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곧 정우주의 지인이라는 사람이 나와 소고기 부위를 일일이 소개하고, 구웠다. 최첨단 시스템을 이용해 냄새와 연기를 다 잡아 준다고 했지만, 듣는 사람은 숙현이 유일한 것 같았다.
“그나저나 하실 말씀이란 게…….”
황 비서의 물음에 혜수가 숙현을 매섭게 쳐다봤다. 그 사나운 눈빛을 애써 모르는 척 누르며 비실비실 웃다가 진심을 토해 냈다.
“이렇게 된 거 비서님께는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름이 아니옵고, 사업을 하나 하고자 하는데 회장님 곁에서 시작하고 싶습니다. 혜수 얘한테는 아무리 말을 해도 제가 고생한다고 들어 주질 않고, 사업부에 직접 연락해 볼까 했지만…… 어르신 위신에 폐를 끼칠까 그러지 못했습니다.”
종국엔 저 말이 나오고 말았다. 혜수가 젓가락을 소리 내어 내려놓자, 숙현이 소리치듯 꾸짖었다. 별로 본 적 없는 엄마 노릇이었다.
“이혜수! 어른들 앞에서 무슨 짓이니!”
당황한 정우주가 어색하게 웃으며 혜수를 변호했다.
“흐흠, 어머니. 혜수가 기분이 별로 안 좋아요. 아까 마시던 음료라도 다시 시켜 줄까. 새콤한 거 좋아하잖아.”
그러자 숙현이 천연한 척 질문했다.
“혜수가 새콤한 것을 먹는다고? 신 거 싫다고 귤도 잘 안 먹던 애가 어쩐 일이니.”
“아녜요, 어머니. 혜수가 밥을 안 먹어서 그렇지 달고 신 건 잘 먹어요.”
“임신은 아니지?”
“푸훕!!!”
말도 안 되는 단어에 우주가 먹던 음료를 뱉어 냈다. 다행히 옆에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으니 망정이지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캑, 크흑, 커헉……!”
가슴을 마구 두드리자 놀란 숙현이 물잔을 건넸다.
“아이고, 우주야. 괜찮니? 미안하구나. 괜히 나 때문에 놀랐구나. 비서님,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이렇게 주접을 떱니다. 어르신껜 비밀로 해 주셔요.”
“아하하, 아닙니다.”
황 비서는 혜수의 눈치를 살피며 어색하게 웃었지만, 숙현의 얼굴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두 손을 기도하듯 잡으며 좋다는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요즘은 흉도 아니잖아.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죠?”
네모난 식탁 위에서 벌어지는 촌극에 어이가 없었던 혜수는 대놓고 코웃음 쳤다. 그 태도에 세 사람이 당황했다.
“그만하시죠.”
“……이, 이혜수. 안 되겠다. 황 비서 아저씨, 어머님. 혜수 상태가 안 좋아서 먼저 갈게요.”
우주가 테이블 위에 올려 뒀던 손목을 붙잡자 혜수가 뿌리쳤다. 다른 사람 같은 행동에 숙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황 비서님이 어련히 알아서 회장님께 전달하시겠지만, 저희 엄마, 아시다시피 책임감이 탁월하신 분은 아니에요.”
“이혜수!!”
“그리고…… 임신? 정우주랑 죽을 때까지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늘 고개를 푹 숙이고, 순순히 경청하고, 말 잘 듣던 이혜수가 더는 아니었다.
윤 회장을 대신해 자리를 채우고 있던 황 비서는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혜수를 보고 정우주는 너무 놀라 붙잡지도 못했다. 당황하던 숙현이 무서운 얼굴로 그 뒤를 쫓았다.
혜수는 화장실로 들어서자마자 제일 가까운 칸으로 들어가 조금씩 먹었던 것을 모두 게워 냈다. 문도 잠그지 못했다.
“허억, 허…….”
여러모로 개운했다. 손등으로 입을 닦아 내고 나가자 숙현이 세면대를 붙잡고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은 눈을 하고, 거울 안의 혜수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다른 칸들의 문을 일일이 열어 누가 있는지를 확인했다.
쾅, 쾅, 쾅!!
이어지는 날벼락.
“너 미쳤어?!”
귀를 찢을 것 같은 호통에도 혜수는 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헹구고 손을 닦았다. 아무렇지 않아 하는 얼굴에 더 열이 받은 숙현이 딸의 머리채를 잡았다. 어마어마한 악력에 고개가 뒤로 휙 넘어갔다.
“놔.”
“미친년이 제 팔자도 모르고 굴러 들어온 복을 발로 차도 유분수지. 네가 배가 덜 고팠지? 어?! 제 엄마가 먹고살 길 찾으려고 빌빌 기면서 애쓰면 옆에서 도와줘도 시원찮을 판국에 그 지랄을 떨어?!”
어릴 때 같이 살던 할머니, 아빠, 은재와 그 가족들……. 혜수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걸 보고, 숙현은 늘 혜수의 팔자 탓을 했다. 사고와 후유증, 수술 때문에 몇 달 동안 병원에 있을 때도 곁에 앉아서 그 소리를 했다.
“내가 정우주랑 엮인 마당에 엄마가 뭐 하나라도 받아 내려고 기를 쓸 거라는 거, 예상 못 했을 것 같아? 근데 엄마나 이혜균, 콩고물 하나 못 받아. 내가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엄마가 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맞을 때 반항이라도 해 보지 그랬냐고 쉽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숙현은 운동선수 출신에 지나치게 정정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제 딸의 머리를 붙잡아 끌어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 내팽개쳤다.
무력하게 넘어졌다. 그러자 이번엔 손을 들어 뺨을 내려쳤다.
피할 수 있었지만, 혜수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순순히 얼굴을 내주었다.
피부가 찢어지는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고개는 돌아갔고, 짧지만 강한 고통에 눈앞에 섬광이 지나갔다. 금방 피 맛이 돌았다.
“네 팔자 네가 꼬는 거야! 알아?! 자존심 챙겨서 고귀한 척해 봤자 배만 고플 뿐이라고! 당장 네 아빠를 봐. 능력도 없으면서 애만 낳아 놓고, 죽어 버렸잖아. 내가 그때…… 하아, 너만 없었으면. 너만 없었으면 내가 지금쯤……!”
혜수를 가진 핑계로 운동을 그만둬야 했던 마음을 이럴 때 토해 내며 다시 손을 올리던 그때였다.
“어머니!!”
화장실 문 밖에 식당 직원과 정우주가 아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우, 우주야.”
“이혜수, 괜찮아?!”
“그게, 우주야! 엄마 말 좀 들어 봐. 그게 아니고 우주야, 혜수가…….”
“오늘은……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죄송하지만, 모시고 나가서 택시 좀 잡아 주세요.”
우주의 부탁에 옆에 있던 직원이 숙현을 잡아끌고 나갔다.
“이거 놔 봐, 내 말 좀 들어 봐! 우주야!”
정우주가 부은 혜수의 얼굴을 붙잡고 이리저리 돌려 확인했다.
“너 미쳤어? 왜 맞고만 있어?!”
“너 보여 주려고.”
“뭐?”
“다 봤지?”
늘 부드럽게 휘던 눈가가 표독해졌다. 고통을 참으려는 듯 입술은 떨렸다.
“이혜수, 너 진짜……. 왜 이래! 어? 이러지 마.”
“아까도 말했지만 이게 나야. 그리고 저게…… 내 엄마라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정우주, 정신 차려. 네가 꿈꾸는 모정, 그런 거 없어. 난 오늘 이후로 엄마랑 다 끊어 버릴 거야. 너도, 너 버린 엄마 잊어버려.”
바닥에서 일어난 혜수가 금방 부어오르는 얼굴을 찬물로 씻어 냈다. 엉망인 머리에 물을 묻혀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정우주는 여자 화장실 바닥에 넋을 놓고 주저앉았다.
자리로 돌아온 혜수의 몰골을 보고 황 비서가 사레가 들려 캑캑거렸다.
“자, 작가님. 그렇게 몸 바쳐 애쓰지 않으셔도 우리 회사는 가맹점 쉽게 내주지 않습니다. 회장님 성격 아시지 않습니까.”
“엄마한테는 그런 게 말로 안 통하거든요.”
“어머님 일은 그렇다 쳐도 제발 윤 회장님한테까지 이러진 말아 주십시오. 순순히 굴면서 받을 것 받는 게 몸도 마음도 편하지 않겠습니까.”
“받은 건, 이미 제 병원비로 분에 넘쳤습니다. 제 대출금까지 갚아 주신 건 과한 처우였죠.”
오면서 확인했다. 매달 대출 잔액만 알려 주던 은행에서 ‘완납’에 관한 메시지가 왔을 땐 믿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거라 생각해 연락했지만 깨끗하게 0원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완납 증명서가 필요하냐고 물어 왔다.
“실은 제가 오늘 일부러 회장님을 대신해서 온 건 그 건 때문입니다. 적지만 보상금 정도로 생각하고 받으십시오.”
“보상은 의식주 해결한 거로 충분합니다. 회장님 돈 같은 거 필요 없어요. 곧 갚겠습니다.”
나무 의자가 바닥을 끄는 소리가 이번엔 유난히 크게 들렸다.
“……만나는 분이라도 따로 생기신 겁니까.”
“그것도 회장님 질문인가요? 전해 주세요. 만나는 남자가 한둘이 아니어서 누굴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당차게 자리를 박차고 나서는 혜수의 뒷모습을 보며 황 비서는 다시 차가운 차를 들이켰다. 일이 복잡해질 것 같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뒤늦게 돌아온 우주가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저씨, 어떡하지? 아무래도 이혜수가 미쳤나 봐.”
“예, 아무래도 뭔가에 단단히 홀리신 모양입니다. 도련님, 정신 똑바로 차리십시오. 혜수 아가씨가 입을 열면 가장 손해 보는 사람은 도련님입니다.”
“무슨 일이 생겨도…… 혜수는 나한테 그렇게 못 해.”
***
폭풍 같은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은 적막했다. 이따금 들리는 엔진 배기음 소리와 정우주의 한숨 소리뿐.
“너 진짜 이상한 거 알아?”
“싫으면 지금이라도 네 여친 아니라고 해.”
“이혜수.”
고개를 돌리는 혜수는 정말 다른 사람 같아서 낯설었다. 무슨 일이 생겨도 늘 제 곁에 서서 위로해 주던 얼굴이 아니었다. 언제든 기회만 되면 멀리 떠나 버릴 것 같은 타인 같았다.
“네 말대로 등신처럼 엄마가 주는 불행도 당연하다 여기면서 얌전히 살았어. 근데 이제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아. 안 그럴 거야. 난 이제 제대로 살 거야.”
빨간색 GT 차량이 갓길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멈췄다. 벨트를 했다곤 하지만 예고 없는 짓에 혜수의 몸이 앞으로 크게 흔들렸다. 대시 보드에 코를 박을 뻔했다.
“너 혼자 잘 살면…… 나는? 너 혼자 그렇게 잘 살 거면, 나를 왜 살려? 왜 도와주는데? 술에 취해서 죽든 말든 신경 쓰지 말지! 왜 신경 쓰냐고!! 왜!! 차라리…… 은재 따라가게 두지 그랬어?”
체내에 알코올이 충분히 축적된 사람들은 무알코올 음료를 마신다고 해도 반응할 수 있지 않을까. 감정을 쏟아 내는 정우주를 보고 혜수는 그런 의문을 가졌다.
초점 없이 변한 눈빛, 핸들을 마구 두드리며 화를 내는 그를 보고 과거의 상념이 둥둥 떠올라 혜수의 발목을 잡았다. ‘엄마’와 ‘은재’의 이름을 번갈아 부르며 술에 취해 굴러다니던 그를, 죽을 뻔한 그를, 의지라곤 하나 없이 누워만 있던 그를.
사춘기 소년의 난폭함은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고 사람을 괴롭혔다.
상처받는 일은 왜 익숙해지지 않는 걸까. 당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더는 그의 비뚤어진 절망에 손을 올려 위로하지 않았다. 안아 주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