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지금…… 여기서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외출이라도 하려는 건지 검은색 셔츠 차림에 깔끔하게 머리를 넘겼다. 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 하는 거냐고 묻잖아요!”
조금 전의 모습을 다 봤을 거라는 생각에 소리부터 빽 질렀지만, 그는 보폭 큰 걸음으로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오후부터 추워질 것 같아서 물 조금씩 틀어 놨어. 오래된 집이라 동파되면 골치 아프거든.”
“고작 그 말 하려고 왔어요?”
“집주인으로서는 꽤 중요한 말인데.”
“집주인이면 이렇게 막 올라와도 돼요?”
창피한 모습을 들켰다는 생각에 아무 말이나 막 튀어나왔다.
“몇 번이나 불렀어.”
“대답 안 했잖아요!”
“우리 사이 정도면 괜찮을 줄 알았지.”
또, 또. 저 능글맞은 얼굴.
손은 젖은 혜수의 눈가로 향했고, 고통에 본능적으로 나와 매달려 있던 눈물을 닦아 냈다. 혜수는 재빠르게 그의 친절을 쳐 냈다.
“쓸데없는 참견 하지 말고, 가요. 제발…… 그냥 가요.”
그가 들릴락 말락 할 정도로 작게 뱉어 내는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던 거리가 멀어졌다. 계단 아래로 빠르게 사라졌다.
허공으로 약간 올라갔던 손이 뚝 떨어졌다.
다시 붓을 쥐려는데 이번엔 차임벨 소리가 들려왔다.
카메라가 망가져서 집 밖에 누가 있는지 일일이 문을 열어 확인해야 했다. 곧 방문자를 확인한 혜수의 표정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왜 왔어?”
중문까지 성큼 들어온 그들을 가로막으며 쏘아붙였다. 혜수의 엄마, 숙현은 여태 본 적 없었던 고급 브랜드의 패딩과 새 가방까지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위아래로 훑고 있는데 뒤따라서 남동생인 이혜균까지 들어왔다.
“넌 누나가 돼서 남동생한테 인사는 하지 못할망정 보자마자 한숨이냐?”
“엄마, 나도 이혜수 별로 안 반가워. 그런 소리 하지 마.”
“연락도 없이 둘 다 무슨 일이야.”
팔짱을 끼고 문을 가로막고 있는 혜수의 태도에 숙현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들이지 않을 기세다? 내가 내 딸 사는 집에 와 보지도 못해?”
“야 이 미친년아, 네가 그 난리 치고 우주 형이랑 인사를 오길 했냐, 전화하길 했냐? 그런데도 김치 했다고 일부러 이 산꼭대기까지 갖다주러 왔으면 감사합니다, 해도 모자랄 판국에 그게 지금 무슨 태도야?!”
“부탁한 적 없어. 갖고 돌아가.”
혜균이 들고 있는 김치 통을 턱끝으로 가리키자 그가 집어 던질 기세로 소리쳤다.
“이 싸가지가!”
“균아, 관둬라. 말이 통해야 말을 하지. 정 서방은 안에 있나?”
‘정 서방’이라는 호칭에 하늘이 노래졌다. 두 사람은 은근슬쩍 혜수를 밀치며 중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히익! 세상에! 이게 집이야, 대궐이야?! 엄마, 엄마! 이거 봐. 다 명품이야! 미친, 이게 다 얼마야? 우와 씨, 대박! 엄마! 여기 주방도 봐!”
거실과 부엌을 한참 바라보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두 사람의 행위에 혜수가 이마를 문지르며 최대한 좋게 말하려 노력했다.
“이혜균, 너는 출근해야 하는 시간에 왜 여기 와 있어?”
입을 떡 벌리고 구경하던 모자가 혜수의 말에 수상하게 안구를 굴렸다.
“흐음, 흠! 나 먼저 나가서 시동 걸어 놓고 있을 테니까, 엄마 얘기하고 천천히 나와.”
“쟤 설마 또 회사에서 잘렸어?”
정곡을 찌르는 물음이었지만, 숙현은 혜수가 혜균을 타박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올려다봤다.
“잘린 게 아니고 이번엔 제 손으로 그만둔 거다. 나도 그러라고 했고.”
“……정말 대단하다.”
“혜균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도 모르고 쉽게 말하지 마라. 하긴 너처럼 사회생활 안 해 본 애가 뭘 알겠니?”
“그러는 엄마는 잘 알아?”
“아이고, 너 참 잘났다. 말 나온 김에 잘난 네가 자리 하나 알아봐 주든가.”
“뭐?”
“좋은 예비 시댁 둬서 뭐 할래? 이럴 때 써먹어야지. 식당도 괜찮겠다.”
“엄마, 정말 양심이 있어?”
숙현은 거실에 놓인 소파를 문질러 보다 눈을 치켜떴다.
“지금 양심이 문제야? 처자식이 없는 것도 아니고 둘씩이나 있는 마당에 지는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겠니?”
“그 말 하려고 여기까지 쫓아오는 정성을 보였구나.”
“너는 애가 참…… 어쩜! 내 배에서 나왔지만, 말을 어떻게 그렇게 표독스럽게 하니?! 먹고살기 힘들다는데 도와줘야겠단 생각이 먼저 아니야?!”
“저 자식이 내 지갑에서 돈 훔쳐 쓸 때부터 충분히 도와줬어. 사채 쓴 아들 원양 어선 태우기 싫다고 울고불고하는 바람에 갚아 줬고, 나중엔 보증금까지 빼서 갚아 줬다고! 내가 뭐 얼마나 더 해 줄까?”
되바라진 반응에 숙현은 허허 비웃었다.
“어휴! 너, 아주 당당해졌다? 우주랑 사귀더니 비빌 곳 생겼다, 이거니? 그래서 지금 봐. 네 동생이 저렇게 힘들게 살고 있잖아. 혜수야, 응? 자리만 알아봐 주면 진짜 성실하게 다니고, 빌린 돈도 갚기로 엄마랑 약속했어.”
이름뿐인 약속은 철이 들기 전부터 들어 왔다.
“정말 지겹다. 둘 다 지겹고, 역겨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순식간에 숙현의 손이 혜수의 볼을 강타했다. 고개가 휙, 돌아갔다. 볼에 불꽃이 이는 것처럼 화끈거렸고, 얼얼했다. 입안에서는 피 맛이 돌았다.
“역겨워?”
그 말이 분하다는 듯 되풀이하며 또다시 손을 올렸다. 손바닥이 다시금 혜수의 볼을 강타하기 직전,
탁!
불식간 튀어나온 커다란 손이 숙현의 팔을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타인의 등장에 숙현이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무, 뭐야? 당신은 누구야?!”
처음 맞았던 그대로 고정되어 있던 혜수의 고개가 그제야 천천히 움직였다. 서준이었다. 그가 제 불행을 또 본다는 생각에 가슴속이 끓어올랐다. 싫었다. 너무 싫었다.
“내가,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그냥 가요! 서준 씨, 제발!”
“너…… 너, 설마! 그새 바람나서 다른 남자를 집에 들인 거야?!”
“처음 뵙겠습니다. 집주인입니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서준이 대신 나서서 답했다. 문신으로 만든 얇고 진한 숙현의 눈썹 끝이 희한한 모양으로 올라갔다.
“지, 집주인?”
“예. 제가 이 집, 주인입니다.”
태연한 소개말에 숙현은 오랜만에 당황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객이 있었다는 사실에 손을 올린 일을 내심 후회했다.
“집주인이 왜, 왜 여기에 계시지?”
“우주가 친한 동생이라 자주 놀러 오는데, 오늘은 알려 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우리가 집안일로 소란을 피웠네요.”
이제야 다 키워 놓은 딸 덕을 좀 보나 했는데, 자칫 잘못하여 우주 귀에 이 상황에 관한 얘기가 들어가기라도 하면……. 숙현은 아찔한 상상을 지워 내며 얼른 웃어 보였다.
방금 일어난 문제가 온전히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임을 피력했다. 화내던 모습은 어디 가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얌전한 척 웃어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천연한 이 남자의 거짓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이런 상황을 보인 게 너무 부끄럽고 민망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손님 있는 거 봤으면 그만 가.”
돌려보내려는데 등이 떠밀리면서도 숙현의 입은 멈출 줄을 몰랐다.
“알았어! 어우, 그만 좀 밀어! 근데 아무리 정 서방이랑 친하다고 해도 둘이 있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문 앞까지 간 숙현을 서준이 다시 불러 세웠다. 그는 부엌 테이블 위에 놓아둔 김치 통을 가져다 친절하게 손에 들려 주었다.
“김치 먹는 사람도 없고, 말씀하신 그런 일은 없을 테니, 우려 안 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여기 별채는 제 소유라 오늘처럼 가끔 들릅니다. 이런 식으로 찾아와 소란 피우시는 건, 자제해 주십시오.”
슬쩍 미소 짓고 있긴 했지만, 호의는 확실히 아니었다.
“……아, 아하하. 그렇구나. 네. 내가 생각이 짧았네요.”
“안녕히 가십시오.”
완벽하게 예의를 지키고 있으면서도 단호한 태도에 숙현은 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민망한 듯 웃기만 하자 혜수가 문을 열어 제 엄마를 쫓아냈다.
“알았어. 간다고, 가!”
서준은 고개 숙여 인사했지만, 배웅까진 하지 않았다.
문이 닫혔지만, 문고리를 잡은 혜수의 손은 한참이나 떨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돌아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런 상황을 알아차렸는지 서준이 다가와 어깨를 붙잡고 제 쪽으로 몸을 휙 돌렸다. 깜짝 놀랐지만, 얼른 고개를 숙여 피했다.
“보여 줘.”
턱끝을 붙잡아 제 쪽으로 고정시켰다. 자국이 남을 정도로 빨갛게 부어 있었다. 확인하자마자 반듯하던 미간에 선이 그어졌다. 소리만으로 세게 맞았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혜수는 아까처럼 그의 손을 쳐 냈다.
“괜찮아요. 그냥…… 못 본 척 넘어가 주세요.”
어떤 사람을 향한 애정의 목적이나 사랑은 보통 따뜻하고, 아름다운 장면에서 시작되지 않는가. 이상했다. 볼이 추하게 부어서도 괜찮다 하는 여자의 모습에 서준은 제 감정을 한 번 더 확신하고 말았다.
“싫은데.”
피식, 웃더니 서늘한 손등이 부은 볼 위로 올라왔다.
“사람 바닥 보는 게 재미있어요?”
“고작 이 정도가 당신 바닥이야? 더 대단할 줄 알았더니 실망이네.”
엄마에게 맞은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면역 없이 부드럽기만 하던 볼은 순식간에 부어올랐다. 얼얼하다가도 따가워지는 살갗에 서준은 직접 만들어 온 얼음주머니를 갖다 대 줬다.
볼이 아픈 것보다 창피함이 훨씬 괴로웠다. 괜찮다고, 제발 가라고 했는데도 그는 굳이 방까지 쫓아 올라왔다.
“괜찮다고 했잖아요. 강서준 씨가 지금 이러는 게 너무 불편해요.”
“너 안 괜찮아.”
눈이 찌푸려질 정도로 붓긴 했지만, 이어지는 그의 행동들은 지나쳤다.
서준은 억지로 침대에 눕히더니 얼음주머니를 베개 위에 올려 바짝 갖다 댔다.
“손.”
“네?”
“손 달라고.”
불쑥 다가와 잡아먹을 것처럼 굴 땐 언제고 손을 잡는 건 꽤 조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