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우는 소리를 내던 우주가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문을 열었다.
“혜수야, 이혜수!!”
도로를 따라 올라가려던 혜수가 그의 부름에 멈추었다.
“오지 마!”
“내가…… 내가 잘못했어. 두 번 다시 안 그럴게. 무알코올 마셨는데도 취했나 봐. 헛소리했어. 미안해.”
혜수는 어쩔 수 없이 꺼져 가던 생명을 떠올렸다. 간절하게 살고 싶어서 목숨을 구걸했음에도 그러지 못했던 상대를 알고 있었다.
물론 그가 이렇게 망가지게 된 것에 환경이 적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친한 친구이자 가족이었던 은재의 죽음, 아웃팅 한 동시에 친모에게 버려졌다는 사실에 우울을 안고 시작한 술이 문제였다.
정 남매의 모친은 애초에 집안의 과도한 억압을 견뎌 내고, 두 자식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일찌감치 홀몸으로 정 남매를 낳았고, 윤 회장에게 버리고 사라졌다. 그 이후로 연락이 이어지긴 했지만, 우주가 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철저하게 배척했다. 한 번 더 확실하게 버렸다.
“잘못했어. 앞으로 아무 말 안 할게. 어머니 연락도 안 받을게! 술도 진짜 끊을게!”
그렇다고 그의 불행이 자신을 괴롭힐 핑계는 될 수 없다는 걸, 이혜수는 이제 안다.
“나쁜 새끼.”
정우주는 끝까지 자신을 구해 주고, 버리지 않는 이혜수가 필요했다. 확인받고 싶었다. 아직 죽으면 안 된다고, 쓸 만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해 줬으면 했다.
그나마 연기를 시작한 이후, 사람들의 애정과 관심을 받으며 괜찮아졌지만, 그것도 잠시. 연기력 논란과 수만 개의 악성 댓글로 다시 망가진 건 순식간이었다. 사업 실패로 인해 처음 겪어 보는 경제적 실패는 절망을 불타오르게 했다. 상담과 약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의욕 없는 그를 구원해 주진 못했다.
채울 수 없는 갈증과 사랑은 저 아래 어딘가, 깊은 곳부터 시작된 뿌리 깊은 문제였다.
우주는 허공에 팔을 허우적대며 다가갔다. 작고, 가녀린 몸을 끌어당겼다.
“버리지 마. 버리지 마. 나 버리지 마.”
결국 이번에도 혜수는 정우주를 버리지 못한다. 은재와 셋이 함께했던 추억들 때문일 것이다. 은재를 상실하고, 지나간 계절들이 둘을 관통했기 때문이었다. 은재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운전 내가 할 거야.”
또 혼자서 앞서 나가는 이혜수를 보고 우주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짜증 나고, 불안했다. 자꾸만 안 하던 짓을 한다. 견고하게 쳐 놓은 경계를 벗어나려 했다.
“혜수야, 야! 이혜수!”
차에 타자마자 혜수의 몸에 맞춰 시트가 움직였다. 결의에 찬 표정으로 핸들을 양손으로 붙잡자 우주는 하는 수 없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우렁찬 배기음을 내며 rpm이 미친 듯이 올라갔다. 우주는 벨트를 하고도, 손잡이를 꽉 붙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살살 해! 살살!”
“정우주, 강서준 씨한테 우리 사이 얘기해.”
“뭐?”
“그 사람한텐 금방 들킬 거야.”
“……왜? 형이 뭐라고 해? 어?”
“아무 말 안 했어. 근데 우리가 아무리 숨겨도 그 사람은 결국 알아차릴 거고, 들킬 거야. 그것도 아주 추하게. 그러니까…… 더는 거짓말하기 싫어.”
급하게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느라 우주의 어깨가 차창에 부딪혔다.
“알았으니까 핸들 잡고 화내지 마.”
***
외출 준비를 마치고 나온 서준은 습관처럼 본채의 2층부터 쳐다봤다.
낮이든 밤이든 작업을 하는 동안엔 늘 밝은 조명을 켜 두었기에 밖에서도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었다.
혜수가 윤 회장과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굳이 현진에게 명의까지 빌려서 일을 벌이지 않아도 지난날 제 아버지에게까지 뻗쳤던 윤 회장의 마수가 이혜수에게도 적용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라는 의심과 동시에 혹시나 앞으로 자기가 벌일 일 때문에 이 여자가 또 상처받을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됐다. 이혜수를 제외한 옳고 그름은 나중 문제였다.
별채 옆의 난 작은 대문으로 나가도 바로 차에 탈 수 있었지만 부러 본채로 출입하는 일이 최근 그의 새로운 습관이었다. 치밀하게 신발 몇 켤레까지 신발장에 넣어 두었다.
결코 좋은 집주인이 할 짓은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여러모로 수상하기 짝이 없는 정우주의 행태를 살피고, 이혜수와 우연히 마주치고 싶은 마음에 자연스레 정원을 가로질렀다.
냉기에 잠든 누런 잔디밭을 지나 소리 없이 열리는 문을 연다.
잠적한 집 안 거실에는 정우주가 늘 어깨 위에 달고 다니던 블랭킷과 과자 봉투, 캔 음료 따위가 뒹굴었다. 며칠 동안 혼자 여기서 상주하다시피 하며 낄낄거리고, 노는 것 같더니 엉망이었다.
계단 쪽을 올려다봐도 인기척 없이 조용했다. 기대를 버리며 현관으로 몸을 돌리는데 부엌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 이혜수가 있었다.
그 뒷모습에 반가움도 잠시, 위스키를 병째 들이켜는 걸 보고 기겁했다. 누가 왔는지도 모르고 목을 축이던 혜수의 술병을 단번에 빼앗았다.
“작가님, 지금 몇 시게?”
묶인 머리가 거의 풀려 있었고, 입고 있는 옷은 하얀색 트위드 소재의 원피스였다. 마시다 흘렸는지 가슴께는 술 색으로 젖어 있었다.
“……당신이 무슨 상관인데?”
풀린 눈동자로 헤실거리더니,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며 짜증 냈다. 아무래도 오후 3시의 이혜수는 다른 사람인 모양이었다.
“왜 상관이 없어? 명색이 세컨드인데. 근데 얼굴은 또 왜 이러지?”
고개를 잡아 이리저리 돌리자 짜증스레 팔을 치워 냈다. 분명 맞은 상처다.
팔을 뻗어 술병을 빼앗으려 시도했지만, 실패하자 폴짝폴짝 뛰기까지 했다.
이미 병이 바닥을 보이는 걸 보아하니 취한 건 확실했다. 심하게 귀여운 걸 보아하니 그것도 상당히.
“내놔!”
“또 ‘엄마’라는 사람한테 맞았어?”
“그런 참견 하지 말라구. 나한테서 관심 꺼. 그냥…… 적당히 섹스나 해요.”
전보다 더 부은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로 야릇하게 웃으며 가슴팍을 훑었다.
자세한 속사정은 몰라도 상황은 불 보듯 뻔했다. 속상하고, 열받아서 만취하고 그 끝에 섹스를 바란다는 게 좀 속상했다.
“일부러 상처 주려고 한 거면 성공했어.”
서준의 말에 혜수는 취했다는 핑계로 잘난 얼굴을 쳐다보다가 술기운을 흘리며 돌아섰다.
휘청거리더니 몇 걸음 가지 않아 무너졌다. 서준이 혜수의 허리를 미리 붙잡았기에 망정이지 넘어질 뻔했다.
“하아, 그냥 나 좀 놔요. 내버려 둬.”
취기와 한숨 섞인 애원을 가만히 듣다가 일으켜 세웠다.
로니아 12년산, 놀랍게도 데나로에서 제조한 저숙성 위스키였다. 이런 식으로 흔적을 마주한 게 썩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일단 이걸 한 번에 들이켠 이혜수가 문제였다.
마시면서 흘렸다고는 해도 40도짜리 술을 부어 댔으니 식도가 뜨거울 것이다.
서준은 적당히 팔 닿는 곳에 술병을 치웠다. 혜수의 팔을 잡아 천천히 뒤로 밀어서 냉장고 한편에 기대게 한 뒤, 생수를 꺼내 건넸다.
“마셔.”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인상을 쓴다. 아무래도 점점 취하는 모양인지 눈빛이 흐릿해졌다.
“입으로 먹여 줘?”
못 이기는 척 양손으로 꼭 붙잡고 들이켰다. 저 손에 다른 걸 쥐여 주고 싶다는 음험한 충동이 일었지만 이혜수는 아무것도 모르고 인상을 썼다.
“후으……. 근데, 왜 자꾸 나한테…… 반말하지?”
“뭐 예쁘다고 존댓말을 할까.”
“으, 재수 없어.”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잔뜩 얼굴을 찡그렸다. 혀는 꼬인 주제에, 더할 나위 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게 웃겼다.
“웃지 마, 씨…….”
“웃어도 안 돼? 내가 안 웃고, 존댓말 하면 뭐 해 줄 건데요?”
야한 생각을 담은 눈가가 또 나른하게 길어졌다.
“뭘 원하는데?”
붉은 입술이 오물오물할 때마다 그냥 콱, 물어 버리고 싶었다. 물고, 빨고 하다가 숨이 모자라서 씩씩거리면 살살 달래 주는 척하다가 그대로 덮쳐 버리고 싶었다.
갖은 충동을 삭히면서도 일단 목을 조르는 단추 하나를 풀었다.
어차피 기억도 못 할 것 같은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다가도 이대로 놓아주긴 싫었다. 아침에 나눈 짧은 섹스론 부족하기도 했고.
“이래 봬도 내가 온실에서 곱게 자란 편이라 방치 플레이는 안 맞거든. 혼자 두고 나갔다 왔으면 물도 주고, 햇빛도 주고, 바람도 쐬어 주고, 말도 좀 걸어 주면서 관심도 줘야 해.”
혜수는 피식거리더니 푸흐흐, 하고 웃으며 가슴을 때렸다.
그러더니 대뜸 그 작은 손이 서준의 벨트 아래로 쑥 내려갔다.
“이런 거?”
이번엔 고개를 번쩍 들고, 퍽 귀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미칠 것 같았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눈앞에서 환희의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대로 날아갈 것 같은 이성의 끄트머리를 간신히 붙잡았다.
“책임도 안 질 거면서 자꾸 키우지 마.”
말은 그렇게 하면서 몸을 밀착시켰다.
정말 오랜만에 깜짝 놀란 서준이 혜수의 양 손목을 붙잡아 냉장고에 고정했다.
“만취하면 이렇게 위험해지는구나.”
평소엔 놓으라거나, 하지 말라고 버둥거리더니 지금은 냉장고에 머리를 기대며 씩 웃는 여유까지 보여 줬다. 가장 큰 약점을 잡고, 희롱하면서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 게 희대의 악녀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잔뜩 취해서 맞은 얼굴로 유혹하는 게 뭐 좋다고 금세 피가 쏠렸다. 쉽다. 참 쉬웠다.
“미치겠네.”
그러든 말든 혜수는 발뒤꿈치를 들고 입술까지 비볐다. 입술에 닿지도 않아 턱에 하는 입맞춤이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손으로 허벅지 뒤를 잡고 번쩍 안아 올렸다.
“꺅!”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면서도 이젠 익숙하게 목뒤로 팔을 두르고, 체중을 실었다.
첫날처럼 아일랜드 테이블 위에 앉혀 주자마자 제대로 입을 세게 맞춰 왔다. 살짝 아프긴 했지만, 흥분에 그딴 건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다만, 여자의 부은 볼이 아프진 않을까 그쪽으로 닿지 않게 계속 신경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