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달라지는 게 없을 수도 있지. 근데 내가 하고 싶은 게 꼭 섹스만은 아니야. 그러니까 어울려 주는 게 힘들면 못 이기는 척 휘둘려 줘.”
손으로 턱을 붙잡아 당기더니 입을 맞췄다. 다물린 입술을 꽉 물고, 놓아주며 생긴 틈 사이를 침범했다.
피하지 않았다. 성급하게 들어온 그의 혀를 익숙하게 받아들이며 달래 주듯 키스했다.
적당히 밀고 당기며 면도를 마친 매끄러운 턱과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고 검은색 셔츠의 단추를 풀어냈다. 손을 집어넣어 벌리고, 바로 느껴지는 살갗을 손바닥으로 훑었다.
서준은 더 만지라는 듯 침대에 기대 어깨를 열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남자의 흥분한 숨소리에 금방 열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겨울이었다.
#7. 온실 출신 집주인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바쁘게 활동하던 정우주는 새 시즌 촬영을 앞두고 짧은 휴가를 받았다.
새 애인이랑 문제라도 있는 건지 어디 나가는 일 없이 틈만 나면 전화로 싸우기 바빴다. 스캔들 때문에 다른 지인들과의 만남도 꺼리는 눈치였다.
휴가 내내 거실을 차지하고 앉아 제가 출연한 드라마를 재탕하거나, 갑자기 방에 틀어박혀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또 술을 마시는 건 아닐까 의심했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불쑥 튀어나왔다가 확인하려 다가가면 후다닥 사라졌다.
그 덕분인지 한동안 서준과의 접촉도 거의 없었다.
혜수는 작업에만 집중하며 밤을 새울 수 있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붓을 부러뜨린 채, 꽉 쥐고만 있는 게 지금. 사죄의 절이라도 드리듯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얼마 전, 그날. 서준과 짧게 애무를 나누자 열망으로 가슴이 타는 것 같았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열정이 샘솟았다.
분명히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려 놓은 그림은 병든 타조 가죽처럼 쓰레기 같았다. 캔버스 안, 수천 번의 붓질에 후회가 덕지덕지 묻어났다.
사막에서 해가 뜨는 걸 봤던 때처럼. 새 대륙을 발견한 여행가처럼 호기롭게 붓을 잡았지만, 오산이었다.
욕을 짓거리고 바르작거리며 움직여도 원하는 건 단 하나도 그리지 못했다.
몸 안에 켜켜이 쌓여 있던 분노가 뾰족뾰족한 모양으로 가시처럼 튀어나왔다.
흉한 모양으로 부러진 붓대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다 아문 상처에 가시가 박히고, 피가 맺혔지만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쓸모없다면 차라리 잘라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손이 엉망이라는 것도 잊은 채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똑, 똑.
뭔가를 두들기는 짧은 소리가 아래에서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몸이 계단 쪽으로 돌아갔다.
“……올라오지 말아요.”
오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났다. 제게 그런 식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혹 우주가 듣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묵직한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기만 했다.
엉망이 된 바닥을 치우지도 못하고 도망치듯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무서운 괴물이라도 본 아이처럼.
방문 앞에 서서 반응을 기다렸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아 천천히 돌리자, 서준은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 문을 가볍게 밀어 냈다.
“이러고 있을 줄 알았어.”
바닥을 지탱하고 있던 발이 허무할 지경으로 주르륵 밀려났다. 소리를 낮춘 외침을 무시하는 반듯한 얼굴.
“내 말 못 들었어요? 밑에 정우주도 있는데.”
“거실에 없는 건 확실해. 혼자 또 헛짓거리라도 하고 있겠지.”
“헛짓거리?”
영화 속 나쁜 주인공처럼 웃던 서준은 혜수를 꽉 끌어안았다.
“지금은 나한테 집중해. 한동안 못 봐서 외로웠어.”
젖은 머리와 몸에서 찬 기운과 저번과 다른 코롱 냄새가 났다. 그날, 그의 향이 다정했다고 한다면 오늘은 조금 더 관능적이고 진한 느낌이었다. 눈빛마저 달랐다.
마라케시에서 돌아온 이후에 처음 만났을 때, 그때의 것과 비슷했다. 피곤해 보였지만, 문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서준은 한 걸음 물러나서 혜수를 위아래로 살피더니, 다리 옆에 떨어져 있던 손을 들어 올렸다. 물감이 묻어 시커멓고, 조금 전 부러진 붓에 다치는 바람에 피까지 나서 엉망이었다.
“조금만 한눈팔면 엉망진창이네.”
그의 혼잣말을 듣자마자 빼내려 했지만, 놓아주지 않았다. 그대로 또 입을 맞췄다.
강서준은 아무렇지 않게 제일 약한 부분을 건드렸다.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쓰는 붓이 가늘어서…… 손에 힘이 들어가서 가끔 이래요. 별거 아니에요.”
“작가님은 매번 피가 나는데도 별거 아니라고 하더라. 목이라도 부러져야 아프다고 할 거야?”
“괜찮다니까 그래요.”
오른쪽 볼에 손등을 가져다 대고 쓸어내렸다. 거짓말을 확인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아프고 힘들면 혼자 앓지 말고 부르라고 했잖아. 필요에 따라 이용당해 주겠다고.”
“……이용하려던 건 아니고?”
서준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들켰네.”
모를 리 없었다. 눈동자, 향기, 체취에서 야릇한 냄새를 풀풀 풍겼다.
서준은 엄지로 혜수의 입술을 매만지다 그 안으로 집어넣었다. 두꺼운 손가락이 고른 치열을 따라 어금니까지 쑥 들어갔다.
이 남자는 이 행위를 꽤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하…….”
놀란 것도 잠시, 혜수는 어울려 주겠다는 듯 혀로 그의 손톱 위를 문질렀다.
“얼굴은 다행히 다 가라앉았네. 야하게 구는 거 보니까 기력도 남아 있고.”
뜨거운 숨결이 나오는 걸 확인한 그가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 치열 위에서 미끄러지듯 춤을 추다가 혀를 물고, 쭉쭉 빨아 당겼다. 물감으로 엉망이 된 하얀색 티셔츠 위를 더듬었다.
혜수가 서준의 목을 끌어안으며 매달리자, 그의 손은 자연스레 낙하했다.
“읏…….”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는 것 같던데.”
“작업……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생활이 엉망인 건 사실이었지만, 어떻게 알았을까.
“그럼 나랑 밤새워 놀 수도 있겠네.”
숨을 쉬기 위해 얼굴을 틀자 이번엔 귓가를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정수리에서 내려온 입술이 귓바퀴를 핥고, 귓불을 깨물었다. 목 근처를 세게 물고 빨아 당겼다. 자국이 남을 게 분명했다.
“그냥, 그냥 해요! 씻지도 않았어요!”
“상관없어.”
다시 입술을 내놓으라는 듯, 으르렁거리며 턱을 들었다.
입을 벌려 들어 주자 그제야 온순하게 돌아왔다. 아니, 온순하진 않았다. 손으로 강제로 벌린 채 혓바닥을 씹었으니까.
뭐가 그리 급한지 침대 위로 가지도 않았다. 문 앞에 세워서 제 품 안에 가둬 둔 채 전희는 계속됐다.
추잡한 소리와 흥분에 젖어 내는 예쁜 목소리가 벽을 타고 다시 둘의 몸으로 돌아왔다.
그 순간,
“야, 이혜수!”
바로 문밖에서 들리는 정우주의 목소리에 혜수가 헉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본능적으로 눈이 문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잠겨 있었다.
몸을 빼려 했지만, 놓아주지 않았다.
대답이 없자 밖에 있던 그가 인내심을 잃고 문을 두드렸다.
똑! 똑!
입을 틀어막고, 팔을 뒤로 뻗어 서준을 때렸다. 그런데도 그는 비릿하게 웃을 뿐,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혜수는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참아 내야 했다.
“이혜수? 이혜수!!”
“으, 으응…….”
“뭐 하냐? 문 좀 열어 봐!”
그만하라고 눈으로 애원해 봤지만, 서준은 혜수의 허리를 더욱 세게 쥘 뿐이었다.
“씻었어. 씻고 나와서…….”
“아, 그럼 옷 입고 준비 좀 해. 그, 어, 어머님이 나 오늘 휴가 마지막 날이라고 하니까 같이 점심 하자고 하시네……. 회장님도 불렀는데, 바빠서 오실지는 모르겠어.”
“뭐? 윽…….”
“너 어디 아파?!”
“아니, 아니야.”
“네가 불편한 거 아는데 할머니나 어머님 심정도 생각해 줘. 너랑 내가 이렇게 된 다음에 수요일 수업도 빼고, 연락 없는 게 쓸쓸하셨나 봐. 어쩌겠어. 이럴 땐 우리가 숙이고 들어가야지. 내 말 알지?!”
“알았으니까, 알았으니까…… 그만 말해.”
느리게 몸을 앞당기고 빼내려 했지만, 서준은 그럴수록 끌어당겼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올라가게 얼른 준비해! 너 또 후드 티 입지 말고!!”
우주가 내려가자마자 서준은 혜수의 몸을 뒤집어 눕혔다.
문 하나를 두고 느낀 쾌락이 부끄러웠다. 이를 악물며 소리를 참아 내고, 눈을 가려 봤지만 서준은 허락하지 않았다.
팔목을 붙잡아 바닥에 붙들어 두곤 이미 붉게 부은 입술을 물었다.
내내 다 받아 주지 못해 허덕이기만 했다. 갖고 있는 모든 걸 빼앗아 갈 것 같은 갈급하고, 숨 가쁜 행위.
이기적이다 싶을 정도로 제멋대로인 시작이었지만 종국에 혜수의 다리는 그의 허리에 감겨 있었다.
준비하라는 정우주의 말을 끝으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평소보다 더 세차게 움직이며 맞닿아 있던 두 사람의 심장이 천천히 멀어졌다.
숨을 몰아 내쉬며 축 늘어진 혜수를 안아 들어 욕실로 옮겼다. 화낼 게 분명한데 조용했다. 아직 여운으로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정우주 있을 땐…… 하지 말아요.”
색정적인 미소를 끝으로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