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피 한 방울 안 보이던데, 이 난리를 피워 놓고 나갈 정도면 어디 뼈라도 부러졌나 보네.”
옆에 있던 작은 개수대의 물을 틀고, 피가 나는 혜수의 손을 당겨 닦아 주었다. 피는 다 씻겨 나갔지만, 뒤늦게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었다.
“기름이 튀었는데, 아!”
“가만히 있어.”
상처를 살피던 그가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왔다. 손엔 구급상자가 들려 있었다.
“제가 해도 돼요.”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다시 붙잡혔다.
처음 만났을 때, 손은 잡기 싫다는 걸 알려 준 이후로 이 남자는 늘 이렇게 손목을 잡아 왔고, 이젠 그 감각이 배어 버린 것만 같았다.
능숙하게 소독하고, 약을 바르더니 방수 밴드까지 꼼꼼히 붙여 주며 말했다.
“물 닿지 않게 하고, 내일까지만 이러고 있어.”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굴던 그가 보여 주는 친절에 마음이 더 일렁거렸다.
“늘 이런 식이야?”
“뭐가요?”
“사고는 정우주가 치고, 치우는 건 네 몫이냐고.”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면, 정말 사귀기라도 해?”
“강서준 씨…….”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던 고개를 혜수의 어깨에 박으며 체중을 실었다. 혹여 뒤로 넘어갈까 등을 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왜 하필 정우주야.”
“……여기까지 와서 그게 중요해요?”
윗입술이 귓불과 턱을 타고 내려와 목에 닿았다. 혜수가 신음을 참으며 움찔거리자 다시 멀어졌다.
“나쁜 짓이 조금은 더 쉬워졌을지도 모르지.”
몸을 살짝 떼어 내더니 엄지손가락으로 혜수의 입술을 훑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림 이외의 것들은 평생 잘 참아 오며 살아왔는데, 이 남자 앞에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녹아내렸다.
자신을 밀어내지 않는 이혜수를 보고, 서준은 제 의심의 실체를 다시 한번 확신했다. 그게 뭐가 됐든 순순히 눈을 감는 여자 앞에서 망설임이나 고민 같은 건 무용지물이었다.
입술을 위아래로 훑으며 그 사이를 벌리던 손가락은 순식간에 안으로 들어갔고, 치아를 지나 혓바닥을 꾹 눌렀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문지르다 깊숙이 집어넣기도 했다.
혜수가 낮은 신음을 흘리자 눈가가 젖기 시작했다.
서준은 오히려 더 깊숙이 집어넣었다.
“하아.”
참다못한 혜수가 서준의 손가락을 힘주어 깨물었다. 질끈 감은 눈가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는 그제야 흡족한 듯 멀어지며 다시 혜수를 일으켰다.
젖은 숨을 내뱉으며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탄탄한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와 체취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혜수는 몰아치는 감정을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참아 내다가 사정하듯 속삭였다.
“미안해요.”
서준이 목과 쇄골 사이에 고개를 파묻으며 웃을 때마다 그 숨결과 촉감에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뒤로 뻗고 있던 혜수의 팔이 자연스레 그의 목을 감았다.
커다란 손이 척추와 날개 뼈를 야하게 선회하기 시작했다.
“난 이대로 끝낼 생각 없으니까 사과하지 마.”
“놔요.”
진심 없는 목소리에 혜수의 원피스는 그의 손등을 타고 올라갔다.
“정말 놔?”
호흡에 흥분이 어렸다. 간절한 눈빛을 본 혜수가 눈가를 매만졌다.
이혜수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너덜거릴 정도로 망가져 버린 상황과 몰아붙일 대로 몰아붙이는 강서준 때문에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생각 같은 건, 순식간에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바라보고 있는 서로의 눈동자 안에서 잠깐이나마 진심을 봤다.
각자의 사정을 뒤로하고 본능만이 확실하게 남은 순간, 서로를 안았다.
“후우…….”
“흡, 흐읏…….”
겨우 한 번씩 숨을 몰아 내쉬면서도 손은 연신 바짝 붙은 서로의 몸을 매만졌다. 그렇게 입술을 성급하게 물어뜯으며 2층의 침실까지 오는 데 얼마나 걸렸더라. 새 침대는 호텔의 것처럼 몸이 푹 감기는 고급스러운 소재였다.
혜수의 위로 완전히 올라간 그가 따뜻하고 축축한 입안을 샅샅이 훑으며 숨과 타액을 가져갔다. 혀를 빠는 타이밍에 맞춰 뒤통수에 깊이 들어간 커다란 손이 머리카락을 쥐락펴락할 때마다 묘한 통증과 쾌락이 동반됐다.
숨이 모자라 혜수가 인상을 찌푸리자 얽히던 그의 혀가 부드럽게 입천장을 핥았고, 윗입술을 세게 깨물며 길었던 첫 번째 키스를 마무리했다.
“아파…….”
한층 진해진 서준의 눈가가 길게 늘어졌다. 흥분에 취해 튀어나오는 혜수의 투정 어린 반말이 좋았다. 숨이 모자라 위아래로 들썩이는 가슴도, 저 때문에 울긋불긋해진 몸과 입술도, 움직임이 느릿해진 눈동자도…….
10년 전에도, 사막에서 다른 이름으로 마주쳤을 때도 사로잡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어떤 이름을 갖고 있어도.
“이혜수.”
감히 실토할 수 없어서 괜히 이름을 부르자 목에 손을 감으며 안겨 왔다. 소중한 체온을 꽉 끌어안아 주며 쇄골 위를 물었다, 코로 체취를 각인시킬 것처럼 듬뿍 마셨다.
“이혜수.”
제 피부를 입에 물고, 연신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에 혜수는 문득 궁금해졌다. 대체 여기까지 와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왜 이렇게까지 끌어당기는 걸까.
얇은 피부를 쭉쭉 빨아 대며, 깨무는 바람에 생각은 또 거기서 끊겼다.
“하, 윽!”
아파하는 것 같은 얼굴에 행여 그만하라고 할까 봐 입술부터 막아 댔다. 뜨겁게 부푼 입술을 또 세게 물고, 벌린 입안으로 혀를 집어넣어 그 안을 살살 달랬다.
혜수는 겨우겨우 따라붙으면서 손으로 그의 등을 열심히 안았다. 단단한 몸을 쓰다듬는 것뿐인 자못 귀여운 손짓이었지만, 흥분됐다.
야한 신음에 다급해진 서준이 일어나 입고 있던 검은색 니트를 벗어 던졌다. 여전히 성난 근육들이 붙어 있었지만, 모로코에서 봤을 때보단 마른 것 같았다.
이성을 잃은 그가 원피스를 벗기려 목 부분을 세게 잡아당겼는데 힘을 잘못 주는 바람에 위로 올라가지 않고, 옆으로 늘어나 버렸다. 어깨까지 내려올 정도로 목이 쭉 늘어난 옷 때문에 웃음이 터졌다. 결국 일어나 스스로 옷을 벗었는데, 그가 사과했다.
“미안.”
차라리 처음부터 끝까지 몰아붙였으면 이렇게까지 가슴이 아프진 않을 것 같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다정해 버리고 마는 남자의 모습에 아픈 표정을 숨겼다.
속옷 차림으로 무릎으로 침대 위를 기어가, 허무하게 앉아 있는 서준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방금 그가 제게 했던 말을 똑같이 따라 했다.
“나한테…… 사과하지 말아요.”
농염한 시선이 맞아떨어졌다.
그만두지 말라는 혜수의 말에 한참 서로를 바라보다가 짧게 키스했다.
둘의 안에 조용히 숨어 있던 욕정이 몸집을 부풀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
숨 쉬는 것도 귀찮을 정도로 지친 혜수가 누워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동안, 서준은 바지를 챙겨 입고 움직였다. 엉망으로 풀린 머리를 넘겨 주고, 물을 가져와 입으로 먹여 주기까지 했다. 정성스럽게도.
짧게 웃는 얼굴은 반짝거렸고 근사했다. 협박하고, 비아냥거리던 그와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섹스가 끝난 후의 그는 사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다정했다.
서준은 옆으로 누워 혜수를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 아직 젖은 머리와 몸을 쓰다듬었다.
“이혜수.”
고개를 올려 그를 마주하자, 어쩌면 허황된 것 같은 하지 말라는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나쁜 건 내가 다 할 테니까 죄책감 가지지 마. 필요하면 언제든 할 테니까 정우주랑 자지 마. 걱정도 하지 말고, 아니……. 그냥 아무것도 안 바랄 테니까 나 밀어내지만 마. 도망가지 마. 응?”
하마터면 강제로 정우주를 아웃팅 시키고, 진실을 실토해 버릴 뻔했다. 최악이라고 하더니 그토록 약하고, 절절하고 슬픈 얼굴을 보이는 건 정말 반칙이었다.
계속 그 눈을 바라보고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서준은 가려는 혜수를 냉큼 붙잡았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차라리 아까처럼 억지로 붙잡고 협박해요. 그게 나으니까.”
환상 속에 살던 남자를 거지 같은 현실에서 마주했다. 버리고, 거짓말하고, 기만하는 자신에게 이 남자의 애정은 순순히 받을 수 없는 과실이었다.
차라리 욕을 하고, 때리고, 비난하고, 미워해 주길 바랐다.
“그럼 정우주 버릴래?”
위험한 제안을 하며 천천히 고개를 한쪽으로 들어 올린 그의 시선과 마주 닿았다.
머리를 만지던 작은 손은 자연스레 눈가로 향했다. 짙은 눈썹에 생각보다 부드러운 감촉의 피부, 잊을 수 없는 조각상처럼 근사한 얼굴이 지금 제 다리 위에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자꾸 욕심이 났다.
시커먼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여 자신을 담고 있는 게 너무 뜨거웠다.
가만히 지켜보던 혜수는 여태 음욕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눈을 제 손바닥으로 가려 버렸다.
서준은 히죽 웃으며 혜수의 손 위로 제 손을 조심스럽게 올리고 천천히 훑어 올렸다. 손가락, 손등, 팔을 타고 쑥 올라가더니 어느새 팔뚝의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부분을 희롱하듯 매만졌다.
“간지러워요.”
“그러라고 만지는 건데.”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팔을 쳐 냈지만, 금방 돌아와 또 손목을 붙잡는다. 뭔가를 알려 주려는 듯 제 가슴 위로 혜수의 손을 올렸다. 나쁜 짓을 마친 심장은 세차게 뛰었다.
“……죄책감 들어요?”
서준이 커다란 상체를 일으켰다. 손목은 여전히 붙잡아 둔 채.
이혜수는 싫지도 좋지도 않은, 중간의 얼굴이었다. 괴롭히고 싶은 심술에 비겁한 질문을 던졌다.
“정우주한테 미안해할까?”
“그럴 필요 없어요. 나도 안 그럴 거니까.”
덤덤하게 부정하는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서준은 피식거리며 잡고 있던 손목에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