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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접점-38화 (38/76)

[38화]

따뜻한 물줄기가 두 사람 위로 떨어졌다. 머리를 감고, 보디 샴푸로 혜수의 몸을 닦아 내던 그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부드럽게 들어 올리고 말했다.

“수요일 수업이 뭐야?”

“……궁금한 거 좀 참고,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면 안 돼요?”

“그러기엔 내가 너한테 관심이 많아. 다른 사람 입으로 듣는 게 싫은 것들은 미리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난 결국 알아낼 테니까.”

망설임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대로였다. 그에 못 이기는 척, 혜수는 빙산의 일각을 내보였다.

“말 그대로예요. 우주 외할머님…….”

“제이 윤, 윤 회장.”

“그 댁에서 수요일마다 그림 수업 해 드렸어요. 그게 다예요.”

“그 사람이 널 괴롭혔어?”

서준의 질문에 숨이 막혔다. 따지고 보면 누구도 탓할 것 없었다. 죄책감에 못 이겨서 한 자신의 선택. 혜수가 고개를 저으며 물이 흘러내리는 그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힘주어 밀었다.

“그만. 대화가 너무 일방적이에요. 그쪽 얘기는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나도 그쪽이 누군지 묻고 다닐까요.”

대뜸 약간 부은 입술에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는 것으로 협박을 막았다. 정말 약았다.

“그러진 마. 내가 누군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럼 뭐가 중요한데요?”

“이혜수, 너.”

너스레를 떨며 제 이름을 부르는 얼굴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불도저처럼 몰아붙이면서 정작 자신에 대한 건, 말하지 않는다. 굳이 캐묻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떠날 사람, 종국엔 혼자 남겨져야 했다. 많이 알아봐야 좋을 게 없다고 씁쓸한 결심을 삼켰다.

서준은 제가 남긴 흔적으로 울긋불긋한 몸 여기저기를 거품으로 부드럽게 만져 줬다. 아직 피부에 남아 있는 흥분들이 서준이 손을 댈 때다 튀어나와 움쭉댔지만, 정우주와 엄마가 일방적으로 정한 약속을 지키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다. 물론 그의 손길이 좋기도 했다.

“무서우면 같이 가 줄까.”

의외의 질문에 수건으로 머리를 닦아 내던 혜수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젠 더 잃을 것도 없어서 안 무서워요.”

***

숙현의 갑작스러운 식사 제안에 우주가 급하게 예약한 식당은 광화문 근처였다.

“여기 아는 형이 얼마 전에 오픈한 곳이야. 소고기 오마카세인데, 점심 정식도 잘 나온다고 하더라고.”

“아는 형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네.”

“비꼬냐?”

혜수는 대답하지 않고 멀어졌다.

엄마가 때때로 충동적으로 행동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윤 회장까지 보고 싶다고 말했다는 건, 필시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었다. 얼마 전, 집에서 그 난리를 피우고도 아무것도 받아 내지 못했기 때문에 더 발악할지도 모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출입구를 바로 앞에 두고 우주는 혜수를 붙잡아 세웠다.

“야, 너 진짜 왜 이래?! 그 잘난 예술 활동 때문에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지. 언제까지 나한테 이렇게 성질내고, 짜증 부릴 건데?”

“내가 지금 너한테 화내는 게 내 사정 때문이라고 생각해?”

“아님 뭔데?! 물론 그래. 어머니한테 가방 사 주고, 옷도 사 주고, 돈도…… 드린 건, 아니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이냐? 너한테 갚으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

“앞으로 그 인간들이 더 바랄 거라는 게 문제지.”

혜수가 신경질적으로 빽 소리를 지르자 우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모로코에 다녀온 이후로 어딘가 변했다는 건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었어도 자기에게 이렇게까지 큰소리치는 건 정말 처음이었다. 뒤늦게 사춘기라도 겪는 걸까.

“뭐?”

“내가 분명히 경고했지. 그 인간들한테 조금이라도 틈 주지 말라고. 주면 줄수록 더 바랄 거라고!”

“아, 앞으로 안 그럴게! 그럼 되잖아!”

“나, 네 사생활에 피해 안 주고, 누구한테도 들키지 말고 조용히 있어 달라는 부탁 들어주려고 그 집에 들어갔어. 그때 내가 분명히 부탁했지? 엄마랑 이혜균 모르게 해 달라고. 너한테 그것만은 들어 달라고 누누이 말했어! 그런데 그거 하나를 못 지켜?”

“하아. 미치겠네.”

“네가 제멋대로 한 행동 때문에 난 거기서마저 도망쳐야 해. 알아?!”

“혀, 형이 어머니한테 알아듣게 잘 얘기했다며. 안 오실 거야. 그리고 좀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 집 나와서 사는 딸이 연락도 안 하는데 어디서 사는지 모르시면 얼마나 걱정이 되겠냐?!”

“걱정?! 엄마랑 이혜균이 내 걱정을 하는 것 같아? 그 사람들이 걱정하는 건, 사고 칠 때마다 수습해 줄 사람이고 돈 줄 사람이야.”

그날 강서준이 없었으면 더 심하게 맞았을 것이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기 딸에게 모든 걸 풀어냈다. 제 가난도, 남편이 일찍 죽은 것도, 아들이 무능한 것도 모두 큰딸 탓이었다. 남동생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항도 하고, 같이 때려도 봤지만 소용없었다. 폭력에 오랫동안 세뇌된 몸과 마음이라 그저 받아들이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다 마지막엔 이혜균이 쓰던 야구 배트에 맞아 쓰러졌고, 그대로 집을 나왔다.

나와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화가로 활동하는 내내 생긴 수익이나 기타 수익들을 아버지가 남긴 집이 넘어간단 핑계를 대며 가져갔다.

그때마다 묵묵히 도와준 건,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 때문이었다. 죽어 가면서도 가족들을 잘 부탁한다고 했던 무능하고, 연약했던 아버지.

죽은 사람들 앞에서 이혜수는 늘 약해졌다.

단지 살아남았다는 부채 의식으로 사람들에게 이용당했고, 이용하게 했다. 제가 제 손으로 이룬 명예와 행복조차도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3년 전에 갑자기 망가진 손도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는 아니었다. 더는 남이 원하는 대로, 원하는 걸 쥐여 주며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우주와 대적하는 눈빛이 결연해졌다.

“나도 설마 어머니가 그렇게 바로 찾아갈 줄은 몰랐어. 그건 미안해! 그래도, 좀 적당히 해라. 어? 너 모로코 갔다 오더니 사람 진짜 이상하게 바뀐 거 알아?!”

“……이상하게 바뀐 게 아니고 원래 이게 나야.”

신랄하게 반짝이는 눈빛에 정우주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승강기 문이 열렸다.

“정 서……. 어머나! 너희 싸우니?”

“어머니, 오셨어요? 싸우긴요.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시장하시죠?”

말아 올려서 고정한 머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화려한 차림이었다. 윤 회장을 앞에 두고 기죽지 않으려는 치장이었겠지만 혜수의 눈엔 싸구려처럼 보였다.

제 엄마를 보고 알은척도 하지 않고 식당으로 먼저 들어갔다.

“정말. 쟤 진짜 어쩌면 좋니?”

숙현은 속으로 욕을 씨불였다. 그러고선 우주에게 다가가 완강한 딸 때문에 속상하다는 듯 약한 체했다. 우주 역시 내숭은 마찬가지였다. 활짝 웃으며 팔을 내밀자 여자는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요즘 힘들어서 그러니까 이해하세요. 집에 오셨었다면서요. 저한테 미리 연락하시지.”

“그래. 김치 주러 갔다가 그 집주인인지 뭔지 하는 청년 때문에 깜짝 놀랐지 뭐야. 좋은 데 다 놔두고 왜 하필 그런 산속에 들어갔어? 집은 좋다만.”

“……혜수나 저나 좀 조용하게 있고 싶어서요. 그 형이랑 친하기도 하고.”

“식도 안 올렸는데 같이 사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우리 혜수, 이제 다른 집엔 시집 못 가. 네가 책임져야 해.”

“하하, 어머님도 참. 걱정하지 마세요.”

“네가 고생이 많다. 쟤가 워낙 예민하고, 성질이 더러워서…… 내가 정말 널 볼 면목이 없어.”

“근데 어머니, 외할머님께는 저희 둘이 거기 숨어 사는 거 비밀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머! 어르신, 아직 모르시니?”

“옛날 분이잖아요. 아시면 혼날 게 분명해요. 그래서 더 숨은 것도 있어요.”

“우리 어르신 성격 잘 알지! 사고로 병원비에 재활 치료비까지 다 내주신다고 했던 그때부터 내가 정말 꼼짝도 못 했잖아. 못 받는다고 했는데도 한사코! 한사코 쥐여 주시고, 응?”

꼼짝도 못 한 게 아니고 방관한 거였다. 제 딸이 죽다 살아나고 복구 수술에 재활 치료까지 해야 했지만, 병원비 때문에 차라리 죽지 그랬냐고 욕하던 인간이었다.

윤 회장이 모든 걸 부담하겠다고 나선 후에야 안심했었다. 꼬장꼬장한 노인네라고 욕할 땐 언제고, 큰 어르신처럼 모시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외할머니가 혜수 많이 아끼세요.”

“……다행이네.”

의미심장한 웃음에 화장한 얼굴이 가면처럼 선명해졌다.

***

식당은 군데군데 한국적인 미를 배치한 모던한 분위기였다. 세련된 분위기라 젊은이들과 외국인에겐 통할 것 같았고, 정신없어 보이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시야가 탁 트이는 구조라 시원하긴 했으나 사생활을 중요시하는 이들에겐 부담스러웠다. 그나마 손님들이 몇 없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30분 정도 기다리자 윤 회장을 대신해 비서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허리를 완전히 굽히는 공손한 인사에 숙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만 까닥거렸다.

“회장님이 오늘 중요한 일정이 있으셔서 못 오셨습니다. 매우 죄송해하시는지라 송구하지만, 제가 대신 왔습니다. 하실 말씀은 책임지고 전달토록 하겠습니다.”

“아이고, 호호. 그러셨구나. 제가 갑자기 말씀드리긴 했지요. 우리 혜수는 연락을 안 받고…… 우주도 휴가가 오늘까지라고 그래서 내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그러지 말고, 비서님도 앉으셔요. 시장하시죠?”

“예? 아, 저는 괜찮습니다.”

당황한 황 비서가 손을 내저었지만, 숙현이 그의 팔을 잡아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물을 꿀꺽꿀꺽 소리 내어 들이켜던 그가 눈동자를 굴려 우주를 쳐다봤다.

“왜요? 이거 알코올 없는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애초에 큰 기대도 없었지만, 정말 신뢰감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순진한 얼굴에 황 비서는 몰래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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