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
이혜수 혼자만의 재활 치료는 계속됐다.
붓은 미뤄 두고 연필이나 색연필을 쥐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물론 그것들 역시 오래 그리진 못했지만 그나마 손의 하중이 아래로 향하면서 부담이 덜했다.
진파란색 색연필을 쥐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아까 봤던 하늘을 그려 냈다.
전문가용 붓과 물감이 아니어도, 패널이나 캔버스 위가 아니어도 아직 이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물론 구현하고 싶은 내용의 반도 완성하지 못했지만, 긍정적인 기운이 든 건 왜일까.
덜컹.
1층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정우주가 돌아왔나 싶었지만, 그보다 훨씬 묵직하고 조용한 발걸음 소리에 저도 모르게 계단 쪽으로 고개를 틀어 이름을 불렀다.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는 건 눈치채지 못했다.
“서준 씨.”
바로 계단 아래에 있었는지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올라왔다. 생각할 때마다 나타나는 게 텔레파시라도 통하는 건지. 아니면 제 의식에 호출 기능이라도 있는 걸까.
틈날 때마다 서준을 떠올리고 있다는 건 자각하지 못했다.
“나인지 어떻게 알았어?”
“발소리.”
“……그렇게 말하면 설레잖아.”
아침에 상처 준 건 잊었는지 금세 또 뻔뻔하게 부딪쳤다.
“지금 들어온 거예요?”
“응.”
조심스레 다가와 옆에 앉은 남자는 새삼 두리번거렸다.
“계속 그냥 엎드려서 그릴 거야? 의자나 책상 같은 거라도 두지 그래.”
“얼마나 그린다고……. 나중에요.”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이혜수 작가님 작업실인데, 짐도 별로 없네.”
물감이나 붓, 젯소나 용액 같은 것들이 많았지만, 아직 다 꺼낼 생각은 없었다. 제대로 그리지도 못하고 버리는데 전문가용 붓이나 값비싼 물감 같은 게 다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우선은 필요한 것만 꺼내 두고, 나머지는 정리해서 상자째로 포장해 뒀다.
옷이며 짐이며 워낙에 없어서 일 때문에 머무는 사람 같았지만, 그래도 점점 이혜수 사는 냄새가 나긴 했다.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저렴한 스케치북에 낙서하듯 그렸고, 오늘은 종이 위에 나무용 코팅제를 발라서 그 위에 유화 물감으로 발색을 시도하기도 했다.
“붓도 제대로 쥐지 못하는데 무슨 필요가 있어요. 이거 봐요. 오늘 내가 그린 건데, 일곱 살 때도 이거보단 잘 그렸을 것 같아요.”
“그래도 나아지잖아. 나도 그려 볼래.”
의외인 말에 혜수는 선뜻 스케치북을 건넸다. 그가 안고 있으니 8절지 스케치북이 약간 큰 수첩처럼 보였다. 손을 펼쳐서 받치고, 똑같은 파란 색연필로 조금의 고민도 없이 그려 내기 시작했다. 한참 심각한 표정을 하더니 길게 쥐고, 손으로 문질러 블랜딩까지 했다.
남자의 상처 난 입술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됐다.”
생각보다 진지한 태도에 너무 잘 그리면 어쩌나 했지만 보여 준 결과는 그저 파란색 덩어리였다. 혜수가 말없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주먹을 입 앞에 말아 쥐고 흐음, 소리를 냈다.
“차라리 크게 웃지.”
“아니, 웃긴 게 아니고…….”
“잘 그렸어?”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단호한 대답에 커다란 어깨가 약간 처졌다. 혜수가 흰색을 잡더니 서준이 만들어 놓은 덩어리를 쓱쓱 삭삭 정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처럼 보이는 그림이 완성됐다.
“이상하네.”
“뭐가요?”
“어떻게 이렇게 다르지?”
“저는 여백도 두고, 명도도 다르게 했잖아요.”
“이혜수의 일곱 살이 어땠는지 몰라도 나보다 낫다는 건 확실하네.”
파란 그림을 안고 환하게 웃는 서준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서 따라 웃었다.
“우리 마라케시에서 같이 갔던 정원, 기억해요?”
“당연하지.”
“거기서 본 파란색 기억나요?”
“파란색?”
“네. 분수랑 건물 벽이 선명한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었잖아요. ‘마조렐 블루’라는 이름이 따로 있대요. 정원을 건축한 사람 이름을 따서 붙였는데, 이 색이 뭔가 그거랑 비슷한 것 같아서요.”
골똘히 고민하던 그는 피식 웃으며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모르겠네. 나는 네가 하고 있던 파란색 스카프밖에 생각 안 나.”
얌전하던 긴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짐 꾸러미 어딘가에 있을 파란색 역시 그에게 받은 것이었다.
그 강렬했던 풍경에서 서로가 기억하는 게 이렇게 다르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그만큼 자신에게 향했던 관심이 민망해서 혜수는 시선을 피하고, 괜히 손을 주물렀다.
그걸 물끄러미 쳐다보던 서준이 갑자기 욕실 좀 쓰겠다며 일어났다.
옅은 스킨 냄새와 밖에서 묻혀 온 찬 겨울 냄새가 코끝에 남았다. 눈이라도 오려는 걸까. 해가 지는 창밖을 보는데 흰 수건을 들고 나타난 그가 혜수의 바로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손.”
가로로 길게 접은 수건 위로 손을 올리라는 뜻이었다.
잠깐 의심하다가 올리자 수건을 접고, 덮어서 꾹 눌렀다. 젖어 있었고, 무척이나 따뜻했다. 제법 두껍게 접혔는데도 그의 악력이 적당하게 느껴졌다. 긴장이 풀렸고, 시원했다.
“고마워요.”
“병원을 꾸준히 다니는 게 어때. 물리 치료라도 받으면 덜 아프지 않을까.”
“이러다 말아요. 근데 진짜…… 시원하다.”
아무 말 없이 손을 꾹꾹 누르는 서준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마부터 곧게 이어지는 콧대와 짙은 눈썹, 모양이 또렷한 인중과 입술. 좌우로 묘하게 비대칭인 눈은 언제 봐도 매력적이었다.
문득 그의 얼굴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정확하게는 표정이 달랐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정적이기만 하던 눈매가 살짝 커졌다.
“왜?”
“유독 조용한 것 같아서요.”
“갑자기 나타난 놈 때문에 세컨드인 내 입지가 불안해져서 그렇지.”
“그런 거 아니라고 했죠?”
“그런 거 아니면 손, 만져도 돼?”
제가 낸 상처를 갖고, 불쌍한 표정을 하는데 거절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상한 짓 안 하기로 약속하면.”
“노력은 해 볼게.”
하얀 수건을 벗겨 내고 아직 촉촉한 흰 손을 천천히 매만졌다. 부드러운 손바닥을 엄지로 꾹 누르고, 소중한 것을 매만지듯 조심스레 위아래로 움직였다. 마르고 긴 마디를 잡아 훑고 제 손가락에 끼워 비볐다.
점점 기분이 이상해졌다.
“혜수야.”
상기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을 보느라 손을 놓쳤다.
“나 좀 안아 주라.”
갑작스러운 부탁에 혜수는 인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계단이 있는 뒤쪽으로 걸어갔다.
1층으로 도망이라도 가나 보다 싶어 실망하려던 찰나,
와락.
등 뒤에 따뜻하고, 말랑거리는 체온이 닿았다.
“안아 달라고 했다가 뒤에서 급습당할지는 몰랐네.”
어깨 위에 닿은 정수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싫으면 말아요.”
혜수가 몸을 떼어 내려는데 서준이 팔과 몸을 앞으로 잡아당겨 제 다리 위에 앉혔다.
의지와 달리 부지불식간에 위치가 바뀌어 버린 탓에 커다란 눈을 끔뻑거렸고, 서준은 애착 인형을 안는 아이처럼 혜수를 꽉 끌어안았다.
무슨 까닭인지 몰라도 그 행동이 안쓰러워 피하지 않았다. 적당히 힘주어 넘긴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 주자 더욱 깊숙이 당겨 안았다.
“할 거예요?”
“응?”
“섹스…….”
몸을 살짝 떼고 물었다.
“하고 싶어?”
평소보다 부드럽고, 얌전한 목소리에 다분히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혜수가 천천히 고개를 젓자 서준은 다시 틈 하나 없이 몸을 밀착시켰다.
“그래, 오늘은 참자. 내가 사 준 옷 입은 거 보니까 벗기기 좀 아깝기도 하고, 또 코피 나면 어떡해?”
그러고 보니 아까 짐을 정리하고 다시 갈아입은 게 하필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그가 사 준 옷이었다. 하나같이 쌀쌀한 실내에서 입기 좋고, 따뜻했다.
“화, 환불 안 된다고 해서 입긴 했는데, 다음부턴 이러지 말아요.”
“따뜻하게 좀 입고 다녀. 이 집이 난방을 종일 돌린다고 해도 꽤 추워. 쓸데없이 남는 공간이 많아서 비효율적이거든.”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또 뭐가?”
‘그건 아닌 것 같다’며 단호하게 부정하는 게 웃겼다. 별거 아닌 말에 웃는 큰 몸의 진동이 간지럽게 가슴 근처로 전달됐다.
“쓸데없지 않아요. 빛이 자리를 찾아서 들어와요. 정성스럽게 지었고, 예쁜 집이에요.”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갔다. 숨쉬기 힘들 정도로 살짝 벅찼지만, 기분 좋은 압박감이었다.
“지은 사람이 들으면 좋아하겠다.”
“건축가를 알아요?”
“응, 좋은 사람이었어.”
“그럴 것 같았어요. 어떤 분인지 몰라도 집 외형은 단단한데, 안은 따뜻해요.”
“……나중에 그 사람한테 꼭 전해 줄게.”
심장 소리가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한참을 안고 있었지만, 좀처럼 놔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제 일어나죠?”
“떨어지기 싫다. 좋은 냄새 나.”
그때.
꼬르륵…….
혜수의 빈속이 참다 참다 소리를 질렀다.
민망함에 서준의 허벅지 위에서 버둥거리며 그를 밀었다.
“소, 소화되는 소리…….”
크륵…….
잔인한 위장은 다시 한번 아니라고 확인 사살을 마쳤다.
“다른 건 몰라도 일단 밥은 먹여야겠다. 이 정도면 위가 욕하는 거야.”
민망함에 어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그의 배 속 안이었다.
웃으면서 놀릴 거라는 예상과 달리 서준은 손수 허리를 잡아 벌떡 일으켜 주며 저녁을 제안했다.
“아침에 우주가 그러는 바람에 집에 먹을 게 없을 텐데.”
“다용도실에서 먹을까?”
이 집에 온 지 한참 됐지만, 다용도실을 본 기억이 없다. 서준을 따라 쫄래쫄래 움직였다. 그가 사 준 옷을 입고 있었고, 실내화도 신고 있었다. 이제 그가 사 온 밥으로 배를 채울 차례였다. 이 정도면 사육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