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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접점-47화 (47/76)

[47화]

***

부엌으로 들어간 그가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종이 가방을 챙기더니, 유리 찬장의 옆에 있던 벽을 슬쩍 밀었다. 벽이나 다름없던 곳을 밀자 문이 되는 것도 신기한데 그 바깥은 더 장관이었다. 혜수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하얀색 철제로 벽을 세우고, 사방이 유리로 뚫려 있는 작고 귀여운 공간. 바닥은 석재로 되어 있었는데 신고 나갈 신발까지 따로 있었다.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삭막한 정원 풍경뿐이었지만, 하늘이 보여서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다리를 뻗고 앉아도 될 정도의 소파와 커피포트, 술과 음료가 들어 있는 작은 냉장고에 간식까지 채워져 있었다.

“청소는 해 놓은 것 같은데, 마음에 들어?”

“이런 거 난생처음 봐요. 정말 예뻐요.”

2층에서만 틀어박혀 지내다 보니 이런 공간이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작은 테이블 위에 세팅된 도시락엔 유부초밥과 김밥이 종류별로 잔뜩 들어 있었다. 서준은 젓가락부터 성급하게 들이밀었다.

“앉아서 천천히 먹어.”

“너무 많아요.”

“다 먹으라고 안 해. 먹고 싶은 것만 먹어.”

채소가 듬뿍 들어간 김밥을 하나 입에 넣고 오물오물했다. 배시시 웃는 걸 보아하니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씹는 걸 다 보고 나서 말을 걸었다.

“평소에 대체 뭘 먹고 살아? 밥을 먹긴 해?”

“하루에 한 끼만 먹는 게 습관이 돼서…….”

그것마저도 단백질바나 과자 같은 간단한 것들이었지만, 서준은 혜수의 대답에 벌써 아연실색했다.

“왜?”

“시간이 없어서 간단하게 먹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서준이 포장돼 있던 치즈김밥의 뚜껑을 열어 건넸다.

“원래 예술가들은 다 그런 거야?”

입안에 다 넣기도 힘들 것 같은 김밥을 집었다가 혜수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발 그것 좀 안 하면 안 돼요?”

“응?”

“나를 무슨 대단한 예술가처럼 말하는 거, 그거 하지 말아요.”

“대단한 예술가, 맞잖아.”

“아까 스케치북 보여 줬잖아요.”

치즈김밥은 크기만큼이나 맛있었다. 치즈의 고소한 맛이 진했고, 안에 있던 채소와도 적당히 어우러져 일품이었다.

“작가님 그림 다 봤어.”

“응?”

입안에 남은 것들을 급하게 꿀꺽 삼키자 서준이 물을 건넸다.

“어, 어디서요?”

“천천히 먹어. 인터넷으로도 찾아봤고, 작가님 팬이 숨겨 둔 그림도 봤어.”

“팬?”

“있어, 음침한 놈. 그림 볼 줄 모르는데 진짜 하나같이 멋있더라.”

“……다 옛날 일이에요.”

“계속 그리면서 뭘. 전에도 말했지만, 아픈 거 알면서도 계속하는 거 아무나 못 그래. 그리고 우리 앞으로 오늘처럼 저녁 같이 먹자.”

“왜요?”

“그러고 싶으니까. 좋아하는 메뉴는? 쌀국수는 알고…….”

듣고 싶은 말만 듣는 것 같았다.

“가리는 거 없는데 매일 챙겨 먹을 생각은 없어요.”

“난 삼겹살에 트라우마 있어.”

혜수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일어서려 하자 서준이 웃으며 붙잡았다.

“미안해. 농담이야.”

“제가 더 미안하네요. 나 때문에 트라우마가 참 많이 생겨서 어떡해요?”

식사는 빨리 끝났다. 서준은 원체 빨리 먹는 편이었고, 혜수는 적게 먹어서 시간도 딱 맞아떨어졌다. 얼마 만에 쌀을 씹었는지 몸에 피가 도는 느낌이었다.

혜수가 투명한 천장으로 흐린 밤하늘을 보는 동안 커피 향기가 다용도실 안을 가득 채웠다.

“디카페인.”

“고마워요.”

두 손으로 커피 잔을 받아 들었다.

“여기 좋지?”

“너무 좋아요.”

고개를 돌리고 방긋 웃는 틈을 타 입을 맞췄다.

손에 든 커피 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눈만 질끈 감자, 서준이 대신 잔을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입술은 여전히 붙은 채였다.

한 입도 마시지 못한 커피가 잔 안에서 살짝 넘쳐 출렁거렸다.

입술을 짓이기듯 꾹 누르고, 입을 살짝 벌려 부드러운 입술을 간지럽히듯 깨물었다. 평소와 다른 부드러운 입맞춤에 혜수의 몸이 뒤로 물러났다.

“이혜수.”

그가 이름을 다정하게 부를 때마다 발밑이 꺼지는 기분이었다. 대답했다간 좋아한다는 걸 들킬 것 같았다. 더는 제 감정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질문했다.

“오늘 좀 이상한 거 알아요?”

“모로코에서 나한테 보여 줬던 호감들, 정말 다 거짓말이었어?”

예상한 적 없는 물음에 선명하게 그어 놨던 선이 짓이겨져 뭉개졌다. 순식간에 흐려졌다.

참으려던 마음이 쏟아졌다. 넘친 커피처럼.

“다…… 처음이었어요. 낯선 사람이랑 밥 먹은 것도, 가던 사람 붙잡아 보려고 돌아간 것도, 먼저 번호 물어본 것도, 누구랑 같이 돌아다닌 것도 그래요. 내가 말한 적 있어요? 나 해외여행 자체가 처음이었어요.”

‘처음’을 붙인 진실들이 하나같이 꿈만 같았다. 재잘재잘 말하는 옆모습은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혜수야.”

“호감 없는 사람이랑 그렇게 안 해요.”

말의 힘은 대단했다. 일방적인 게 아니라는 최초의 인정에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이후의 말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우리가 서로 호감을 느낀 건, 그 특이하고, 위험했던 상황 탓이 큰 것 같아요. 그래서 더 그렇게 빠르지 않았나 싶어요. 아니, 상황은 핑계인가? 솔직히 이렇게 잘생기고, 피지컬도 좋은 사람이 힘들 때마다 ‘짠’ 하고 나타나서 도와주고 작정하고 꼬드기는데 어떻게 안 넘어가요?”

혜수의 말이 솔직하고, 길어질수록 서준은 불안해졌다.

“몸이 달았다고 허세는 부렸지만, 그런 데서 모르는 남자랑 하룻밤 보낼 만큼 겁이 없진 않아요. 서준 씨니까 그런 거예요.”

반대편 손으로 제 손목을 꼭 쥐고 있는 서준의 손을 천천히 매만졌다. 그날 밤처럼.

“근데 왜?”

“근데 알다시피 지금은 내가…… 이렇잖아요. 그러니까 남은 시간 동안 지금처럼 그냥…… 우리 그냥…….”

“정의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네 얘기를 해.”

이 정도만 하자는 말을 끝까지 하는 게 힘들었다. 흐려진 선을 다시 진하게 긋고, 또 그으려 했지만 서준이 막아섰다.

“난 이제 더는 못 참겠으니까.”

덜컥 겁먹은 표정에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할 말이 남은 입안이 달싹거렸다. 옆에서 폭탄이 터져도, 그림을 잊어버려도 웃을 줄 알던 여자는 비겁하게 꼭 이런 순간에 약해졌다.

그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혜쑤우! 이혜수우우!”

만취한 정우주의 목소리였다.

“제가 우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갈게요. 천천히 나오세요.”

“……여기서 밖으로 바로 나갈 수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

잡고 있던 손이 맥없이 스르륵 풀려나갔다. 서준은 그 온기를 잃지 않으려는 듯 빈손을 꼭 쥐었다.

“이혜수!! 이혜수우!! 혜수야!!”

“어휴. 시끄러워, 인마! 저기, 안에 혜수 씨! 안 계시나요? 제가 좀 들어가도……. 아! 정우주, 좀 일어나 봐!”

현관에는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만취한 우주를 매니저가 부축하고 있었다. 턱수염이 풍성하게 나 있는 매니저는 연신 헉헉거리고 있어 안경에 김이 서렸다. 덩치 좋은 남자였고, 우주가 가볍다지만 힘을 쭉 빼고 있어서 혼자 부축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어, 안녕하세요. 제가 옆에서 잡을게요.”

“아뇨. 혼자 할 테니까 문부터 좀 열어 주시겠어요?”

씩씩거리는 그를 위해 얼른 중문을 열자 거실엔 서준이 서 있었다.

깜짝 놀란 매니저가 그와 혜수를 번갈아 봤다.

“지, 집주인분이세요.”

“……아아, 네. 말씀 들었습니다.”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매니저의 알은척에도 그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불쑥 다가와 땀 흘리는 매니저를 대신해 우주의 뒷덜미를 잡았다. 점퍼 뒷부분을 한 손으로 잡아 질질 끌어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두 사람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

“아. 그럼 저 물 한 잔만 얻어 마시겠습니다.”

혜수가 부엌으로 얼른 달려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왔다.

“감사합니다.”

“제가 감사하죠. 우주 때문에 늘 고생이 많으세요. 근데 술 마시면 안 되는 거, 매니저님 아시잖아요.”

“그, 그게 저도 잘……. 촬영할 땐 분명 별일 없었는데, 전화 한 통 받고 나더니 기분이 팍 가라앉더라고요. 그러다 제가 잠깐, 아주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금방 만취했더라고요. 혜수 씨도 모르시나요?”

아침에 찾아왔던 남자 때문일 거라고 짐작만 했다. 매니저는 턱수염에 흐른 물을 닦아 내며 털털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뭘요. 혜수 씨야말로 스캔들 때문에 고생 많으셨죠? 우주가 오죽하면 이런 산속에까지 데려왔나 싶어요. 그, 제가요. 다음부턴 이런 일 절대 없게 하겠습니다. 우주, 이제 괜찮을 거예요! 회사에서 아마 집이랑 재고 문제도 해결해 줄 것 같고, 다른 것도 괜찮을 겁니다. 제가 꼭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다행이네요.”

“더 늦기 전에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다음 주에 커플 화보 찍는다고 들었는데 그때 뵐게요.”

“커플…… 화보요?”

처음 듣는 말에 혜수가 되물었다.

“아직 우주한테 얘기 못 들으셨어요? 드라마 새 시즌 홍보 겸 찍는 앤드 잡지 화보…… 혜수 씨랑 같이 찍을 거라고 하던데.”

순식간에 얼이 나간 표정에 매니저는 제가 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초조해했다. 뒤통수를 마구 긁으며 말을 더듬었다.

“어휴, 어떡하지. 제가 말실수했나 봐요.”

“우주가 바빠서 깜빡했을 거예요. 괜찮아요. 밤에 이 주변이 깜깜하니까 조심히 들어가세요.”

“예, 그럼 내일 오후에 우주 데리러 다시 오겠습니다!”

한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리는 커다란 덩치의 매니저는 도망치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침부터 밥해 주겠다며 나대던 이유를 깨달은 혜수가 미간을 문질렀다.

“그럼 그렇지.”

우주를 데리고 들어갔던 서준이 방에서 나왔다. 표정이 심각하게 안 좋아 보이는 건, 그쪽 역시 마찬가지였다.

“혜수야.”

“나중에요.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문이 닫혔다.

홀로 밖으로 나온 서준은 별채로 들어가지 않고 정원 의자에 앉았다.

안주머니에서 투명한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로 던졌다. 우주의 방에서 가져온 우표 몇 장과 흰 알약 세 알.

그걸 지켜보며 담배를 끊임없이 태웠다.

한참 기다려도 혜수는 나오지 않았고, 2층의 불도 켜지지 않았다. 집 안에서 아무 일 없을 거라는 걸 이미 확신하고 있으면서도 기분은 더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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