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
코끝에 닿은 서준의 손이 매끄러운 볼을 타고 부드럽게 상승했다. 미간, 이마를 둥글리며 올라갔다가 다시 턱끝까지 내려왔다. 인중과 입술을 가볍게 문지르더니 눈뜰 때까지 차마 못 기다리겠다는 듯 입을 맞춰 왔다.
쪽, 쪽, 쪽.
얼굴 여기저기 떨어지는 감촉과 소리에 혜수가 인상을 쓰며 눈을 떴다.
“으음…….”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할 때마다 움직이는 긴 속눈썹을 매만졌다. 혜수는 다시 눈을 꾹 감고, 널따란 품에 파고들었다. 아직 잠도 덜 깬 무의식 상태에서 자기를 끌어안는 모습에 꽤 기분이 좋아졌다.
서준은 몸 아래로 팔을 집어넣고, 힘주어 혜수를 꼭 끌어안았다.
틈 없이 밀착된 체온과 상쾌한 풀 냄새가 섞인 체취에 퍼뜩 정신을 차린 혜수가 눈을 번쩍 떴다. 윽, 소리를 내며 단단한 가슴을 밀어 냈다.
“뭐 하는…… 거예요?”
잠긴 목소리를 듣고 큭큭 웃으며 동그란 이마에 도장을 찍듯 다시 입 맞췄다. 필사적으로 밀어내도 이길 수가 없었다.
“혼자 자는 게 무서울까 봐 걱정했는데, 잘 자는 것 같아 다행이네.”
“……할 말이 있으면 불러서 깨우면 되잖아요. 자는 사람한테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자고 일어난 민얼굴을 보이는 게 민망해서 괜히 말이 모나게 나왔다.
“응, 다음부턴 그럴게.”
말 안 듣는 것도, 할 말 없게 만드는 것도 정말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간신히 빠져나온 혜수가 일어나 앉아 천천히 목을 돌렸다. 온몸이 아픈 것 같았다. 그에 반해 옆에 누워 있던 멀끔한 얼굴엔 그 어느 때보다 생기가 돌고 있었다.
방금 씻고 왔는지 아직 살짝 젖은 머리가 차분했다. 조용한 미소가 뜬 얼굴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얄밉고, 잘생겼다.
“오후부터 눈 내릴 거야. 필요한 거 사러 갈 건데, 혹시 뭐 없어? 먹고 싶은 거라도.”
능숙하게 말을 돌리는 것도 짜증 나게 얄미웠다. 마음 같아선 정말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딱히 없어요. 다녀와요.”
“싫어, 같이 가. 밑에서 기다릴 테니까 준비하고 내려와.”
“애초에 그럴 거면 왜 물어봤어요? 싫다니까.”
단호한 거절에 서준은 속 쌍꺼풀이 진 왼쪽 눈을 찌푸리더니 이내 혜수의 팔꿈치와 팔을 만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얼굴을 만진 것처럼 찬찬히 훑어 올리며 야한 표정으로 주물주물했다.
“그럼…… 같이 씻을까?”
한껏 끈적해진 눈빛과 목소리에 혜수가 단번에 침대 밑으로 발을 내렸다.
“내려가서 기다려요.”
“둘만 있는 첫날인데 아쉽네.”
아직 우주를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따끔거리는데, 그는 방해꾼이 사라져서 후련하다는 말투였다.
“어젠 정신이 없어서 못 물어봤는데, 우주…… 어떻게 할 거예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내가 선택할 문제는 아니잖아요.”
“맞아. 그냥 물어봤어.”
피식거리며 얄밉게 말하는 얼굴에 기어코 베개를 집어 던지고 말았다. 제법 큰 소리가 났는데 그는 즐겁다는 듯 키득대기만 했다.
“네가 뭐라고 하든 난 정우주가 죗값 받게 할 거야. 다만 타이밍의 문제지. 일단 지금은…… 빨리 씻어. 배고파.”
***
혜수의 침대에서 냄새를 맡던 서준은 묵직해지는 하반신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다행히 때마침 1층에 두고 온 휴대폰 소리에 정신을 차리곤 일어났다.
― 서류 봤어?
“거의 다.”
― 벌써? 근데 그거 보면서 느낀 건데…… 본다고 뭘 알겠냐? 난 아무리 봐도 모르겠던데.
“가맹점주들 상대로 조사해 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 네 말대로 뭔가 있는 건 분명한데, 본사 눈치 보느라 소극적인 경우가 많은 것 같아. 제이 윤 식당들이 장사가 안 되진 않으니까. 잘 버는 곳은 진짜 어마어마하더라. 강서준, 근데 난 진짜 모르겠다. 본래 프랜차이즈 사업이란 게 적당히 먹고살 수 있게 해 준다만 부자는 절대 못 되는 거 아니냐?
“부업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본업은 괜찮은 거야? 듣자 하니 동물 병원에 손님이라곤 파리밖에 없다던데.”
씩씩거리던 현진은 환자가 왔다며 전화를 끊었다.
서준은 테이블 아래에 정우주가 두고 간 게 분명한 잡지를 들었다. 그 안엔 제이 윤 회장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50년 동안 이어진 전통의 비결은 늘 ‘진심’과 ‘사람’이다’라는 제목 아래엔 팔짱을 끼고, 웃는 윤진영의 사진과 ‘제이 윤’ 기업의 이력과 성공 내역이 적혀 있었다. 그 배경엔 이혜수의 커다란 추상화가 있었다.
10년 연속 브랜드 대상 수상은 물론, 프랜차이즈 개발원에서도 1위로 인정받는 기염을 토했다는 내용과 업체마다 전문적인 운영진을 필두로 세련된 방식으로 기업을 운영한다는 칭찬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제이 윤은 최초의 한식당 이외에도 중식, 양식 심지어 쌀국수 전문점에 치킨과 디저트까지 그 영역을 넓혀 가고 있었다.
다양한 사업을 공격적으로 추진하지만, 가맹점마다 손쉬운 작업 및 판매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 점주들의 만족감이 높은 것으로 호평이 나 있는 곳이었다.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현진의 이름으로 다섯 개의 가맹점들을 계약하고 알아본 결과,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지경이었다. 왜 여태까지 터지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여러 문제들이 그의 눈엔 대번에 보였다.
서준은 비웃으며 윤 회장의 얼굴을 구겼다.
“오래 기다렸어요?”
“별로.”
혜수가 계단 아래로 내려오자 그는 잡지를 덮어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최초의 시작은 개인적인 원한이나 다름없었지만, 이젠 그 목표가 눈앞의 이 여자로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무성의한 대답과는 달리 시선은 한참 위아래를 훑었다. 두꺼운 남색 후드 티와 어두운 청바지. 지극히 평범한 차림이었는데, 뭔가 이상한가 싶어서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이상해요? 뭐…… 묻었어요?”
“귀여워서.”
긴 다리를 뽐내듯 소파를 건너온 그가 불쑥 몸을 붙여 오더니 후드 티의 목 부분을 살짝 잡아당겨 그 안을 훔쳐봤다.
“뭐 해요!”
깜짝 놀란 혜수는 옷을 그러잡고 뒤로 물러났다.
“너무 얇게 입은 거 아닌가 싶어서.”
“그냥 물어봐도 충분하거든요? 좀 평범하게 해요.”
“알았어, 알았어. 다음부턴 그럴게. 가자.”
어깨동무하듯 혜수를 품에 끌어안더니 순식간에 현관까지 끌고 나갔다. 신발장에서 흰색 운동화를 알아서 꺼내 주고, 그것도 모자라 바닥에 주저앉아 거의 풀린 끈을 새로 매 주기까지 했다.
작정한 것 같은 다정함에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두근거렸다.
“내가 해도 돼요.”
“누가 그걸 모르겠어? 해 주고 싶으니까 그러지.”
해 주고 싶은 행동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대문을 열어 주고, 차의 조수석 문까지 열어 줬다. 손도 못 쓰게 만들었다. 미리 시동을 켜 둔 차 안에서 후끈한 공기가 쑥 빠져나왔다.
자리에 앉아 벨트를 매면서 살짝 본 뒷좌석이 지난날의 정사를 떠올리게 했다. 로션과 선크림만 바른 허연 얼굴이 다시 빨개졌다.
“더워?”
차에 오른 그가 혜수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며 물었다.
“괜찮으니까, 빨리 가기나 해요.”
투드득.
그가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리며 웃었다.
왜 저렇게 실실거리는지 묻고 싶었지만, 괜히 제 민망하고 추악한 생각을 들킬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 내리고 쌓이면 사나흘 정도는 못 움직일 수도 있어. 우리 집까진 제설차가 안 올라오는 경우도 있어서 겨울에 필요한 게 있으면 미리 사 두는 게 좋아.”
“아까 잠깐 뉴스 봤을 땐 눈 소식 없었는데…….”
“내기할까?”
“무슨 내기요?”
“뉴스랑 나, 둘 중에 누가 맞을지 내기하자. 눈 내리면 네가 내 소원 들어주고, 안 내리면 내가 들어줄게.”
“……좋아요.”
“약속했어.”
자신만만한 태도에 뒤늦게 후회가 들었지만, 하늘도 파랗고 햇볕도 따뜻해서 도저히 눈이 올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물론 강서준은 기상청조차 몰랐던 눈 소식을 예고했던 전적이 있긴 하지만, 져 봤자 얼마나 대단한 걸 시킬까 싶어서 무르지 않았다.
20분쯤 지나 도착한 커다란 대형 마트엔 생각한 것보다 사람이 많았다.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내일이 벌써 크리스마스라는 사실을 둘 다 잊고 있었다.
카트를 끌고, 나란히 서서 걷는 게 어색했다. 가슴안이 간질간질해서 그 부근을 자꾸 문질렀다. 반면 서준은 큰 고민 없이 보이는 걸 대충 카트에 담았다. 순식간에 카트 안이 가득해졌다.
뭘 사든 간섭하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으려고 했지만, 당근이 열 개나 들어 있는 봉투를 집어넣는 걸 봤을 땐 막을 수밖에 없었다.
“뭘 이렇게 많이 사요?”
“많은가?”
“자주 먹는 것도 아닌데 금방 상해요. 저기 두 개씩 담긴 것도 있잖아요. 세상에, 이건 또 언제 넣었어요?”
1+1로 묶인 두부 여섯 모를 들어 올리며 혜수가 얼굴을 구겼다.
“찌개에도 넣고, 구워 먹기도 하면 얼마 안 될 것 같은데. 두부 싫어해?”
“싫어하고, 좋아하고를 떠나서……. 왜 자꾸 웃어요?”
“좋아서.”
어이가 없어서 혜수도 결국 따라 웃고 말았다.
“하나만 남겨 놓고, 두고 와요. 그만 웃고, 빨리요.”
똑똑한 남자가 아무래도 이런 쪽으로는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웃음을 흘리며 카트를 끌고 가는 남자를 옆에 있던 여자들이 힐끔거렸다. 혜수는 혹시 누가 자기를 알아보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괜한 기우였다. 사람들은 온통 평범한 생태계에 나타난 새로운 종을 보는 것처럼 강서준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