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도깨비도 아니고 하룻밤 사이에 이걸 다 어떻게 준비했을까.
통창을 통해 2층으로 쏟아지는 햇빛이 영롱하고, 아름다웠다. 무척이나 따뜻해서 새삼 이러고 있는 게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 정우주의 여자 친구 행세로 이 집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집주인인 강서준과 섹스한다는 사실이.
순식간에 차오르는 자기혐오로 손끝이 입으로 향했지만, 그가 물었던 기억 때문에 이젠 황급히 빼내는 게 일상이었다.
이 남자는 정말 처음 만난 그때부터 조금의 틈도 주지 않았다. 시간의 공백이 있었을 뿐, 단 한 순간도 제 감정과 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갖고 있는 마음의 형태가 점점 똑같아졌다.
이젠 가끔 불안해지기까지 한다. 서준에 대한 감정이 깊어질수록, 정우주와의 거짓말 역시 커지는 게 사실이니까.
어차피 떠날 사람인데. 그 잠깐을 버티면 되는데 연인처럼 구는 그와 몸이 닿을수록 점점 겁났다. 너무 좋아서.
‘네가 이렇게 나만 봤으면 좋겠어. 나만 그렸으면 좋겠어.’
1층에서 다시 들려오는 큰 타격음에 혜수의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천장이 높아서인지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이런 소리를 내는 건 대체로 정우주밖에 없었다. 제 아파트에서도 몇 번이나 사고 칠 뻔했는데, 이대로 뒀다간 남의 집을 다 망가뜨릴 게 분명했다.
그는 부엌에 있었다.
“정우주.”
조리대를 엉망으로 채운 재료들과 어디서 찾아온 건지 모르는 조리 기구들. 본격적으로 앞치마까지 한 그의 표정은 해맑았다.
“어, 일어났냐?”
“또 뭐 하는 거야?”
살기 어린 눈빛에 우주는 그제야 하던 걸 멈추고 눈치를 살폈다.
“뭐긴. 제대로 먹는 걸 봤어야 말이지. 나가기 전에 밥이라도 해 주고……. 뭐야, 너 화장했어?”
“그냥…… 기분 전환.”
썰었지만, 한입에 넣기도 힘들 것 같은 파프리카와 목적을 알 수 없이 잘게 썰린 양배추. 둥둥 떠 있는 계란 껍데기와 짓이겨지다 만 고깃덩어리. 쿵쿵 울리던 소리의 원인은 저게 분명했다. 숭덩숭덩 썰린 당근을 들어 올리며 혜수가 물었다.
“당나귀 줄 거니?”
“확 씨! 그럼 그냥 네가 당나귀 해! 엉? 네가 하도 안 먹으니까 걱정돼서 그런 거 아냐? 오늘부터 또 혼자 있어야 하는데 안 먹고 굶잖아!”
같이 있어도 딱히 먹은 기억은 없는데, 저자세의 정우주는 분명 뭔가 잘못했거나 걸리는 게 있다는 뜻이었다. 정적이고, 차가운 눈동자가 그를 훑어 내렸다.
“어제는 말도 없이 어디 갔었어?”
“어?”
그 난리 통에 집에 정우주가 없었다는 걸 알아차린 건, 거의 아침이 다 되어서였다.
“조용해서 방에서 잠이라도 자는 줄 알았더니, 새벽에 들어왔잖아.”
“내가 나간 걸 들어올 때 알았냐?”
“말 안 했잖아. 술 마셨어?”
“하아, 진짜 내가 무슨 생판 남이랑 동거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관심이 없어서야. 너 때문에 답답해서 바람 쐬고 왔거든. 그리고 끊는다고 했잖아. 안 마셨어!”
“다음부턴 말을 하고 나가.”
“왜? 혹시 나 없는 사이에 형이랑 무슨 일 있었어?! 말, 했어?”
“……있었으면?”
우주가 칼을 내려놓으며 기겁했다.
“없었어.”
“하아, 진짜. 야! 미친, 사람 심장 마비로 죽일 일 있냐?”
“네가 말하기 전까진 나는 아무 말도 안 해.”
계란 껍데기를 숟가락으로 떠내려 노력하던 정우주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들고 있던 볼을 통째로 개수대에 가져가 쾅 내려놓더니 앞치마를 풀었다.
“나 아웃팅 할 때마다 흑역사 생긴 거 알지? 트라우마야. 못 하겠어, 진짜.”
“그럼 그냥 들켜.”
행동과는 다르게 약한 척했지만, 다 받아 주는 이혜수는 더는 없었다. 어림도 없었다.
“하아. 이혜수, 넌 누가 널 싫어했어도, 혐오한 적은 없지?”
“있겠지.”
“누구?”
“윤 회장님.”
“야, 그건 어쩔 수 없는……. 아무튼, 나는 매일 사람들한테 혐오당하고, 거절당해. 근데 다 괜찮아. 어차피 내가 선택한 거고, 완벽한 타인이니까. 근데 강서준한텐 그러기 싫어. 형한테 혐오당하면 진짜 재기 불능일 것 같단 말이야.”
정우주가 버려진 강아지처럼 눈치를 살피며 먼저 제 불행을 고백해 버렸다. ‘그럼 나는?’이라는 물음이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명치끝에 턱 걸려 버렸다.
“너까지 거짓말하게 만드는 건 미안하게 생각하는데, 나한텐 이게 일상인 거 알잖아. 네가 나랑 엮인 이상 앞으로도 그렇겠지.”
매몰차게 구는 걸 어렵게 하는 게 정우주의 능력이었지만, 이혜수는 눈을 마주하고 단연한 태도로 말했다.
“그래도 노력해. 지금처럼 책임지지 못할 일, 만들지 말고.”
혜수는 ‘책임지지 못할 일’의 정리를 거들었다. 우주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엉망이 된 재료들을 모아 버렸다. 가장 큰 거짓말은 꼭꼭 숨긴 채 말을 돌렸다.
“이제 새 시즌 촬영 시작할 거라 바빠질 거야. 촬영하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집에 못 들어오는 날도 많을 거고…….”
뜯지 않은 아스파라거스 아래에서 우주의 휴대폰이 울렸다.
“네, 3분 안에 나갈게요.”
짧은 통화를 끝으로 또 정리하려기에 말렸다.
“매니저님이지? 내가 할 테니까 나가 봐.”
“아직 시간 있어. 이 형은 맨날 짜증 나게 일찍 오네.”
“네가 이렇게 늦장 부리니까 그렇지.”
말도 안 듣고 성급하게 움직였다. 아슬아슬하다 싶었는데, 유리로 된 밀폐 용기를 바닥에 떨어뜨려 버렸다. 하필 혜수가 저번에 접시를 깨뜨린 그 자리였다.
“아…….”
우주가 산산이 조각난 잔해에 탄식하며 갖은 인상을 썼다.
“3분 다 됐어. 내가 할 테니까 나가 봐.”
“이거라도 치우고 나갈게.”
“네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도와주는 거야.”
단호한 말에 우주는 입술을 비쭉 내밀고 사라졌다. 입술이 튀어나온 정도로 보아 하루쯤은 말을 안 걸 기세였다.
아직 상처가 남은 손을 보고 경각심을 가지며 조심스럽게 유리를 모았다. 조금 큰 고무장갑을 끼고, 키친타월에 물을 적셔 유리들을 모았다.
신문지 같은 거라도 있으면 수월하게 버릴 수 있을 것 같아 몸을 일으켰는데,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걸 다시 떨어뜨렸다.
입구에 서준이 삐딱한 자세로 서 있었다. 어제와 같은 근사한 슈트 차림으로.
“조금만 더 있으면 집안 살림 다 박살 나겠네.”
“기척 좀 내요.”
“왜? 비밀 얘기라도 했어? 움직이지 마. 또 피 보기 싫으니까.”
재킷을 바닥에 던져두고, 소매를 접으며 다가왔다. 엉망인 조리대를 보고 혀를 찼다.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에 괜찮다고 할 타이밍을 놓친 혜수가 굳어 버렸다. 서준은 고무장갑을 벗겨 버리곤, 익숙하게 등과 오금 아래를 안아 올렸다. 작은 몸뚱이에 평소보다 힘이 들어갔다.
“왜 이렇게 긴장해?”
그제야 숨을 내쉰다.
“혼자 걸을 수 있는데 자꾸…….”
거실 소파에 앉혀 주며 쌍꺼풀이 드러나는 눈 한쪽을 찡긋거리며 웃더니 혜수의 오른발을 제 허벅지 위에 올렸다. 혹시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하더니 흰 발등 위에 소리 내어 입을 맞췄다.
움찔거리며 다리를 접었지만, 시선은 더 지독하게 좇아왔다.
입매가 매끈하게 올라가는데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괜히 입을 열었다간 뭔가 들켜 버릴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움직이는 것도, 숨을 내쉬는 것조차 의식됐다.
그 순간, 서준의 얼굴은 돌연 차갑게 식었다. 재빠르게 손을 뻗더니 고개를 억지로 숙이게 했다.
“왜, 왜 이래요?”
“우리 작가님, 정말 말 안 듣는다. 피 보기 싫다니까 기어코 보게 하네.”
밑에 있던 그의 손바닥 위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아……. 그냥 비켜 줘요.”
이 남자가 제 말을 순순히 들어주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밀어냈다.
“고개 들지 말고, 천천히 일어나.”
물론 통하진 않았다.
다행히 많이 나는 건 아니었지만, 남의 손바닥 위로 피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민망했다. 발등에 입술이 닿았을 때보다 훨씬.
서준은 혜수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우주의 방으로 데려가 노란 조명이 켜 있는 욕실까지 끌고 들어갔다. 세면대의 물을 틀어 얼굴을 몇 번 닦아 내자 코피는 다행히 금방 멈췄다.
찬찬히 고개를 들었더니 거울 안엔 괜찮은지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언제 봐도 지나치다 싶을 만큼 근사했다.
정신을 차리고 인중에 희미하게 묻어 있는 피까지 다 닦아 낸 혜수는 서준의 손을 잡아당겨 물에 가져다 댔다. 세정제를 묻혀서 미끌미끌하게 거품을 내고 손을 씻겨 주는 행위가 어딘가 야릇했다. 더한 것도 했으면서.
“전부터 얘기하고 싶었는데 세컨드치고 서비스가 너무 과하네요. 위에 가방, 다 뭐예요?”
“전에 망가뜨렸잖아. 임자까지 있는 분인데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급하게 준비한 건데 마음에 들어?”
“망가뜨린 옷도 그쪽이 사 준 거였잖아요. 과해요.”
“그럼 내가 뭐라도 받으면 공평해질까?”
퍽 야하게 웃으며 제 입술을 핥아 올리는 남자 때문에 정성스레 손을 씻겨 주다가 황급히 그만뒀다.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혜수가 제 손을 헹구고 수건에 닦더니 제법 단호한 표정을 했다.
“기대하지 말아요. 오늘은 절대 안 할 거니까.”
“기대 안 했는데 그렇게 보니까 하게 되네. 아쉽지만 오늘은 하지 말자. 또 코피 날라. 나도 일정 있을 땐,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너랑 닿으면 종일 시도 때도 없이 미칠 것 같아. 지금도 봐.”
그가 하반신을 밀착시키려 했다.
“미쳤……어요?”
“오늘은 손 씻겨 준 것만으로 만족할게. 서비스로 립스틱 바른 입술 내주면 더 좋고.”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 주면 좋으련만. 사람 민망하게 평소에 하지 않았던 짓을 짚고 넘어갔다.
딩동!
점점 뜨거워지려는 분위기를 망치려는 듯 누군가 벨을 눌렀다. 불길한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