약하고, 순순한 모습들은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에서 나왔던 태도였다. 그게 끝난 이상 더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서준은 이혜수다움과 솔직함이 훨씬 좋긴 했다. 까다롭긴 했지만.

“진짜 웬만해선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출퇴근만 안 할 뿐이지 여유 많은 사람이거든?”

“네에. ‘여유 많은 사람’이라 참 좋으시겠어요.”

“비약하지 마. 좋아하는 사람한테 이런 돈까지 계산해서 받는 새끼가 어디 있느냐고.”

이럴 땐 어쩔 수 없이 감정으로 호소하는 게 통할 거라고 확신하고 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혜수는 얼굴을 찡그렸다.

“……오글거려.”

완벽한 오답 선언에 얼이 빠졌다.

재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충격이 컸다. 남겨진 그는 혼자 미친놈처럼 웃었다.

지난번엔 먹힌다고 생각했던 방법이 다시 막힌 걸 보면 이혜수가 꽤 기분파인 것 같기도 했다.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는데 혜수가 꽂아 둔 현금이 같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생각해 보면 마라케시의 택시에서도 현금을 던져두고 간 여자였다.

어이없고, 불안하며 복잡했다. 참 어려운 여자였다.

그런 와중에도 뭘 먹여야 할까 고민하는 제 자신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냉장고에 넣어 뒀던 재료들을 살피다가 스테이크용 고기를 꺼내 올리브오일, 소금과 후추를 뿌려 마리네이드 했다. 다른 요리는 못하지만, 이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일회용 장갑을 끼고, 살코기를 문지르려는데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울렸다. 익숙한 발신 번호에 눈썹 한쪽을 찌푸렸다. 끊어지길 기다릴까 하다가 스피커폰으로 받고, 고기 위에 손을 올렸다.

“지금 뉴욕은 새벽 2시 아닌가?”

― 흐으……. 벌써 그렇게 된 줄은 몰랐네요. 요 며칠 해를 못 보고 지하에만 박혀 있어서 시간 개념이 없어요.

“이 번호로 전화한 건 처음인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어?”

― 그건 제가 해야 할 질문이죠. 뭐 해요?

“뭘 좀 낚아 보려는데 잘 안 돼서 실패 원인과 후회를 담아서 미끼 만드는 중.”

― 한가하네요.

“이래 봬도 한가하려고 필사적이야.”

― 하, 그게 문제가 아니고……. 준, 요즘 이쪽 뉴스 안 보죠?

“관심 없어서. 아, 젊은 층 타깃으로 블랜딩 한 12년산. 반응이 나쁘지 않다고 전해 줘. 술 못 마시는 사람이 꼴깍꼴깍 삼킬 정도로 목 넘김이 좋은 것 같더라. 제레마이가 꽤 공들였잖아.”

―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여력이 있나 모르겠네요. 직접 마셔 봤어요?

요한의 질문에 작은 입안에서 휘휘 내둘러 만졌던 혀의 감촉과 그 끝에 닿았던 맛이 잠깐 떠올랐다.

“그냥 조금.”

― 웃었죠?

“CCTV라도 달아 뒀나.”

― 뭔가 기분 나쁘게 소름 돋았거든요. 아무튼, 미끼 다 만들고 여유 생기면 이쪽도 좀 들여다봐 줘요. 준이 가고, 엘리스도 그렇게 되는 바람에 제레마이 쪽으로 일이 몰렸어요.

“성공이 여유라고 착각했겠지. 그러게 적당히 먹고살 만한 게 가장 좋은 거라고 누누이 충고했건만.”

― 그게…… 하아. 차라리 그냥 그런 거면 다행이죠.

“왜?”

― 스캔들이 터졌어요.

“하루 이틀이야?”

― 그게 아니라, 하아. 제레마이 얼굴이 나온 섹스 동영상이 누출됐거든요.

서준이 들고 있던 고기를 뒤집으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동영상이라……. 재밌네.”

― 네, 나도 한국에 있었으면 웃었겠죠. 여기는 진짜 난리가 났다고요! 쫙 빼입은 이탈리아인들이 지하 사무실까지 쫓아와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요?! 악플들 신고하고, 지우면서 밤샘 작업 중이었는데 머리에 총부터 들이댔어요. 그때만 떠올리면 진짜…… 으윽! 직설적인 폭력 앞에서 펜이며 키보드가 다 무슨 소용인가 했다니까요!

“아직 제레마이가 살아 있는 게 용하네.”

― 바닥까지 내려갔던 주가가 치솟는 바람에 받은 생명 연장이죠. 하아. 학위가 다 무슨 소용이람. 어차피 세습된 부자들 구두나 핥아 주면서 감정 쓰레기통밖에 더 하냐고요.

“그 정도면 너도 이제 빠져나올 수도 없겠다. 걔가 연봉으로 의리는 지키니까 힘내.”

김이 날 정도로 달군 팬 위에 버터를 두르고 말캉말캉한 고기를 집어 올렸다.

치이익.

뜨거운 열기에 지방과 살이 순식간에 익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다진 마늘과 로즈메리를 올리고, 불의 세기를 올렸다.

― 스테이크? 소리 좋네요. 다른 건 몰라도 준이 해 준 스테이크는 맛있었는데……. 준, 다시 돌아오면 안 돼요?

“안 돼.”

― 잔인하네요. 보스는 따로 연락 안 해요?

조용하던 혜수가 어느새 내려와 부엌에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서준이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 새끼 러브 레터로 수신 차단함이 꽉 차. 아무튼, 요한. 미끼가 통한 것 같으니 끊자.”

― 행운을 빌어요.

가까이 다가온 혜수가 전화가 끊기자마자 휴대폰과 서준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혹시 사냥감이 나예요?”

“들었어?”

“그냥 조금이요. 너무 빨라서 뭐라고 하는지 정확하겐 못 들었어요.”

“나 손 좀 씻을게. 온 김에 이것 좀 뒤집어 줘.”

뒤집힌 고기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겉이 까맸지만, 속은 아직 붉고 야들야들했다.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날 때까지 손을 씻는 그를 힐끔 쳐다보다 혜수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손의 물기를 털어 내며 듣는 사과가 달갑지만은 않았다.

기억하기로는 오늘은 각자의 의견이 달랐을 뿐이었다. 사과받을 만한 일은 없었다. 2층으로 올라갔던 그 잠깐 사이, 이 여자는 또 무슨 자기 비하의 시간을 갖고 내려온 걸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