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걱정하지 마. 세컨드가 처음이라 설레서 그러는 거니까.”
“이 짓거리를…… 계속하자는 소리예요?”
“한 번 먹고 버리는 거 습관이구나.”
“이렇게까지 하고 싶어요?”
“너무 겁먹지 마. 한국에서 볼일만 끝나면 없던 사람처럼 사라져 줄게. 그 전에 내쫓고 싶으면…… 날 납득시켜.”
“돌아간다고?”
남자의 말에 묘하게 굳었던 혜수의 눈이 커졌다.
“가지 말까.”
얼핏 상황을 즐기는 것 같은 가벼운 태도에 이 남자가 괜히 정우주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진 않을까, 상처받지 않았을까 걱정했던 혜수는 바보가 되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서 팔을 풀고 일어났다.
“화났어?”
“제가 왜요?”
결국 돌아갈 예정이었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속이 메슥거렸다.
더한 거짓말을 하는 주제에 절절매던 남자에게 속은 것 같은 모순된 분노가 끓어올랐다. 가장 열받는 건, 여기까지 와서도 이 남자를 확실하게 뿌리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씻을게요.”
그대로 있다간 정말 울 것 같아서 침대 바깥으로 몸을 틀었다. 바닥에 발이 닿았지만, 금방 다시 붙잡혀 끌려갔다.
“할 만큼 한 것 같은데 이제 좀 떨어지죠?”
“내 기준에선 아니야.”
우람하고, 단단한 팔이 상체를 옭아매고, 혜수를 끌어당겼다. 왼팔은 가슴 아래로, 오른팔은 그녀의 왼쪽 어깨까지 꼭 안으며 옆으로 누워 속박했다. 이 냄새가 그리웠다.
“섹스만 해도 충분하잖아요, 그만해요.”
“섹파 취급은 하지 마, 듣는 세컨드 불편하게. 아니면 이어서 할까?”
여체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손이 더욱 심술궂게 춤을 추자 혜수가 움찔거리며 바동거렸다.
“힘들어요.”
“난 시작도 안 했는데…… 이 정도는 좀 봐주라. 버리고 가는 누구 때문에 트라우마 생겨서 그래. 벌써 두 번이나 버렸잖아.”
여차하면 한 번 더 붙어먹을 기세였다. 그 찰나, 혜수가 팔을 다급하게 쳤다.
“정우주, 우주 온 것 같아요.”
강아지처럼 무슨 소리라도 들은 건지. 열이 받다가도 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짜증 섞인 호흡을 뱉으며 일어난 그가 욕실로 향했다.
흥분에 취해 몽롱하던 정신이 물이 흐르는 소리와 방 안에서 나는 그의 냄새에 겨우 깨는 것 같았다. 울긋불긋하게 젖은 몸과 근육통으로 스스로가 저지른 짓을 통감했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들이 새삼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재생됐다.
“하…….”
몸을 움직이려 해도 좀처럼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얼른 닦고, 일어나 옷을 입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안절부절못했다. 아, 그러고 보니 서준이 망가뜨리는 바람에 옷도 새로 꺼내야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인상만 쓰고 있는데 서준이 불쑥 다가왔다. 그러더니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내려가기나 해요! 이러다 들키면…… 읏!”
“그렇게 말해 주니까 새삼 내 위치가 실감이 나네.”
다 쓴 수건을 대충 던져 버리고, 옷을 주워 입으며 비릿하게 웃었다.
“싫으면 안 하면 돼요.”
“천만에. 천직인 것 같은데.”
침대 위까지 올라와 다정하게 입을 맞추고는 나갔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작가님.”
쿵!
혜수가 던진 베개를 막아 내며 문이 닫혔다.
거실엔 정우주가 벌써 앉아 있었다.
“형?”
계단에서 내려오는 서준을 발견하더니 휘둥그레 뜬 눈으로 불렀다.
“형이…… 왜 거기서 내려와?”
멍청한 얼굴을 목격한 서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바뀐 게 없는지 궁금해서 잠깐 올라갔다 왔어.”
“아, 아아. 그랬어? 근데, 그 2층은 이혜수가 혼자 쓸 예정이라서 안 그러는 게 좋을 거야.”
그대로 별채로 돌아갈까 하던 서준은 괜한 참견에 계획을 바꿨다.
몸에서 아직 이혜수 냄새가 나서 아쉬웠고, 몇 번을 다시 봐도 수상한 관계를 확인하고 싶었다. 분명히 뭔가 있다고, 무의식은 확신하고 있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천천히 소파까지 걸어갔다. 긴 다리를 안쪽으로 꼬았다.
“두 사람, 따로 생활하는 거야?”
조소를 띠며 묻는 말에 정우주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어색하게 답했다.
“어? 그, 그렇지. 둘 다 밤낮이 완전 달라서. 쟤는 그…… 작업실도 필요하니까. 그러는 게 나을 것 같아. 왜?”
손 아파서 그림도 못 그리는 사람에게 작업실이라. 서준의 감각이 다시 한번 털을 세웠다.
“정우주, 많이 컸네. 너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혼자 못 잤잖아.”
“아, 형! 언제 적 얘길 해! 근데 혹시 이혜수 봤어?”
“모르겠네. 방에 있는 거 아닐까?”
아마 한창 다치지 않은 손으로 씻고 있겠지. 후회하고, 민망해하면서 하얀 몸이 붉어질 정도로 벅벅 문질러 낼 것이다. 그 모습을 떠올리며 혼자 웃자, 우주는 왜 저러냐는 표정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저녁 사 왔는데 같이 먹을래? 요리하려다가 실패해서 그냥 사 왔어.”
“이혜수 씨 내려오면 같이 먹지.”
“그래……. 어?”
일일이 놀라는 것에 반응해 주는 것도 이제 슬슬 짜증 날 지경이었다.
“왜?”
“괜찮겠어?”
“안 괜찮을 건 또 뭔데?”
천연하게 웃어 물으며 서준은 부엌으로 향했다. 섹스에 미쳐서 엉망이 된 부엌을 깜빡하고 있었다. 저 꼴로 앉아 있는 정우주가 제대로 치울 리 없으니 분명 또 이혜수의 손이 가겠지. 제가 나서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10분 정도 지나자 혜수가 젖은 머리로 내려왔다. 경계심 없이 허벅지를 가리는 티셔츠 차림이었다. 편하지만 눈 둘 곳 없이 자극적인 차림임에도 우주는 평소처럼 신경 쓰지 않았다.
“얼굴 뭐래?”
“별거 아니래.”
일부러 퉁명하게 답했지만, 혜수는 타격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곤 소파에 앉더니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뭐 찾냐?”
“아무것도…….”
부엌에서 서준이 나오는 걸 보고 말을 흐렸다. 찾긴 했지만, 아직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한 존재에 몸에 열이 올랐다.
스스럼없이 다가온 그는 하필 비어 있던 둘 사이로 턱 하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까워지자마자 그의 눈길이 하얀 허벅지로 내려가 닿았다.
음흉한 눈빛을 대번에 알아차리고 쳐다보자, 아까 그가 빨아들였던 흔적이 선연하게 남아 있는 걸 발견했다.
깜짝 놀란 혜수는 얼른 소파 밑으로 내려가 앉았다. 서준은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은밀한 비밀이 쌓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정적인 분위기를 참지 못한 우주가 요란하게 움직였다.
“앞접시가 좀 필요하겠네.”
혜수가 움직이려 하자 우주가 먼저 일어나 소파를 폴짝 넘었다.
우주가 부엌까지 다다른 후에야 뒤늦게 아직 다 치우지 않은 부엌이 생각났다. 일어나려다가 다 귀찮아져서 아니, 치우지도 않고 몸부터 섞은 사실이 민망해져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강서준의 시선이 온몸에 닿았다. 아까 그가 핥아 댔던 부위들이 따끔거렸고, 얼얼했다. 발정 난 짐승이 된 것 같았다. 숨 막혀 죽을 것처럼 희열하게 만들었던 지난 밤을 떠올리며 갈망했다.
다행히 우주가 후다닥 돌아오는 바람에 억지로 진정했지만, 평생 처음 느껴 보는 종류의 갈증에 혜수는 당혹스러웠다.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열망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더 원초적인, 그런 느낌이었다.
“이혜수, 그 난리 난 걸 벌써 다 치웠어?”
“……뭐?”
손댄 적 없는데 치워져 있다는 걸 듣고 의아한 표정으로 서준을 쳐다봤다. 우주가 앞접시를 나눠 주는 그 잠깐, 닿은 시선이 서로에게 머물렀다.
“너 그래서 샤워했구나. 청소하느라.”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말은 없었다. 서준의 말대로 사고는 정우주가 치고, 치우는 건 혜수가 하는 게 일상이었으므로.
정우주가 휴대폰으로 시선이 팔린 사이, 서준이 고개를 혜수 쪽으로 돌리고 속삭였다.
“나 잘했지?”
***
두 남자를 빼면 새집에서의 생활은 좋았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간이 혜수의 손끝을 간지럽히며 지나갔다.
정우주는 보통 외출하거나 방에서 잠만 잤다.
틈만 나면 덤벼들 것처럼 굴었던 서준도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이 다 돼서야 돌아왔는데, 가끔 각양각색의 음식을 포장해서 들고 왔다. 우주는 그걸 보고 퇴근하는 아빠냐고 놀렸지만, 그는 대답도 하지 않고 별채로 사라졌다. 2층에 있었지만, 소리만으로도 그 서먹한 사이를 알 수 있었다.
셋 사이의 묘한 무게가 유지되며, 평화도 찾아왔다.
시간이 넘쳐 나는 게 처음인지라 뭘 해야 할지 몰랐던 혜수는 습관처럼 붓을 잡았다.
가장 즐겨 쓰는 인조모로 만든 둥글린 4호 붓은 어디서든 쓸 수 있게 파우치에 들고 다녔다. 아이라이너보다 더 손에 익은 거였는데 이젠 돌처럼 무겁다.
마트에서 산 스케치북에 물만 묻혀서 점을 찍었다.
“휴.”
각오를 담은 한숨에 떨림이 섞여 있었다. 몸이 아는 고통을 3년째 반복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왼손으로 오른손의 손목을 꾹 쥐어 잡고 스케치하듯 신중하게 선을 긋기 시작했다.
슥, 쓰윽, 쓱…….
얼마나 움직였을까. 또 손이 떨렸다. 엄지가 안으로 곱고, 흉하게 손가락이 휘었다.
고통의 정도가 심하다곤 할 수 없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죽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자다가 종아리가 움찔움찔하는 게 보일 정도로 쥐가 났을 때의 고통, 그 정도가 손에 반복적으로 한참 이어졌다.
손을 주무르며 휴대폰 타이머를 확인했다. 2분 16초, 참을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혜수는 쓰러지듯 바닥에 엎드렸다.
그 위로 불길한 오후의 햇살이 길게 늘어져 내렸다.
“하아.”
정은하에게 큰소리쳤지만, 더는 전과 같을 수는 없다는 확신과 불안이 몸을 감쌌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겨우 고통이 멎은 손을 안고 일으키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계단 입구에 서준이 우뚝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