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하아…….”
말릴 새도 없이 옷이 벗겨져 내려갔다.
“으윽!”
괴로워하는 소리는 개의치 않았다.
“대체 언제까지 속일 생각이야?”
“무슨 말……. 서준 씨, 서준 씨!”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서준은 도망갈 틈을 주지 않았다.
꼼짝없이 안겨 들어온 곳은 정우주의 방 안이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침대 위에 혜수를 집어 던졌다. 싫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단호한 얼굴로 무시했다.
말을 듣지도 않고 상의를 벗어 냈다. 단단하게, 오밀조밀 있는 근육들이 오늘따라 눈에 띄게 격하게 움직였다. 햇빛이 잘 들어오는 방 안, 그의 몸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혜수가 서준의 팔뚝을 어루만지며 타이르듯 말했다.
“왜 하필 여기서 그래요?! 위로 올라가요, 응?”
서준은 정우주의 손자국이 남아 있는 손목에 입을 맞추고, 약간 부은 입가를 매만졌다.
“제발 도와 달라고 해. 혼자서 아프고, 썩히지 말고 제발…….”
들킨 걸까.
깊게 생각하진 못했다. 안식이란 건 몰랐던 딱딱한 몸과 마음이 이 남자 때문에 물렁해졌다. 아프고, 힘들었다. 위로받고 싶었다.
흐느끼는 것 같은 남자의 얼굴을 붙잡은 혜수는 먼저 입을 맞췄다. 아직도 몸을 떨게 하는 수치를, 제 분수를 잊고 싶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 줬으면 했다.
그런 혜수의 생각을 읽었는지 서준은 몸으로 응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감당하기 힘든 정도의 흥분에 온몸이 뭉개졌고, 붉게 물들었다.
물으려던 말은 늦은 오후가 될 때까지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정우주가 가져다 놓은 샴푸로 머리를 감고, 보디 샴푸로 함께 씻었다. 혜수가 먼저 수건으로 몸을 말고 나갔고, 그는 머리의 물기를 다 털어 내고 난 이후에 나왔다.
“아…… 진짜.”
혜수는 엉망이 된 침대를 보고 한숨부터 쉬었다. 저걸 언제 다 빨아 치우고, 무슨 핑계를 댈까. 시트 끝을 벗겨서 이불과 돌돌 말아 방 옆에 붙어 있는 드레스 룸으로 갖고 들어갔다. 큰 세탁기와 건조기가 붙어 있었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는지 새것이었다.
옆에 있던 정우주의 긴 티셔츠를 하나 골라 입었다. 혹시 비싼 걸 잘못 건드릴까 봐 몇 번이고 확인했다.
방으로 돌아오니, 서준은 이미 옷을 갖춰 입은 상태였다. 머리는 아래로 다 내려와서 순해 보였지만, 혜수를 위아래로 훑더니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지 혀를 찼다.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요?”
“아무 말 안 했어.”
“얼굴로 하고 있잖아요.”
서준은 빈 침대 끝에 혜수를 앉히고, 아래에 주저앉아 다리에 로션을 발라 주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도 정우주의 것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 안 할 거예요?”
“밤새도록 같은 방에 있던 것도 모자라서 지금은 그 새끼 옷까지 입고 있잖아.”
제법 살벌한 표정으로 귀여운 말을 내뱉는 남자였다.
“질투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이잖아요.”
“있어.”
“서준 씨.”
“정우주랑 쇼하는 거 그만해.”
살짝 부은 눈이 커다래졌다.
“……무슨 소리예요?”
“너랑 정우주, 거짓말이잖아.”
종아리를 꾹 누르며 비웃는 표정은 승리자의 것이었다.
미리 말하지 않은 정우주가 원망스러웠다.
그것 봐, 들킨다고 했잖아.
#9. 플래시백(Flashback)
(과거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문학적, 영상적 기법.
또 LSD 복용 후에 나타나는 환각 부작용을 일컫기도 한다.)
“야야, 우주야. 다 왔다.”
“하아…….”
“땅 꺼지겠다.”
“땅 꺼지면 그건 형이 무거워서 그런 거거든.”
우주가 휴대용 목 베개를 옆 좌석에 던지며 벨트를 풀었다. 거의 수평으로 누워 있던 의자에서 기지개를 켜며 다리를 쭉 뻗었다. 자다 일어난 탓인지 엄청 추웠다.
드라마 새 시즌의 대본 리딩이 있었다. 비중이 훨씬 늘어나는 바람에 외워야 할 게 어마어마했다. 저녁엔 연기 수업까지 소화했다. 혜수와의 스캔들로 이미지가 좋아진 데다가 바빠진 건 분명 좋은 일이었지만, 피곤했다. 집에 올 때까지 눈 한번 뜨지 못했다.
“아, 죽겠다.”
“많이 피곤해?”
“피곤한 건 둘째고, 입단속이나 잘해.”
“거참. 미안하다니까. 어차피 혜수 씨도 알아야 할 일 아니었어? 오히려 내가 얼마나 황당했는지 아냐? 그 큰 눈을 끔뻑끔뻑하면서……. 근데 먼저 봤을 때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더라. 스캔들이랑 악플 때문에 마음고생 심하게 하셨나 봐.”
“형, 너는 도대체 누구 매니저냐? 걔한테 관심 두지 말고 나한테나 신경 써.”
“여친을 남처럼 말하고 그래? 혜수 씨 들으면 서운해하겠다.”
“아, 됐어! 다 지겨워. 가기나 해.”
“술 먹지 말고, 이상한 짓거리 하지 말고, 들어가자마자 자라!”
우주가 문을 쾅 하고 닫자마자 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 버렸다. 깜깜한 산속 동네는 조명 하나 켜 두지 않은 터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으스스했다.
그런데도 이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불편한데, 오늘따라 유독 들어가기 싫었다.
“하, 진짜 들어가기 싫다.”
악에 차서 바들바들 떨던 이혜수를 떠올리며 더디게 움직이는 발을 억지로 끌었다.
“이혜수!”
싸우고 어색해지는 게 싫어서 이럴 때면 일부러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밝게 굴었다. 아무리 잘못한 일이어도 웃으면서 투정 부리고, 애교와 생떼를 적당히 섞어 종일 괴롭히면 혜수는 넘어가는 편이었다. 두 번 다시 그러지 말라면서.
오늘도 그럴 거라고 확신했다. 물론 아침에 있었던 일이 그냥 넘어갈 수 없을 만큼 정도가 심하긴 했지만, 평소처럼 넘어갈 거라고 완벽하게 오인했다.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혜수가 보였다. 문제는 강서준도 함께였다.
둘이 같이 있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데, 좋은 표정이 아니라 괜한 긴장감이 들었다.
“두, 둘이 같이 있었네. 뭐 해?”
혜수는 힐긋 쳐다보기라도 했지만, 서준은 우주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둘 다 사이좋게 입을 다물었다. 불길함과 어색함을 지워 내려 혼잣말을 이어 나갔다.
“저녁 사 왔는데 잘됐다. 나 옷만 갈아입고 나올게. 같이 먹자.”
우주는 들고 있던 걸 바닥에 내려놓고 밀었다. 종이 가방은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타고 쓱 미끄러져 순식간에 둘의 곁에까지 다다랐다.
제대로 멈추는 것까지 보고 외투의 지퍼를 내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벗자마자 드는 서늘함에 몸서리를 치며 곧바로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제 머리색보다 연한 핑크색 니트를 꺼내 입었다.
“왜 둘이 같이 있는 거야…….”
코를 훌쩍이며 휴대폰을 챙겨 나가려는데 뒤늦게 제 방의 달라진 뭔가를 확인했다. 순식간에 까만 눈동자가 확장됐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흰자에 빨간 핏줄까지 섰다. 호흡이 가빠졌다.
베개 밑을 확인하고, 시트를 걷어 이불과 매트리스, 침대 바닥까지 샅샅이 뒤져도 잠깐의 유희를 위해 혹은 비상시를 대비해 숨겨 뒀던 술이 모두 사라졌다. 당장 그것들이 없어진다고 해도 술을 못 구하는 건 아니었지만, 명백한 타인의 제어에 눈이 도는 느낌이었다. 당황한 우주가 다급하게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혜수!”
여전히 파리한 얼굴이 천천히 정우주를 향했다.
“너, 너 혹시 내 방에서…….”
바로 옆에 있던 서준도 그제야 고개를 틀어 그를 쳐다봤다. 어딘가 좀 지친 듯 권태로운 표정이었지만, 눈빛은 어느 때보다 차갑게 벼려져 있었다. 저 앞에서 소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
“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냉정한 관심을 못 본 척하고 다가갔다. 다리를 한쪽으로 꼬고 편하게 앉아 있는 서준과 뭔가 잘못한 듯 손을 모으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이혜수. 대체 이건 무슨 그림일까.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지만, 태연한 척하며 플라스틱 도시락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마른침을 연신 삼키고, 속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대답이 없는 건 평소와 같은데, 묘하게 더 싸늘한 서준의 태도에 괜히 몸이 움츠러들었다.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평화롭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어쩌면 모든 거짓말을 실토한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그저 헛된 꿈이었을까. 약에 취해 봤던 최악의 결말이 자꾸만 눈앞에 그려졌다.
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손끝을 물어뜯던 혜수가 조용히 일어났다.
“어, 어디 가?”
“휴대폰 울리는 것 같아.”
“내가 갖다 줄까?!”
혜수가 인상을 쓰는 바람에 차마 따라가진 못했지만 정우주는 불안함을 숨기지 못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했지만, 강서준이 그를 붙잡고 물었다.
“술 취하면 시끄럽게 진상 짓 부리는 거 꽤 오래됐나 봐.”
“내가 어제 진상 짓 했어?”
천연한 물음에 서준의 입꼬리 한쪽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숨겨 놓고 마셔야 할 지경이면 적어도 이 집에 취해서 들어오진 말았어야지.”
“……내 방에서 가져간 거, 형이야?”
“이혜수가 그런 짓 할 리 없잖아.”
당황한 우주는 허탈하게 웃음을 토해 내며 연신 눈을 끔뻑였다.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제 머리를 쓸어 넘겨 봤지만, 조급함은 숨겨지지 않았다.
“아, 혀엉! 왜 무섭게 심각해지고 그래, 진짜. 그런 거 아니야! 숨겨 놓은 게 아니고 그냥 자기 전에 한 잔씩…… 어, 맞아. 한 잔씩 마신 거야. 호, 혹시 혜수가 형한테 뭐라고 했어?”
싱긋 웃은 서준이 정우주의 머리채를 잡은 건, 순식간이었다.
“아악!! 형!! 형, 잠깐만!! 뭐 하는 거야!!”
“차라리 저 여자가 뭐라고 했으면 이렇게까지 속상하진 않았을 거야. 정우주, 내 눈으로 다 봤어. 네가 한 짓도, 이혜수가 끝까지 도와 달라고 소리 한번 안 치고 도망 나오는 것도. 전부 다 똑똑히 봤어.”
목이 뒤로 꺾이는 고통에 눈물 어린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머리채를 붙잡혀 정원 밖으로 끌려 나갔다. 양말만 신은 발에 냉기가 그대로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