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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접점-51화 (51/76)

[51화]

잡힌 채로 움직이지 않는 혜수를 그대로 두고, 정우주는 방에서 짐을 챙겨 나왔다.

“혜수야.”

“…….”

“형 너무 좋아하지 마.”

우주는 알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사라졌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의 새벽, 눈이라도 내릴 것처럼 온화한 공기가 약간 습한 밤이었다.

정우주가 서준과 자신의 관계를 알아차렸다는 생각에 충격받은 건, 한참 후였다.

우주가 지내던 빈방에 들어가 조금 울던 혜수는 세수했다.

따뜻한 과거로 동정할 수 있는 선을 지나 버렸다. 더는 무리였다.

젖은 얼굴을 닦아 내고, 밖으로 걸음을 옮겨 정원으로 나갔다. 서준은 예상대로 아직 거기 있었다. 담배를 태우며 의자에 앉아서 멍한 표정을 하고 있는 그 역시 조금 지쳐 보였다.

혜수는 조심스레 곁으로 다가갔다.

“올라가서 쉬지.”

“꼭 그렇게……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어요?”

재떨이엔 그가 태운 담배가 탑을 이뤘다. 서준은 대답 대신 자기가 입고 있던 두꺼운 재킷을 벗어 빈 의자 위에 올리고 말했다.

“와서 앉아.”

“안 추워요.”

“싫으면 다리 위에 앉을래?”

정말 한 번을 지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짜증이 난 혜수는 일부러 옷을 마구 구겨서 푹신하게 만들고 그 위로 앉아 버렸다.

“정우주 나갔어요.”

“잘됐네.”

“원래 저렇게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어요. 차라리 나한테 미리 언급 좀 해 줬으면 내가…….”

“심각하지 않았다는 거, 확실해?”

혜수는 섣불리 확신하지 못했다. 이 집에 오고 난 이후로 제 일이나 서준에 대해서만 집중했다. 정우주에 대해 관심조차 없었다.

불안한 시선을 읽은 그가 한숨을 쉬며 마른 얼굴을 문질렀다. 그렇게 당해 놓고도 정우주를 가엽게 여기는 여린 부분이 이혜수의 어딘가 남아 있었다.

“네가 죄책감 가질 일 아니야. 중독과 금단이 반복되면 저 새끼처럼 극단적으로 환각을 보거나 폭력적으로 변하고, 발작을 일으키기도 해.”

“그렇다고 그렇게 사람을 때리면 해결돼요?”

서준의 행동이 일방적인 폭력이었다는 건 자기 자신조차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잠깐 고민하던 그가 처음으로 제 얘기를 꺼냈다.

“예전에…… 춥고, 눈 오는 게 너무 싫어서 캘리포니아에서 지냈어. 그때 도와준 친한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시날로아 밑에서 일하는 알코올 중독자였어.”

“시날로아?”

“마약 범죄 조직. 지금은 몰라도 그땐 단속하는 정부 지원이 뚝 끊긴 때라 멕시코산 마약이 판을 치고 있었거든. 일반인이 돈 벌기 가장 좋은 일이 운반책이었고, 그 친구도 그중 하나였어. 자긴 절대 중독되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 술에 허덕이는 미친놈이었지. 그놈이 딱 그랬어.”

“……그래서요?”

“죽었어. 만취해서 환각을 보고 아내를 총으로 쏴서 죽였어. 그런 이후에 자살. 사흘이나 지나서 발견됐는데 곁에는 네 살짜리 아들도 있었어. 그 친구가 아니었다면 나도 몰랐겠지.”

예사로운 말투였지만, 이 남자가 처음으로 제대로 해 주는 자기 얘기가 이토록 끔찍하다는 게 매우 슬펐다.

어떤 위로도 할 수 없어서 흐린 밤하늘을 응시하는 그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오늘 너를 보고……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알기나 해? 어떻게 그래? 어떻게 도와 달라는 말 한마디를 안 해.”

덤덤한 문장에서 분노, 섭섭함과 걱정, 애정 따위가 묻어났다. 막연하다 싶을 정도로 깊은 시선에 혜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생각하는 그런 일, 없었어요.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평소엔 그렇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내가 화나게 하는 바람에…… 그래서…….”

“정우주가 그러다 뒈지든 말든, 관심 없어. 근데 넌 아니야.”

지랄맞기는 해도 심신이 유약한 우주가 그런 일을 벌일 가능성이 있을까.

가끔씩 보이는 가학적인 행위가 언젠가 자기한테도 닿았을까.

확률을 가늠하는데 ‘기생충’이라는 단어가 눈앞에 휙 튀어 올랐다. 우주에게 맞았던 부위가 욱신거렸다. 이혜수를 향한 정우주의 폭력은 그의 환상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이뤄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서준이 대뜸 손을 잡으며 불쾌한 잡념을 차단했다.

“왜 하필 저딴 새끼랑 엮인 거야. 앞으로 너한테 따라붙을 수식어나 다른 사람들 시선이나 소문, 생각했을 거 아니야. 협박이라도 당했어?”

이미 헛소문에 손가락질까지 받았고, 욕도 많이 먹었다. 혜수는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서준 씨, 당장 먹고 잘 곳 없었던 적 있어요?”

“없어.”

“우리가 서울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난 그런 상태였어요. 마침 우주도 스캔들이 필요한 상황이니까 도와 달라고 했어요. 우습겠지만…… 그래요. 우주도 저 도와주려고 노력했어요. 술이 문제였지.”

윤 회장의 제안이라는 사실과 ‘스캔들이 필요한 상황’의 이유는 쏙 빼놓고 이야기했다. 답답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 죽으려고 한 기억은 누군가 죽은 기억보다 더 선명하고 충격적이었다.

혜수에게 정우주는 끝이라고 했을지언정 도저히 떼어 낼 수 없는 종기 같은 존재였다. 진즉 떼어 냈어야 했는데 떼어 내지 못한, 악취 섞인 그런 관계.

일이 왜 그렇게 흘러갔는지 사실대로 말할까 고민했지만, 스스로 팔목을 베어 피까지 뿜을 정도로 아픈 상처를 남에게 내보이는 일을 타인에게 알리는 건 제삼자의 역할이 아니었다.

이혜수의 도덕적 정조이기는 하나 결국 정우주의 간접적인 폭력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결과이기도 했다.

“……비난할 생각 없어. 각자 사정이라는 게 있었겠지.”

속이고, 기만했음에도 그의 태도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시원했다. 스캔들의 이유를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미안해요.”

“됐으니까 그만해. 중요한 건, 너희 둘이 아무 사이 아니라는 거고, 이제 정우주 핑계로 네가 날 밀어내는 건 못 한다는 거지.”

“……그게 끝이에요?”

“그럼 뭘 더 할까?”

“화 안 나요?”

“화나지.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네 곁에 있었는지 다 알면서 속였으니까.”

“정말…… 미안해요.”

“그만해. 넌 들킨 시점에서 미안하다고 백 번 정도 말했어. 정우주한테 끝까지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고, 정우주를 감싸는 걸 보면 그게 뭔지 몰라도 그 새끼한테 문제가 있다는 거지.”

정말 귀신같은 사람이었다.

“제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문제예요.”

“그래. 애초에 순순히 말해 줄 거라고 기대도 안 했어.”

아무 말 않는 혜수를 대신해 서준이 말을 이었다. 그가 몸을 기울여 혜수에게 기대며 서글프게 웃었다.

“아니면 욕이라도 한번 시원하게 해 줄까? 그래야 미안한 마음이 좀 덜하려나.”

“서준 씨.”

“나한테 죄의식 가질 필요 없어. 대신 나중에…… 너도 나 한 번 용서해 줘. 그거면 돼.”

뜻을 알 수 없는 말에 혜수가 눈을 찌푸렸다.

“어떤 잘못을 할 예정인데요?”

“미리 겁먹진 마. 근데 하나는 확실히 알았어. 너나 정우주나 연기에 재능 없어.”

강서준은 또 능란하게 말을 숨겼다.

“우주랑 내 관계는…… 언제부터 알았어요?”

“그것도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사귄다는 사이에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몸짓. 연인이라기엔 늘 먼 사이를 유지한 채, 눈 한번 제대로 마주치지도 않았다.

정우주의 성정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철저한 공간 분리와 언행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가장 결정적인 건, 자신을 밀어내지 않은 이혜수였다.

애인을 두고서 다른 남자와 그런 짓을 벌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열린 문틈 사이로 정우주가 한 말과 행동을 보고, 듣지 못했더라도 이미 모든 걸 눈치채고 있었던 강서준은 조만간 이 모든 상황을 깨부술 생각이었다.

뻔뻔하게 구는 정우주와 제대로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 참는 혜수 때문에 열받아서 그 시기가 당겨졌을 뿐이었다.

“다 알면서…….”

“그래, 다 알면서도 기다렸어.”

인내심을 갖고 이혜수가 먼저 말해 주길 기다렸다. 끼어들 타이밍을 정하지 못해 방관했던 아침을 생각하면 다시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혜수가 조금만 더 늦게 뛰쳐나왔다면 정말 정우주를 죽여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따지려던 혜수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중간에 우주와의 관계를 떠보듯 했던 남자의 말과 행동이 퍽 능글맞았다고, 뒤늦게 깨달았지만 비난할 수 없었다.

“……당장은 무리겠지만, 집 빨리 알아볼게요.”

반대로 튀어 버리는 결말에 서준은 담배 끼운 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하아, 이 여자가 또 버리고 가려 하네.”

“그럼 여기서 둘이 오순도순 살기라도 해요? 어차피 서준 씨도 돌아갈 거라고 했잖아요.”

서준은 어깨 위로 팔을 두르더니 반대로 돌아가 있던 혜수의 얼굴을 제 쪽으로 돌렸다.

“안 간다고 하면 이번엔 확실하게 붙잡혀 줄래?”

“도대체 사람이 뭐가 그렇게 쉬워요?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에요?”

“몰랐어? 나 엄청 쉬워. 들어올 때도 어차피 너 하나만 보고 들어왔어.”

흔들림이라고는 없는 돌직구에 혜수의 얼굴이 속절없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난 할 수 있을 때까지 정우주 도와줄 거예요. 어디 가서 떳떳하게 손잡고 만나는 거…… 꿈도 못 꿔요.”

“네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 의리 때문에라도 대외적으로 계속 정우주 여자 친구로 남을 거고, 난 제삼자겠지. 그래도 상관없어. 대신 이 안에서는 나만 봐.”

혜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늘 그랬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말이 안 나왔다.

“사랑해.”

더는 무리였다.

이제 이 남자를 막아 낼 핑계도, 방법도 없었다.

무서웠다. 자기도 모르는 끝까지 깊이 들어오는 그가, 이렇게 금방 태세를 바꿔서 행복해지려는 마음이, 가만하게 숨어 있던 죄책감이……. 너무 무서워서 견디기 힘들었다.

말없이 얼굴을 가리는 혜수의 손등 위로 서준은 입을 맞췄다.

형을 너무 좋아하지 말라고 했던 정우주의 말 같은 건, 까맣게 증발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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