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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접점-48화 (48/76)

[48화]

***

혹시 토하고, 기도가 막힐까 걱정돼서 옆에서 본다는 게 그만 깜빡 잠들었다. 침대 옆에 엎드려 잠들었다가 정우주가 토하는 소리에 혜수는 몸을 일으켰다. 역한 구역질 소리를 따라 들어가 우주의 등을 두들겼다. 화를 담아 세게 내리쳤다.

“야, 야! 아파……. 이 씨.”

“끊겠다는 말을 믿은 내가 등신이지.”

입과 얼굴을 대충 닦고 기어가듯 화장실을 나가더니 다시 침대에 털썩 누워 버렸다.

“아씨…… 돌겠네. 머리 아파……. 혜수야……, 나 약 먹어야 할 것 같아.”

“일어나. 할 얘기 있으니까.”

“하아. 오빠 토하는 꼴 보면 모르겠냐. 지금 제정신 아니다.”

“너 토하면 괜찮아지는 거 알아. 할 얘기 있어.”

제법 비장한 목소리에 우주가 성질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입고 잤던 점퍼의 지퍼를 내리고, 팔을 하나씩 빼고는 거칠게 벗어젖혀 바닥에 던졌다.

“왜!”

“앤드 잡지 화보, 무슨 소리야?”

“……매니저 형이 말했어?”

“어차피 다음 주면 알게 될 일이었을 텐데, 어디서 들었는지가 중요해?”

“시발, 진짜. 물에 빠지면 주둥아리만 둥둥 뜰 거야.”

“정우주!”

“아, 뭐!!”

“싫다고 하면 어쩌려고 할 생각이었어?”

“내가 네 반응을 모르겠어? 뻔히 아니까…… 천천히 말하려고 그런 거지.”

혀가 약간 꼬이긴 했지만, 말도 없이 사고를 벌인 당사자로서는 꽤 뻔뻔한 말투였다.

“당장 다음 주면 이미 그쪽에서도 스케줄까지 다 빼놨을 거고, 스튜디오며 기획까지 다 잡힌 일이었겠네. 당사자만 몰랐네. 아침밥 차려 줄 정성 들이지 말고, 말을 하지 그랬어?”

“하아. 앤드 에디터 누나, 너도 보면 알 거야. 내 브랜드 할 때 신세 진 것도 있으니까 좀 갚으려고 그런 건데, 잊고 있었어. 너도 사진 한두 번 찍어 보는 거 아니잖아. 그냥 가서 예쁜 옷 입고, 화장 좀 하고 웃으면 돼. 얼굴 좋아서 사진 잘 나온다고 누나가 얼마나 칭찬했는데.”

“왜 하고 말고를 네 멋대로 결정해?”

예상한 반응임에도 짜증이 났다. 우주가 빨개진 목을 벅벅 문지르며 크게 소리쳤다.

방문 틈이 열려 있다는 건, 두 사람 다 알아차리지 못했다.

“야. 나는 네가 필요할 때마다 뭐든 해 주려고 하는데. 할머니랑 싸우고, 정은하랑 싸우면서 이러고 있는 나한테 고작 그 정도도 못 해 줘?! 체면 한번 세워 줘.”

“네 체면 세우는 데 날 이용하겠다고?”

“하아, 씨발. 네가 내 옆에 왜 있는 건데? 고작 그 정도도 안 하고 평생 내 옆에서 여자 친구인 척만 해 주면서 기생충처럼 등골이나 빼먹으려고 했어?!”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지만, 감히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재빨리 자각했지만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이, 이혜수. 혜수야, 내 말은 그게 아니고……. 하, 나 지금 취했잖아. 어?”

“그래. 취하니까 솔직해지는 것 같네.”

비웃으며 침대에서 일어나는 혜수의 허리를 안아 붙잡았다.

“그런 거 아니야! 미안해. 진짜 내가 생각 없이 그런 거야. 취해서 헛소리했어. 내가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어? 정말…… 내가 잘못했어.”

“놔.”

기어코 벗어나려는 혜수의 손목을 흥분한 정우주가 세게 붙잡아 당겼다. 쿠당탕거리며 두 사람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게 삽시간이었다.

“야, 이혜수!”

“비켜, 비키라고!”

떨어질 줄 모르고 뒤에서 고집스럽게 들러붙는 정우주를 팔꿈치로 치며 밀어 냈다.

퍽!

하필 입술 쪽을 세게 부딪쳤다.

화가 난 우주의 눈빛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일어나려는 혜수의 어깨를 잡아 돌리더니 손으로 얼굴을 쳤다. 짧고 둔탁한 마찰음에 고개가 휙 돌아갔다.

“하…….”

볼 한쪽을 감싸며 일어서자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혜수의 얼굴을 반쯤 가리며 쏟아져 내렸다.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취해도, 미친놈처럼 굴었어도 이런 폭력은 처음이었다.

충격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순간 눈앞에 있는 대상이 윤 회장과 겹쳐 보였다. 익숙한 고통이었다. 많이 아프진 않았지만, 죄책감이 만들어 낸 가장 커다란 공포와 무기력함이 순식간에 몸을 덮쳐 왔다.

“혜, 혜수야. 미안해. 많이 아팠어?”

정우주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는지 떨리는 손으로 혜수를 안았다.

“그러니까 내가 아니라고…… 아니라고 했잖아. 왜 사람 말을 안 들어, 왜! 미안해. 잘못했어. 내 말 그런 거 아닌 거 알잖아. 어?”

시뻘건 눈으로 내려다보며 강압적으로 몸을 짓누르기 시작하는 남자는 평소의 그가 아니었다.

“아파, 놔! 정우주!”

정우주의 여자 친구라는 타이틀의 속뜻이 기생충이라는 걸 내심 알고 있었지만, 직접 이 입을 통해 들으니 더더욱 통감할 수밖에 없었다.

돈도 없고, 집도, 차도 없고, 자존심조차 팔아먹은 결과가 이거였다. 심지어 그림조차 그리지 못하는 병신. 10년 전부터 천천히 무너져 내려 황폐했던 혜수의 세상에 다시 한번 폭풍이 몰아쳤다.

“미안해, 내가 잘못 했어……. 미안해.”

우주는 혜수의 배 위에 얼굴을 비비며 우는 소리를 냈지만 눈물은 없었다. 술김에 허우적거리며 영혼 없는 사과와 혜수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호명할 뿐이었다.

칭얼거림을 들을수록 맞은 부위의 통증이 점점 진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힘이 풀린 잠깐 사이, 혜수는 그 품에서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도망쳤다.

“야!!”

둘이 뛰쳐나온 거실엔 서준이 앉아 있었다. 씩씩거리며 나오는 혜수와 그를 잡으려고 튀어나온 정우주. 셋이 맞닥뜨렸다.

“혀, 형……. 언제 왔어?”

“밥 먹자. 어제 술도 많이 마셨던데 와서 앉지.”

너그럽게 웃고 있었지만, 화내고 있다는 게 혜수의 눈엔 선명하게 보였다. 그 와중에 저 남자가 이렇게 가깝게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이혜수, 어디 가!”

우주는 2층으로 도망가려는 혜수의 손목을 붙잡아 끌고, 곁에 가 앉았다. 서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왼편엔 우주가 앉았고, 가운데엔 서준. 그의 오른쪽에 혜수가 앉았다. 여전히 묘한 위치였다.

대체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는지 몰라도 그가 차려 놓은 음식과 커피가 다 식어 있었다.

길고 선연한 눈가가 유독 심하게 휘었다.

혜수는 확연한 억지웃음을 애써 못 본 척하고 테이블 위로 시선을 돌렸다. 죽과 바나나, 오렌지, 베이컨과 부드러운 오믈렛.

키 낮은 테이블이라 밥을 먹을 땐 밑으로 내려앉는 게 편했다.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세 사람 다 바닥에 앉았다.

“대박, 나 안 그래도 속 쓰려서 죽을 뻔했는데.”

우주는 조금 전의 일은 까맣게 잊은 채 제 앞에 있던 접시의 음식을 허겁지겁 집어 먹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기에 혜수도 수저를 들었다. 반달 모양으로 만들어진 오믈렛을 한 입 떠서 먹었다. 식긴 했어도 비린내 하나 없이 부드럽고, 포슬포슬했다.

“맛있는데? 이거 다 형이 했어?”

“자르고 데우기만 한 거야.”

서준은 우주를 보며 퍽 사이좋은 척 답했지만, 손으로는 혜수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평소와 다른 다정한 대답에 신이 난 우주가 마음껏 하고 싶은 말을 했다.

그저 앞에 이혜수가 있어서라고 착각했다. 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꿈에도 모른 채.

“먼젓번에 내가 같이 먹자고 할 땐 들은 체도 안 하더니……. 같이 먹으니까 얼마나 좋냐? 괜찮지, 이혜수.”

아무렇지 않은 척 오렌지를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배에 들어와 꼼지락거리고 있는 서준의 손을 밀어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러더니 불쑥 손을 잡았다. 굵은 손가락 사이에 낀 가느다란 손가락이 희롱당하기 시작했다. 비비적거리고, 문지르고, 잡아당기고, 간지럽게 매만지다가 깍지 껴서 잡기까지 했다.

때마침 열린 방문 틈 사이로 우주의 휴대폰 착신음이 들렸다.

우주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서준은 기다렸다는 듯 혜수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속절없이 끌려가면서 소리 한번 지르지 못했다.

부엌에 도착한 그는 혜수를 냉장고 앞에 세우고,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잠깐, 서준 씨……!”

“하아.”

마른 입술을 먹어 치우고, 턱을 벌려 입안을 범하며 몸을 밀착시켰다.

방에서 나온 우주가 금방 두 사람을 찾았다.

“뭐야. 어디 갔지? 이혜수! 서준 형!”

둘을 찾는 정우주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불안함에 혜수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작은 손이 단단한 복근과 겨드랑이에 닿았다. 조금씩 밀어 내자, 바위 같은 몸이 천천히 밀려났다. 입술은 여전히 붙어 있는 채였지만, 협상의 여지가 보였다.

“제발…….”

고개를 저으며 부탁하자 눈빛이 차갑게 타올랐다. 어금니를 물고, 아일랜드 테이블 밑으로 앉아 몸을 숨겼다. 나름 입구 쪽에선 볼 수 없는 안전지대였다.

간발의 차이로 정우주가 부엌 앞에 도착했다. 1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

“여기서 뭐 해?”

“물 마시려고.”

“아, 형은?”

혹시나 정우주가 안으로 들어오진 않을까 불안해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척, 서준의 손은 겁을 모르고 움직였다. 스위치를 켠 것처럼 그의 체온에 혜수의 몸은 멋대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움찔거리는 티를 내지 않으려 테이블 상판을 꽉 눌러 잡았다.

“별채에 가셨어.”

“그랬구나. 그, 이혜수. 있잖아…….”

안 그래도 헐렁한 바지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 곧이어 우주의 입에서 나올 말을 예상했다는 듯 서둘러 막았다.

“그만, 나중에 얘기해. 전화 오는 거 아니야?”

“맞아.”

“얼른 가서 씻어.”

“회사 들를 일 있어서 거기서 씻으려고. 아무튼…… 나 늦었으니까 사과는 갔다 와서 다시 할게.”

중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서준은 혜수를 부엌의 바닥에 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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