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
샤워하자 술이 깼다. 자기가 저지른 짓들이 하나둘 되새겨졌다. 한심했다. 엄마에게 남은 화를 술로 푸는 것도 모자라 취해서 섹스로 화풀이했다는 게 너무 한심했다.
“미친…….”
결코 이용할 생각 없었음에도 남자의 말대로 돼 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그 대상이 되는 서준은 감정적인 소모나 상처를 받은 것 같진 않았지만…….
‘이래 봬도 내가 온실에서 곱게 자란 편이라 방치 플레이는 안 맞거든. 혼자 두고 나갔다 왔으면 물도 주고, 햇빛도 주고, 바람도 쐬어 주고, 말도 좀 걸어 주면서 관심도 줘야 해.’
얼굴을 벅벅 닦아 내며 나오려는 웃음을 씻어 냈다.
이대로 살다 보면 도대체 끝엔 어디로 흘러갈까.
정우주와의 가짜 연애를 이어 가고, 서준과 몸을 섞다 보면 그 결말은 어디일까.
우주에게 사실대로 말하라고 했지만, 그를 핑계로 막아서고 있던 서준을 끝까지 밀어낼 자신도 없었다. 그는 길을 찾아 줬고, 여러 번이나 구해 줬다.
섹스뿐만이 아니었다. 깊어지길 두려워했지만, 이미 좋아하고 있었다. 아주 많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숨만 쉬어도 위로가 된다고 말해 주는 남자에게 크나큰 위로를 받고 있었다.
욕실에서의 상념은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고, 세탁기를 돌리는 동안에도 이어졌다.
엉망인 거실을 마주하자마자 쥔 것 하나 없이 비루한 끝이 떠올랐다.
며칠을 그려 냈던 종이는 결국 이렇게 쓰레기로 남았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릴 시간이 없어서, 여유가 없어서라는 핑계는 더는 통하지 않았다. 좋은 성적과 상을 받고, 사람들에게 내보이며 전시회까지 열었던 이혜수는 죽어 버렸다.
죽지 못해 사는 이 정도의 절망, 현실은 딱 그 정도였다.
창밖은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다행히 비관은 길지 않았다. 더러워진 붓을 닦고, 물감의 뚜껑을 닫아 구석에 차례차례 쌓았다. 덤덤하게 종이를 구기고 엉망이 된 바닥을 닦았다.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여러모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새벽까지 이어졌다. 고요한 어둠이 내려앉은 집은 그림 그리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스케치북에 콩테로 선을 그렸다. 일직선으로 쭉 긋기도 했고, 마구 뻗어 나가는 곡선, 원과 구, 예전 전시 주제였던 식물의 잎과 줄기도 그렸다.
인체 공부 할 때 30초 크로키를 연습했던 것처럼, 흐름을 느꼈다.
이상했다. 오랜만에 손에 힘이 생겼다. 아니, 힘이 넘쳤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또 손이 아파 오긴 했지만, 평소보다 긴 시간 동안 그릴 수 있었다.
타이머를 확인한 혜수의 눈이 반짝였다.
5분 23초.
붓을 들고, 유화 물감으로 그린 것도 아니었지만 나름 신기록이었다. 그때, 콩테를 가장 밑에서 지지하고 있던 새끼손가락이 위로 툭 튀어나왔다, 다시 곱았다.
“으윽!”
긴 시간만큼이나 큰 고통이 몰려왔다. 집채만 한 파도가 몸을 덮치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통증이 혜수의 손과, 전신을 덮었다.
손을 안고 바닥에 누워 데굴데굴 굴렀다. 눈물이 찔끔 맺혔지만, 그런데도 기뻤다.
“하아…….”
고통이 멎자마자 다시 콩테를 잡았다. 흡사 광인 같은 모습이었다.
손끝에 자잘한 요철이 느껴질 정도로 투박하고, 두꺼운 스케치북을 문지르다가 손의 떨림이 멎자마자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갔다. 정신없이 그리기 시작했다.
그랑 쥬떼(grand jeté_발을 바꾸어 점프하면서 공중에서 다리를 길게 뻗는 발레의 동작), 엎드려 있는 사람, 발차기, 기도하는 사람을 그려 냈다.
대담하고 날카로운 선. 그 재료가 분명히 다르긴 해도 혜수가 그려 내던, 혜수의 선이었다.
그 짓을 몇 번이나 반복하다가 다시 아픈 손을 꾹 붙잡고, 손등의 얇은 피부를 꽉 깨물기까지 했다. 고통을 잊으려 더한 고통을 주자 잠깐이나마 괜찮아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옆얼굴을 그렸다.
앞머리를 넘겼을 때 보였던 이마와 날렵하고 오뚝한 콧날, 인중과 입술, 귀 아래로 적당하게 떨어지는 턱. 그의 오른쪽 얼굴을 떠올리며 불거지는 눈썹 뼈와 쌍꺼풀 있는 눈까지 완성해 냈다.
호흡이 가빠질 정도로 빠르게, 집중해서 그려 냈다.
아픔이 몰려오기 전에 먼저 손을 그러잡았다. 왼손 안에서 꼼지락대던 오른손이 뒤늦게 아파 오기 시작했다.
“하아…… 하…….”
혜수는 자기가 그려 낸 것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내려다봤다.
3년 만에, 처음 보는 가능성. 기쁨에 온몸이 떨렸고, 온몸이 다시 땀에 흠뻑 젖었다. 아픈 줄도 몰랐다. 미숙하긴 해도, 작품이라고 부르기에 어림없는 연습작이긴 해도 엄연히 3년 만에 해낸 ‘완성’이었다.
그때, 계단 밑에서 조용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정우주의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혜수는 부르지 않았음에도 밑으로 달려갔다.
후다닥 내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란 서준이 한 걸음 물러났다.
“무슨 일 있어?”
혜수는 계단 두어 개를 남겨 놓고 폴짝 뛰더니 안겨 왔다. 서준은 가느다란 몸을 온전히 받아 내고, 균형을 잡기 위해 살짝 돌렸다.
기뻐서 흥분한 이혜수, 그런 여자가 좋은 강서준.
“술 덜 깼어? 다치면 어쩌려고.”
괜히 좋으면서도 위험한 행동을 꾸짖었지만, 몸을 떼어 낸 혜수는 행복한 표정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나 그렸어요.”
“뭐?”
“다시 그렸어요!”
갑작스러운 행동에 어안이 벙벙한 서준의 손을 잡아 2층으로 이끌었다.
바닥에 둔 그림을 자랑스레 보여 줬다. 그가 바닥에 주저앉아 그것들을 감상하자, 옆에 무릎을 꿇고 따라 앉았다.
“맨날 2분, 3분씩 그렸는데 오늘 5분도 넘게 그렸어요. 종이를 다 채웠어요. 그리고 싶은 만큼 그렸어요. 3년 만에 처음이에요.”
너무 기쁜 나머지 어울리지도 않게 호들갑을 떨었다.
“손에 막 힘이 넘치는데, 이런 게 너무 오랜만이라 이상해요.”
그림을 차례차례 살피며 집중하는 서준의 옆얼굴을 문득 바라보다가 순간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늦었다. 남자의 옆모습을 그린 스케치를 보던 그가 고개를 돌리곤 피식, 웃었다.
“실물보다 훨씬 나은 것 같다.”
“그, 이건…… 제일 마지막에 본 사람이 서준 씨라서……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린 거지, 별 의미 없어요.”
당황하여 상기되는 얼굴을 보고 입을 가리더니 킥킥거렸다. 다시 취한 것처럼 빨개지는 모습을 보고 참기 힘들었는지, 나중엔 결국 쾌활하게 웃어 버렸다.
“……그런 거 아니라고요. 아!”
몸을 돌려 도망가려던 혜수를 붙잡아 뒤에서 끌어안았다. 한쪽 팔은 가슴 위를 지나 어깨를 붙잡았고, 또 다른 팔은 가슴 아래 늑골을 지나 틈이라곤 없이 감싸 안았다.
“너랑 있으면 정신을 못 차리겠어.”
등 뒤로 느껴지는 심장 박동에 졸지에 혜수까지 두근거렸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거 알면서 자꾸 욕심이 나.”
애매하게 떠 있던 손을 들어 그의 오른쪽 얼굴을 만졌다.
“네가 이렇게 나만 봤으면 좋겠어. 나만 그렸으면 좋겠어.”
손으로 얼굴을 당기고, 고개를 틀어 올려 긴한 고백을 속삭이는 입술에 조심스레 먼저 입을 맞췄다. 마주한 시선 끝에 뚜렷한 이유 없이 울음이 차올랐다.
품에 안긴 채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목에 팔을 두르고, 매달려 그의 입술을 물었다. 인내심 없는 눈물이 결국 볼을 타고 떨어졌다. 그러자 날개 뼈와 등을 잡은 남자가 조심스레 눈물이 지나간 자리 위로 입술을 가져다 댔다.
다 말랐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이상하게 이 남자 앞에선 쉽게 흘렀다. 투정 부리는 것처럼 꼭 끌어안자 서준이 혜수의 목을 부드럽게 깨물었다.
“잠깐만요! 그만, 나 진짜 힘들어요. 우리 벌써 몇 번이나…….”
“난 두 번밖에 안 했어. 흥분은 이혜수 혼자 다 했지.”
“그건 서준 씨가 자꾸……!”
“알았어. 만지기만 할게.”
거짓말과 죄책감으로 만들어진 둘 사이의 벽은 이제 종이 한 장이나 다름없었다.
벅찬 제 감정이나 마음을 표현할 수 없는 지금.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틈날 때마다 그저 열심히 서로의 몸을 만지는 것밖에 없었다.
#8. 발각
쿵! 쿵!
반복되는 타격음에 눈을 떴다. 밤을 새운 탓인지, 격한 섹스 때문인지 몰라도 혜수는 푹 자고 일어났다.
“흐음.”
어제 하도 소리를 질러서 목이 쉬었다. 머리는 여전히 멍했지만, 계속 땀을 흘린 덕인지 숙취는 없었다. 씻고, 침구를 정리했다.
푸석푸석해 보이는 거울 안의 얼굴을 보다가 간단하게 화장을 했다.
아무것도 없는 휑한 방 안을 둘러보다가 시계조차 없다는 걸 깨달았다. 휴대폰이 어디 있는지 찾아볼 자신이 없어서 카디건만 어깨에 두르고 방을 나섰다.
문을 열자마자 나타난, 어제와 다른 풍경에 멈칫거리며 한 발짝 물러났다.
“이게 뭐야?”
작은 종이 가방들이 방문 앞에 반원 모양으로 옹기종기 놓여 있었다. 안에는 여러 옷가지와 편한 신발이 들어 있었다.
처음엔 정우주를 의심했지만, 모양새와 내용물을 보고 서준이 한 짓임을 알아차렸다. 도톰하고 부드러운 원피스, 티셔츠와 편한 옷들, 카디건과 얇은 점퍼가 여러 벌. 또 퍼가 붙어 있는 동그란 모양의 슬리퍼는 제 발에 딱 맞았다. 어디 그것뿐일까. 크기가 딱 맞는 예쁜 속옷들까지 들어 있었다.
무릎을 안고, 깜짝 선물들을 구경하던 혜수는 어이가 없어 조금 웃었다.
어떻게 돌려줄까 고민하던 찰나 마지막 종이 가방에 들어 있는 쪽지 때문에 더 크게 웃어 버렸다.
「환불 불가능」
혜수의 반응까지 예상했다는 듯한 단호한 글씨체에 몸을 더욱 웅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