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접점-44화 (44/76)

[44화]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봐서.”

따라 나오려는 서준을 겨우 붙들어 두고, 현관으로 혼자 나왔다.

또 엄마가 찾아와 지난번 같은 일이 생길까 두려웠지만, 이렇게 된 마당에 더는 피할 생각이 없었다. 숨을 한 번 길게 내쉬고 문을 열었다.

두꺼운 철문 뒤로 찬 바람이 몰려 들어왔다. 문 앞에 선 사람을 보자 각오가 무색해졌다.

검은색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쓴 커다란 남자가 우뚝 서서 혜수를 바라봤다. 이 날씨에 회색 후드 티에 청 재킷만 걸치고 있는 몸은 무척이나 슬림했다. 몸만 보면 모델 같았다.

“누구……세요?”

“누나.”

현관 앞의 낯선 남자가 혜수를 그렇게 불렀다.

“네?”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자 남자는 모자와 마스크를 벗고,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눌렀다.

하얗고 작은 얼굴에 쌍꺼풀 없이 긴 눈, 코와 붉은 입술이 인형처럼 예쁘장한 사람. 혜수의 기억 속에 이렇게 요정처럼 예쁜 남동생은 없었다.

“우주 형이 말 안 했나 봐요. 저는 누나 얘기 많이 들었는데…….”

“아, 우주라면 나갔어요. 미리 연락하고 오시지.”

“제 연락을 안 받아서요. 매니저 형한테…… 이 시간엔 있을 거라고 들어서 찾아왔는데.”

“스케줄 때문에 방금 나갔어요.”

혜수의 말에 맑은 눈동자가 점점 촉촉해졌다. 손등으로 코끝을 가리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푹 숙인 얼굴 아래로 겨울 햇살에 반짝이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우는 모습에 놀란 혜수가 가까이 다가가자 남자가 대뜸 끌어안았다.

“어, 잠깐……!”

“죄송, 죄송해요. 저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요. 흑, 흐윽…….”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도 잠시, 가느다란 몸을 토닥이며 위로하던 혜수는 그가 누군지 떠올렸다.

윤 회장이 보여 줬던 사진 속 그 남자였다. 정우주와 함께 찍혀 있던, 예쁘장한 사람. 사랑에 빠진 눈으로 우주를 바라봤던 그였다.

“흐흑, 흑. 형이…… 형이 절 의심해요……. 전 아닌데, 전 정말 아닌데…….”

아마도 일방적으로 끝난 관계, 라는 걸 짐작했다.

한때 위험을 감수하고 몸을 내던질 만큼 사랑했겠지만, 그 끝은 결코 동화 같지 않았을 것이다. 다 큰 남자가 잘 모르는 여자에게 안겨 울 만큼 힘든 일이기도 했다.

어깨가 축축해졌다. 한참을 울던 그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

“죄송해요. 정말, 정말 죄송해요.”

“일단 들어가서 얘기할래요?”

하얀 피부 때문인지 빨개진 눈가와 코끝이 유난히도 안타까웠다. 그의 시선이 뒤로 힐끔 향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폐 끼치기 싫어요. 가 보겠습니다.”

울음을 다 그치지도 못한 그가 혜수에게 인사를 하고, 뒤쪽을 향해서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배후의 인기척을 알아차린 혜수가 뒤를 돌아봤다.

팔짱을 끼고, 열린 현관문에 기대 있던 서준의 표정이 겨울바람처럼 냉랭해져 있었다.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기척 좀 내라고 했잖아요.”

“남자 친구만 있는 줄 알았더니 절절하게 울면서 매달리는 놈까지 있었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그가 잔뜩 젖은 카디건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구겼다. 짜증을 숨기지 않고, 혀를 차더니 혜수를 집 안으로 끌어당겼다. 혹시 앞의 이야기를 듣진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드는 찰나, 고개를 숙인 그가 입술을 뭉개 왔다.

쾅!

열려 있던 현관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아프다 싶을 정도로 깨물다가 잠깐 틀어진 고개를 빌미로 입안으로 혀를 집어넣어 비벼 댔다.

“하.”

동시에 숨을 토해 냈다. 진득하게 핥고, 빨아 대느라 질컥이는 소리가 현관을 메웠다.

혜수가 그의 어깨를 밀어 봤지만, 서준은 양 손목을 붙들어 올려 벽까지 몰아세웠다.

힘으로 몰아붙이는 일방적인 입맞춤에 화가 난 혜수가 그의 아랫입술을 콱! 깨물었다. 그제야 멀어졌다.

“안 한다고 했잖아요.”

서준은 제 입술을 손등으로 훑으며 투정 부리듯 말했다.

“예쁘고, 인기 많은 여자 좋아하는 거 힘들다. 너무 어렵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저 사람은 나도 잘 몰라요.”

“모르는 놈이라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해. 그런 놈을 들이려 했다고? 모르면서 문을 함부로 열어?”

“아니, 그게…….”

“그럼 말해 봐. 여기까지 찾아와서 엉엉 우는 놈 정체가 뭔데?”

립스틱이 번진 입술 사이가 움찔거렸다가 꾹 닫혔다. 거짓말이라도 나오면 좋으련만. 이 남자에게 어설픈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이젠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비겁하게 입을 다물고 젖은 카디건을 벗었다.

“순순히 얘기 안 할 거라고 예상은 했어. 내가 진짜 널 어떻게 할까?”

“……어쩌긴요. 떠나면 그만이지.”

누군가의 끝을 목격한 혜수는 덤덤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참 멀다가도 가까웠고, 가까워졌다 싶으면 다시 멀어졌다. 사막의 신기루처럼. 포기하지 않겠다는 서준은 잠깐 자신감을 잃었다.

***

“소, 소장님!”

조용하던 곽동원 건축 사무소가 떠들썩해졌다. 자기를 부르며 밖이 소란해졌는데도 중년의 남자는 책상에 앉아 거울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염색이 잘못된 것 같다며 웅얼웅얼했다.

“아이참, 소장님!”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온 나진 대리가 발을 동동 구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 왜? 누가 쫓아왔는감?”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누구? 클라이언트?”

이번엔 재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말을 해. 말을!”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내리치던 나진 대리가 그제야 소리친다.

“소장님. 저 잘생긴 사람 보면 말이 안 나와요.”

“또, 또 오바쌈바 한다. 내 앞에서는 수다만 잘 떨더구먼.”

나진 대리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눈을 험악하게 위로 뜨자, 그는 그제야 머리를 손으로 빗어 넘기며 일어섰다. 밖에 나가자 둥글게 말린 도면이 가득 들어찬 벽 앞에 키 큰 남자가 관심을 받으며 서 있었다.

“누구…….”

“건강하셨죠?”

노인네 취급 하는 인사말에 건방지다 싶었지만, 그 얼굴을 알아차리자마자 반가운 걸 숨기지 못했다.

“너……! 강서준! 이 자식, 이거! 잘 지냈냐? 어? 언제 왔어? 근데 어째 키가 더 큰 거냐?”

“이제 서른 넘었습니다. 아저씨가 작아진 거죠.”

비웃는데도 퍽 반가워서 얼른 다가가 껴안았다. 장군감이었던 제 아비보다 더 건장한 모습에 울컥하기까지 했다.

“어허허, 싸가지 없는 거 보니 건강한가 보네!”

친근한 둘의 인사에 주변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더욱 강렬해졌다.

“들어가자! 커피, 마실래?”

“주시면 감사하죠.”

서준이 직원들에게 눈인사하며 구석의 사무실로 먼저 들어갔다, 직원들은 곽 소장을 따라 우르르 탕비실로 몰려 들어갔다.

“소장님!”

“저분은 누구예요?”

“클라이언트?!”

곽 소장이 커피를 내리며 캐드득거렸다.

“잘생겼지? 숨겨 둔 아들이야.”

직원들은 일제히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머쓱해진 그는 향이 진한 커피 두 잔을 들고 사무실로 총총 돌아갔다.

오랫동안 전화나 메시지만으로 연락하던 서준이 사무실 벽에 걸린 사진들을 보고 있는 모습은 참 현실성 없는 풍경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빤히 지켜봤다.

“아저씨, 여기 사진에 있는 건물들, 다 어머니 스타일이네요.”

눈치 빠른 것도 여전하다 싶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눈가에 자연스레 만들어지는 주름이 선해 보였다.

“새끼라고 곧바로 알아보네. 그래! 느희 엄마 거다. 얼마 전에야 영주가 받아 둔 프로젝트들 다― 끝냈다. 하나같이 무식하게 덩어리 큰 것들이라 어찌나 힘든지. 내 명줄이 20년은 줄어들었을 게야. 어휴!”

자연 풍경의 기하학적인 콘크리트 건물.

강서준의 어머니, 이영주 건축가의 건물들은 하나같이 호불호가 갈렸다. 환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건물이라는 혹평을 받다가도 막상 안에 들어가면 풍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건물이라고 호평을 받기도 했다.

그가 먼 곳을 헤매는 동안 곽 소장은 흐지부지 사라질 수 있는 약속을 이어 나갔고, 끝끝내 전부 지킨 참이었다.

한때 친한 동료였다고 하더라도 그런 의리까지는 필요 없었을 텐데. 꿈에도 몰랐다.

“장소도 어찌나 거지 같은 데만 잡아 놨는지. 아산 저수지 허문 둑방 옆에다가 저택 하나 놓고, 이천에 있는 논두렁 앞에다가 3층짜리 카페 짓겠다고 하는데…… 내가 진짜 환장하는 줄 알았다. 클라이언트도 하나같이 지 같은……. 야, 근데 너 입술은 왜 그래? 아직도 몸빵으로 돈 벌고 다니냐?!”

그런데도 애정을 느꼈다. 자기 밥그릇만 챙겨도 충분히 벅찼을 텐데, 그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면서도 이해할 순 없었다.

그런 노력은 이영주 건축가가 남긴 일만 마무리하는 것뿐이 아니었다. 절친한 친구이자, 서준의 아버지인 강형도가 남긴 건물들 역시 일일이 관리하고, 살피는 것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다.

하루아침에 가족들을 모두 잃은 서준에게 사돈에 팔촌까지 침을 흘리며 달려들 때도 동원은 그가 온전히 모든 것을 받을 수 있도록 도운 인물이었다.

“어떻게 그러세요?”

커피를 건네받은 그가 구석의 작은 스툴을 끌어와 앉아 자리를 잡았다.

5평도 채 되지 않는 작은 사무실. 회의나 미팅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하며 평소엔 좁다고 아무도 들이지 않는 그런 곳이지만 서준에게는 그리운 장소이기도 했다. 어릴 때 틈만 나면 와서 동원을 괴롭혔다.

“뭐가?”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한 사람을 좋아하지?”

곽 소장이 입으로 들이켜던 커피를 뿜어냈다.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그가 뿜어낸 것들이 먼지처럼 흩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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