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혜수가 들은 채 않고 가만히 있자, 서준의 입매가 비뚤어졌다. 기다리지 못하고 조심스레 오른쪽 손목을 쥐어 들고는 손바닥을 확인했다. 그릇 조각 때문에 생긴 상처엔 일자로 딱지가 앉아 있었다.
“잘 아물었네.”
“깊게 다친 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내 정성 덕분이지.”
“……오늘 일, 정우주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
소독솜으로 상처를 살살 문질러 딱지를 떼어 내던 그의 손이 멈칫거렸다.
“지금 너한테 가장 큰 약점은 정우주야?”
“괜히 일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그럼 더더욱 해야지. 일 크게 만들어서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일 생기지 않도록. 집 알려 준 거, 정우주일 것 아냐. 안 그래?”
맞다. 정우주밖에 없다. 모든 인간에겐 기본적으로 불친절하고, 히스테릭한 놈이 유독 엄마한테 약했다. 친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다른 엄마에게서라도 찾으려는 듯.
숙현은 늘 그런 우주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며 혜수의 흉을 봤다. 하나뿐인 딸이 가족 생각은 않고 제 살길만 바란다고.
“우주, 바빠요.”
“……누구는 한가해서 지금 이러고 있다고 생각해?”
“적어도 일은 안 하잖아요.”
“그만둔 게 아니고 휴직 상태거든요? 그리고 지금도 일하거든?”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는 게 좀 웃겼다. 늘 여유로운 얼굴로 실실거리며 놀릴 줄만 알더니 이번엔 진심으로 발끈하는 눈치였다.
“무슨 일 하는데요?”
“치킨집.”
농담이라 생각해 비웃었다가 서울에서 처음 보고 나눴던 대화가 불쑥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그가 요 며칠 사이 들고 왔던 포장 음식들 중엔 치킨도 자주 있었다.
장난처럼 했던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어서 실행하는 거, 이 사람이라면 정말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진심이에요?”
“나는 늘 너한테 진심이야. 말 안 하는 건 있어도 너처럼 거짓말은 안 해.”
“내가 언제 거짓말을…….”
뭔가 잘못된 건 아닐까라는 생각에 말을 잇지 못했지만, 서준은 어린아이 같은 천연한 미소를 지으며 주제를 돌렸다.
“치킨, 분식, 도시락에 이탈리안 레스토랑, 쌀국수집도 인수했어. 먹고 싶은 게 생기면 말만 해.”
연하게 남아 있는 상처에 연고까지 꼼꼼히 덧발라 주며 그가 떳떳한 얼굴을 했다. 구체적으로 줄줄 읊어 대는 걸 보아하니 거짓말인 것 같지도 않았다. 황당했다.
“……돌아간다면서요?”
“그게 왜?”
아이처럼 순수한 대답에 능력이 있다고 해야 할지, 생각이 없다고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게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일이에요?”
“복잡하고, 어려운 건 이미 끝났어. 누가 스캔들 내 준 덕에 충격받아서 일에만 몰두했거든.”
“무슨 일을 그렇게 무책임하게 저질러요.”
“세컨드 사업까지 걱정해 주는 거야? 사라져 준다고 한 건 진심이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집착 안 할게. 나머지는 뭐, 어떻게든 되겠지.”
쓸쓸한 말을 내뱉으며 손등에 소리 내어 입을 맞췄다.
도대체 속마음을 알 수 없는 남자의 말에 생각을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더는 그럴 체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 가지 말까?”
이마에 닿은 손이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컨드로 자신을 호명하던 남자가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했다. 막지 않았다.
애초에 이 남자와 나누는 이런 짓에 대한 방관과 섹스가 답이 될 순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정우주 몰래 손을 내주고, 손목을 잡혀 주었다. 껴안고 입을 맞췄다.
이 남자의 저돌적인 태도를 핑계 삼아 잠깐이라도 붙잡고 싶은 게 사실이었다. 말 못 하는 사정과 비밀 아래 먹먹하게 잡혀 있던 호감, 또 서준을 향한 갈망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가능케 했다.
정답과 옳은 길 같은 건, 요원했다.
“심각한 얼굴 하지 말고 쉬어. 마실 거라도 가져다줄게.”
“괜찮아요.”
“아니면 위로해 줄까.”
“강서준 씨.”
“그것도 아니면…… 당신 가족들 두 번 다시 못 쫓아오게 해 줄까.”
이 남자는 그렇게 해 달라고 하면 정말 그렇게 할 것 같았다. 간과 쓸개는 물론이고, 마음도 내놓으라고 하면 전부를 줄 기세였다.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며 뒤늦게 다정한 말과 행동을 저지했다.
“나 혼자서도 괜찮아요. 괜찮아야 해요. 그러니까 자꾸 나서서 도와주지 말아요.”
“왜? 흔들려?”
“무능해지니까.”
아주 잠깐, 서준의 얼굴이 슬픈 색으로 굳는 걸 목격했다.
“내 말은…… 세컨드가 해 주기엔 하나같이 주제넘어요. 혼자 있고 싶어요. 외출하려던 거 아니었어요? 다녀와요.”
“이혜수.”
지긋한 목소리에 묘한 긴장감이 심장 부근을 간지럽혔다.
“……네.”
“믿지 않겠지만, 네가 가만히 앉아서 숨만 쉬어도 나한텐 엄청 큰 위로야. 무능하지 않아, 너.”
이건 또 무슨 과분한 소리일까.
아무리 선을 그어도 소용이 없다. 멋대로 넘어온다. 옆으로 넘어갔던 고개를 찬찬히 돌리고, 다시 눈을 떴다. 요새도 제대로 못 잔 건지 오른쪽의 쌍꺼풀이 진해져 있었다. 단단하고, 강하기 짝이 없는 남자의 연약함은 그런 곳에 숨어 있었다.
혜수는 그런 것들을 묻고, 알고 싶었다. 또 제 안에 있는 것을 모두 끄집어내서 솔직하게 보이고, 감정을 토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너도 필요한 만큼 나 이용해.”
“……왜 그래야 하는데요?”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나 오늘 충분히 쪽팔리고, 미안한데. 얼마나 더 하라는 거예요.”
“쪽팔린 건 잠깐이야. 우선 좀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 봐.”
그 한마디에 최면처럼 잠이 몰려왔다. 눈꺼풀이 무거워져 끔뻑거렸다. 흐려지는 잔상의 끝에 속삭임을 들었다. 잘 자라고, 아무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
남자의 말이 통했는지 꿈도 꾸지 않고 기절하듯 자고, 일어났다.
***
다시 잠에서 깼을 땐, 침대 곁에 기댄 채 잠든 서준의 뒷모습이 보였다. 여태 나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뺨을 맞은 것뿐인데,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곁을 지켰다.
혜수는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밤처럼 까만 머리칼을 매만졌다.
대담하게 움직여도, 푹 숙인 고개가 좀처럼 일어날 생각을 못 했다. 불편한 자세로 꽤 깊이 잠든 모양이었다. 눈에 묻은 잠을 떼어 내며 몸을 움직였다.
이불을 들고 내려가 곁에 앉았다.
보는 것만으로 목이 아파 보이는 고개를 당겼다. 깰까 봐 걱정했는데, 인상만 잔뜩 찌푸리다가 얌전하게 기대 왔다. 자리를 잡고 눕더니 조금 더 깊이 잠들었다.
몸이 가까워지자 향수라도 뿌린 건지 좋은 냄새가 났다. 어디선가 맡아 본 향기였다.
출처를 알아차린 혜수의 눈이 커다래졌다. 제 허벅지를 베고 잠든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문신이라도 새기듯 수십 번, 수백 번 봤던 그 얼굴을 쳐다봤다.
아무 생각도 없이, 거리낌 없이 그저 좋아할 수 있다면……. 그런 가정들을 늘어뜨리며, 그의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한 번 더 잠들었다.
목이 아파서 눈을 떴을 때, 서준은 깨어 있었다.
“나한테 무슨 짓 했어?”
방금 일어났는지, 잠긴 목소리였다. 파렴치한 짓이라도 당한 것 같은 말이었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대로 뒀으면 목이 꺾여서 죽었을지도 몰라요.”
잠기운이 남아 있는 웃음소리, 그는 다리에 얼굴을 한참 비비고 나서야 일어났다.
“향수, 샀네요.”
한결 부드러워진 시선이 혜수에게 닿더니, 금세 몸을 붙여 왔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공항에서 샀어. 이름이 뭔지도 모르는데 마라케시라고 하니까 바로 주더라. 여전히 좋은 것 같아?”
다분히 의도가 담긴 물음에 대답하진 않았다. 그저 쇄골 부분에 얼굴을 묻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사랑이 가득한 그림 안에 파묻혔던 그날을 떠올렸다. 제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없을 황홀한 순간을.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 하자, 그는 손목을 붙잡아 그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아까부터 휴대폰 깜빡거려서 봤는데, 휴대폰은…… 언제 바꿨어?”
“말해 준 건 고마운데, 놔줘야 확인을 하죠.”
“확인하지 말라는 뜻이지.”
“우리 한국에서 마주쳤던 날이요.”
“응?”
“사실 사고가 났어요.”
혜수를 잡고 있던 서준의 손에 힘이 빠졌다. 두 사람의 팔이 중력을 따라 축 늘어져 아래로 내려왔다. 혜수는 잡힌 손목을 빼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붙잡았던 것 같다.
“무슨 사고?”
“눈이 많이 왔잖아요. 택시 타고 가다가 내리막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사람은 많이 안 다쳤는데, 휴대폰이 어디에 부딪혔는지 박살 났어요. 기절했다가 병원에서 다시 눈떴을 땐, 손에 적힌 연락처도 다 지워졌더라고요.”
“왜 진작 말 안 했어?”
“달라질 게 없으니까. 난 정우주랑 사귀고, 우린 몰래 섹스하고……. 겨우 그 정도니까.”
“선 긋는 거야?”
“처음부터 긋고 있었어요, 내가 너무 휘둘리는 것 같아요. 나한테 잘해 주지 말아요.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 추억하지도 말고, 괜히 의미 부여 하지도 말아요. 사실 그날도, 우리가 안 될 것 같다고 말하려고 했어요. 때마침 스캔들이 터져 준 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지만.”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를 끌고 나갈 자신이 없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정우주를 제외하더라도 자기는 이 근사한 남자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혜수는 치부했다.
“이혜수.”
“하고 싶은 거 적당히 하다가 깔끔하게 헤어져요. 그 편이 서로한테 이로울 테니까.”
침대 밑, 바닥 어딘가에 뒀던 휴대폰이 웅웅 소리를 내며 울렸다.
혜수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일으켜 그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붙잡혔다. 꼼짝없이 안겨서 그의 다리 위에 앉혀졌다.
방금 했던 말이 아무 소용 없다는 듯, 양팔이 혜수의 몸을 깊숙이 끌어당겼다. 단단한 몸이 자신을 옥죄는 것에서 말도 안 되는 안정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