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뭐, 뭐야?! 뭐 있었다는 것처럼 말하지 마! 너희 엄마는, 영주는…… 형도랑 행복했어. 옆에서 본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맞다. 행복했다. 그런 행복한 두 사람의 뒤에서 곽 소장은 제 감정은 숨기고 오랜 시간 동안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어린 서준이 알아차렸을 때조차 정작 당사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버지에겐 늘 좋은 친구였고, 어머니에게는 좋은 동료였다.
처음엔 화가 나서 치기 어린 마음에 사무실까지 쫓아와 성질을 부리기도 했다. 그가 혹여 자신의 어머니에게 수작이라도 부리진 않을까 감시하기까지 했지만, 동원은 끝까지 변함없었다.
“그러니까 더 대단한 거죠.”
“대단하긴 무슨……. 그냥 이런 구질구질한 경우도 있는 거야. 그리고 끝까지 기다려 준 클라이언트들이 더 대단한 거지.”
동원은 자신의 행동을 비하했지만, 서준은 어머니가 죽고 난 이후에도 변함없이 그의 작은 사무실 벽에 남아 있는 감정을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 하필 어머니였어요? 아저씨, 인기 많았잖아요.”
근본 없는 질문에 좀 힘이 빠졌다. 민망함에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중얼거렸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이유가 어디 있겠나. 서른씩이나 먹고 아직도 몰라?”
이미 재가 되어 사라져 버린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데도 여전히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이었다.
“후회 안 하세요?”
“진짜 오늘 왜 그러냐? 나 괴롭히기로 작정하고 왔냐?”
“그냥 새삼 궁금해서요.”
“……영주가 행복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행복했잖아. 그 결과로 네가 이렇게 잘 자랐잖냐. 위험한 일 같은 건 때려치우고, 얌전히 건물 관리나 하면서 결혼해서 애 하나만 낳아 주면 더 좋으련만.”
“아저씨.”
“으잉?”
“만약에 어머니가 불행해 보였다면, 그땐 어떻게 하셨을 거예요?”
“그랬으면…… 제풀에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기다렸다 냅다 낚아챘겠지! 아들딸까지 덤으로 생기는데, 얼마나 좋았겠어. 근데 직원들한테 네가 내 숨겨 둔 아들이라니까 아무도 안 믿더라.”
서준이 환하게 웃었다.
“거짓말에도 좀 정성이 있어야죠.”
옛날부터 거짓말에 서툴렀다. 어린 서준이 대뜸 찾아와 ‘아저씨, 우리 어머니 좋아하죠?’라고 물었을 때, 허둥지둥거리며 도망가려던 모습이 여태 선연했다.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쓰나. 이 나이에 그러면 이젠 죽는 길밖에 없다. 그러는 너는? 갑자기 뭔 바람이 불어서 여까지 왔어? 언제 죽을지 모르니 건물도 팔아 치워 버리라 하더니!”
서준이 피식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제법 큰 머그잔이 청년의 손에선 유독 작아 보였다.
“알아보셨어요?”
“그래, 이놈아! 정보 풀자마자 우르르 몰려들더라!”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느이 아버지가 몇십 년 전에 대출 빼고 3억에 산 게 여덟 배가 올랐어! 심지어 청담동에 있는 꼬마 빌딩은 사겠다는 사람이 줄을 서더라. 너, 네 통장에 얼마 찍히는 줄이나 알아?”
“어쩐지. 은행만 가면 VIP 취급 하더라.”
“그 좋은 걸 지금 팔고, 세금 내고 나면 손해가 얼마나 막심한 줄 아는 거야? 급전 필요하냐? 혹시 사고라도 쳤어?”
“제가 급전이 필요하면 아저씨한테 손 벌렸겠죠.”
“벼룩의 간을 내먹을 생각이나 하고.”
“세금 내고, 신경 쓰는 것도 귀찮습니다. 다 팔아서 현금화할 거예요. 아, 현진이 병원 있는 건물은 제외하고요.”
찻잔으로 입술을 가져가던 그가 멈칫거리며 물었다.
“리모델링 마쳤을 때 팔아야 제일 이득인데, 왜?”
“노후…… 준비?”
서준의 입에서 나온 생소한 단어에 곽 소장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할 사람이라도 생겼냐?!”
동원은 자기도 하지 않는 결혼을 종용했다. 가족들이 그렇게 되고 나서 이따금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곤 했는데 그 끝의 결말 역시 반드시 결혼이었다.
“왜 얘기가 그렇게 튀어요?”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팔아 달라던 놈이 갑자기 노후 준비를 한다니 결혼밖에 더 있어?!”
눈을 끔뻑거리던 그가 쾌활하게 웃기만 했다.
“아니여? 쯧, 괜히 기대했네. 아무튼, 천천히 생각해 봐. 이참에 법인으로 돌려서 절세하고, 관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있어.”
“네.”
고분고분한 대답에 동원이 인상을 썼다.
“너 이 자식, 진짜 수상하다? 왜 이렇게 고분고분해? 그리고 그런 건 평소처럼 전화로 하면 되지, 뭣 하러 여기까지 오는 정성을 들이는데? 나 뭐 죄지었냐?”
서준은 커피를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은 의자에 앉아 있는 게 꽤 곤욕이었다.
“백수처럼 보이기 싫어서요.”
“캑! 네가 여기 물정을 몰라서 그러나 본데 돈 많은 백수가 자고로 최고야.”
“아저씨, 저 지금 혜수랑 같이 있어요. 그 집에서.”
얌전히 의자에 앉아 있던 곽 소장이 벌떡 일어서서 소리쳤다.
“뭐?!”
곽 소장 역시 이혜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윤 회장과 마주치게 되는 대외 행사, 전시회, 텔레비전에서조차 봤다. 작은 몸집에 생기 없는 눈빛을 곧바로 떠올렸다. 인사를 받고도 모르는 척 넘어간 게 몇 번이나 있었다.
“그렇게 됐어요.”
“……아이고, 아이고. 두야! 왜 하필. 이놈아! 미리 말을 좀 하지!”
“제가 제 집에 들어가는 것도 말을 하고 들어가야 하나. 그러는 아저씨는 아무리 정우주가 애걸복걸한다고 해도 왜 하필 그 집을 주셨어요?”
동원이 머리를 감싸 안고 고개를 마구 저었다.
“서울이랑 적당히 가깝고, 조용하고, 다른 이들 쉽게 드나들 수도 없는 그런 집이 어디 많아? 그리고 그런 큰 집은 비워 두는 거 아니라고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어! 사람이라도 들여야 한다니까 안 된다고 하다가 알아서 하라고 한 게 누구야?!”
“네, 그 도깨비 얘기라면 어머니한테도 질리게 들었어요.”
“허어……. 계약서 작성이랑 금액 치르는 건 다음 달에 하자고 미리 얘기했다. 언제부터? 대체 언제부터 거기 들어가 있었어?”
“그 둘이 오기 전부터요. 어쩐지 깨끗하더라.”
“쯧쯧, 미련하긴! 당장 나와! 이참에 잘됐다. 현진이 병원 근처에 거처 마련해 주마. 얌전히 사업 공부도 하면서 내 알아볼 터이니 선이나 봐라.”
“아저씨.”
“응?”
어떻게 말을 꺼낼까 잠깐 고민했지만, 당사자에게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고백이 나와 버렸다.
“제가 이혜수를…… 좋아해요.”
동원에게 혜수와 있었던 일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처음 소리 내어 말하면서 서준은 한 번 더 제 감정을 확신했다.
이렇게 된 이유 같은 건 모른다. 그저 10년 전에도, 10월 말에 모로코에서 만났을 때도 그냥 그렇게 됐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거기서 나와야 할 것 아니냐. 혜수가 혼자인 것도 아니고, 우주랑 같이 있다며. 그 애는 그렇다 쳐도 우주, 네 작은 이모 아들이야. 막장 드라마라도 찍을 거냐?!”
“저도 그냥 나가려고 했는데, 혜수 손이…… 엉망이더라고요.”
“무슨 소리야?”
“틈이 보여요.”
“두 사람 사이가 별로라는 소리야? 좀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을 허지. 늙은이 놀리냐? 하아, 인연도 참 무심하게 돌아가는구먼. 왜 하필이면 다른 이도 아니고…….”
“모르죠. 아, 윤 회장님한텐 저 온 거 비밀로 해 주세요. 그쪽도 조만간 정리할게요.”
서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동원이 기함하더니, 그러지 말라고 손을 흔들었다.
“아, 괜히 벌집 건드리지 말어! 어차피 그냥 둬도 내일이면 제명에 돌아가실 텐데, 왜 네 손을 더럽혀? 그 할망구가 네 아버지 괴롭힌 몫은, 죽기 직전까지 큰딸 못 본 거로 톡톡히 치르셨다.”
“아버지 괴롭힌 걸로는 안 끝난 것 같아서요. 아무튼, 알아 두세요.”
곽 소장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내 뭣 하러 그 노인네를 만나서 입을 놀리겠냐? 한 3개월 전쯤인가 마주쳤었는데 성질머리 고약한 거 여전하더라.”
“어디서요?”
“여주에 라운딩 갔다가 바로 앞 팀으로 만났어. 카트 안에 꼭 숨어 있는데 들켜서는……. 내일모레면 여든이 넘는 양반이 어찌나 정정하고, 빠른지. 쫓아갈 수도 없더라.”
복용하는 약이 있다고 들었고, 정우주는 윤 회장이 많이 약해졌다고 했지만 채 잡고 휘두를 기운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다행이네요. 하마터면 동정할 뻔했는데. 오늘은 이만 가 볼게요.”
“왜 폭탄을 안겨 줘 놓고 점심도 안 먹고 가려 하냐?”
“앞으로 필요할 것 같아서 세무사랑 변호사 좀 만나 보고 올게요. 당분간 자주 여기로 출근할 테니까 제가 알아야 할 게 있으면 알려 주시고요.”
“서준아.”
“예.”
“새 의자 사 두마.”
서준은 웃으며 턱끝으로 작은 스툴을 가리켰다.
“네, 이제 이건 버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도록 하마.”
아마 쉽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이 사무실에 들어오면 늘 자신의 어머니가 그 의자에 앉았었던 걸, 서준은 기억하고 있었다.
근처에 세차를 맡겼던 차를 찾아 서울로 이동했다. 약속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제가 갖고 있던 것들을 쭉 살폈다. 두꺼운 등기부 등본들의 내역은 하나같이 복잡했고, 지저분했다. 과거를 부끄러워했던 아버지가 어쩌면 가장 먼저 청산하려고 했던 것들을 이제야 제대로 마주했다.
지금까지 그것들의 관리부터 세금 문제까지 곽 소장은 도맡아 했다. 문제 하나 두지 않고 지켜 내고 있었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얘기가 길어질수록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부모님을 떠올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저 혜수가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