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
대화를 마친 두 남자가 본채로 돌아왔다. 혜수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얼른 일어났다. 걱정된 모양이었다.
“내려와 있었네.”
다시 가까이 마주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조용했지만, 뜨거웠다. 가운데 끼어 있던 우주가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정식으로 소개할게. 여기는…… 아는 형이고, 강서준이라고 해. 이쪽은 이혜수.”
“처음 뵙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덤덤한 그의 인사에 눈을 피하며 답했다. 의미 없는 첫인사와 함께 세 사람의 비밀과 거짓말이 차가운 공기 안에 낮게 깔렸다.
“흐음, 둘 다 배고프지 않아? 먹을 게 있으려나 모르겠네.”
괜찮을까 걱정하던 우주는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부엌 안으로 도망간 그를 확인하고, 혜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우주랑도…… 아는 사이였네요. 그래서 낯설지 않았구나.”
잘못된 짐작을 서준은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그냥, 대충. 뭘 그렇게 떨고 그래요? 걱정하지 마. 안 잡아먹으니까.”
반대쪽에 앉아 있던 서준이 조소를 띠며 일어나더니 거실 아트 월의 벽난로로 향했다. 그 위에 놓인 술을 따르고, 몸을 돌리자 다시 눈이 마주쳤다.
그를 쳐다보고 있던 혜수가 먼저 시선을 내리깔았지만, 다가온 그는 몸이 닿을 정도로 가깝게 앉았다.
“작가님 덕분에 재밌는 경험 했어요. 새삼 오랜 친구랑 눈이 맞은 건 아닐 테고…… 몸이 꽤 달았었나. 아니면 원래 사귀는 사람 따로, 섹스하는 사람 따로 두는 게 취향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이런 비난과 추측을 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에 일어났지만, 곧바로 손목을 붙잡혔다.
고개를 틀어 오른쪽 얼굴을 숨기고, 떨리는 걸 감추려 입안을 꾹 깨물며 웃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날은 제가 생각해도 몸이 좀 달았었나 봐요. 그러니까 말했잖아요. 내가 누군지 잘 모르면서, 겁도 없다고.”
정떨어지기를 바라고 한 섣부른 도발이었지만,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서준은 뿌리치고 가려는 혜수를 잡아끌어 제 다리 위에 앉혔다.
“미쳤어요?”
조용하게 소리치는 꼴에 더 열이 받았다. 이혜수의 양 손목을 등 뒤로 잡아 결박했다. 품 안에 들어오고도 남는 작은 몸을 바짝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는 당신은 제정신이고? 전부 까발릴 생각 아니면 조용히 하지.”
역겹고, 천박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런 협박으로라도 붙잡아 두고 싶었다.
한껏 센 척하더니 이내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더 괴롭히고 싶었다.
코끝으로 왼쪽 귓가를 의도적으로 간지럽혔고, 움찔거리며 벗어나려는 팔을 더욱더 세게 옥죄었다.
무력하게 안겨 있는 이혜수, 맞닿은 피부의 감촉과 온기, 냄새에 여지없이 몸 구석이 단단해졌다. 순간, 피하기만 하던 시선이 벼려져 차갑게 닿았다.
“협박하면…… 내가 겁먹고 한 번만 봐 달라고 사정할 줄 알았어요?”
오랜 정적 끝에 나온 말에 혜수의 허벅지를 더듬던 손이 얼굴 위로 올라왔다. 피하려는 듯 고개를 바깥쪽으로 틀었지만, 턱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럴 리가. 낮에는 나랑 놀다가 저녁엔 다른 남자랑 스캔들 내는 여자잖아.”
“마음대로 생각해요.”
한껏 노려보며 여유 있는 척 말했지만, 안광은 탁했다.
부러질 것 같은 손목을 앞으로 붙잡아 당겼다. 그제야 흔들린다. 여전히 엉망인 손톱, 생긴 지 얼마 안 된 상처투성이의 손끝과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뭐 하는 거예요!”
당기는 힘과, 빼내려는 힘이 상충하며 붙잡힌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대대적인 스캔들까지 낼 만큼 대단한 연애 하시면서 아직도 엉망이네. 뭐가 이렇게 불안한데? 또 기자들이 괴롭히기라고 했나.”
그날 밤처럼 손끝에 입을 맞추고, 혀로 둥글게 핥고, 약하게 물었다. 그 어떤 희롱보다 수치스러웠다.
“하지…… 마!”
“정우주가 썩 든든한 남자 친구는 아닌가 봐.”
불 꺼진 것처럼 탁했던 눈동자가 다시 빛나기 시작했고, 수치심에 얼굴은 붉어졌다.
참을 만해. 아무렇지 않아. 괜찮아, 따위로 견고하게 쌓아 둔 혜수의 자기 방어선을 이 남자는 또 너무 쉽게 무너뜨리며 침입했다.
“고작 한 번 잤다고, 아는 척하지 마.”
말과는 달리 마음은 애가 탔고, 몸이 닿은 것만으로 온몸이 찌릿거렸다. 미칠 것 같았다.
“횟수에 권한이 생기는 거야?”
서준은 비웃으며 버둥거리는 혜수의 허리를 잡아 다리 사이로 바짝 당겨 안았다. 가슴을 밀어 내는 손바닥 아래로 빠른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한 백 번쯤 하고 나면, 그땐 아는 척해도 되는 건가?”
그때,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부엌으로 돌아갔고, 힘이 풀린 사이 혜수는 재빨리 일어나 우주에게 향했다.
문이 열린 전자레인지와 개수대 안에서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정우주!”
“아아, 제기랄…….”
“도대체 뭘 한 거야?”
“보면 몰라? 전자레인지 터져서 프라이팬에 익히려고 했는데, 기름까지 튀어서 얼굴에 묻었어. 미친, 존나 아파. 얼굴 좀 봐 줘. 흉 질 것 같아?”
오른쪽 볼을 가까이 내밀며 호들갑을 떨었다. 큰 자국은 아니었지만, 빨갛게 부어올랐다.
“붓긴 했는데 흉 질 것 같진 않아. 얼음부터 대.”
“네가 의사도 아니면서 어떻게 알아? 시발, 진짜. 되는 일이 없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병원부터 가야겠다.”
오히려 병원 갈 일이 생겨 기쁘다는 느낌이었다.
“주말이잖아. 갈 거면 응급실로…….”
혜수의 말을 듣지도 않고 우주는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 문대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애교 섞인 목소리로 더 울먹이기 시작했다.
통화가 끝나자마자 추궁했다.
“누구야?”
“썸. 피부과 의사야. 화상 위험하다고 얼른 오래. 나 좀 나갔다 올게.”
사진 찍힌 지 얼마나 됐다고 ‘썸’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사진에 있던 그 사람 아이돌…… 아니었어?”
“……아, 아니? 아닌데.”
천연한 부정에 혜수는 어이를 상실했다.
“정우주, 너도 진짜 대단하다. 사진 받고 나랑 스캔들 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새 사람을 만나? 너랑 내가 왜 이렇게까지 됐는지 벌써 잊었어?”
“원래 알던 남자거든? 그리고 사람 인연이라는 게 있어. 타이밍 다 맞춰서 연애하면 너처럼 쥐뿔도 못 해. 아니, 이젠 뭐 내 연애에까지 간섭하려고? 진짜 여자 친구라도 된 줄 아냐? 알아서 할 테니까 너까지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 개 짜증 나네.”
“제발 조심 좀 하라고! 이번엔 그냥 운 좋게 넘어갔을지 몰라도 다음에 감당 못 할 일 생기면 도대체 어쩌려고 그래?”
“아, 씨발 진짜. 그럼 너랑 만나는 내내 나보고 아무도 만나지 말고, 쥐 죽은 듯이 지내라고?! 나 옆에 사람 없으면 불안함 도지는 거 네가 제일 잘 알지 않냐? 아니면 뭐 나랑 진짜 연애라도 해 줄래?”
비릿하게 웃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던 정우주가 뭔가 잊은 듯 금방 돌아왔다. 거실 쪽을 힐끔거리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형이 무슨 얘기 했어?”
“무슨 얘기.”
“없었으면 됐어. 그리고 형한테도 우리 얘기 하지 마.”
“……왜?”
“하아. 너 왜 이렇게 토를 다냐? 애초에 그렇게 약속했잖아! 저 인간은 내가 그쪽인 것도 몰라. 싫든 좋든, 같이 있는 동안에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마.”
“넌 나한테 그런 부탁 하기 전에 상황 설명부터 해야 했어.”
우주가 간신히 화를 참는 혜수의 어깨를 잡았다.
“나, 나도 진짜 몰랐어. 관리하는 아저씨가 분명히 비어 있다고 했다고. 근데 괜찮아. 저 인간은 별채에서만 지내서 마주칠 일도 없을 거야. 화내지 말고, 응? 나 숨 좀 쉬자.”
“정우주.”
“아, 또 뭐?!”
“저 사람, 누구야?”
“……아는 형이라니까!”
“집까지 아는 형이 네가 게이인 걸 모른다고?”
“의심할 거면서 왜 물어봐? 어?! 믿지도 않을 거면서 시발. 내가 아는 형들이 다 내가 게이인 거 알고 있을 것 같아? 정말 옛날부터 아는 형이야! 그, 집안끼리 아는 그런 네트워크가 있어. 말해 준다고 네가 알아?!”
“너 나한텐 거짓말하면 안 돼.”
뭔가 느끼기라도 한 건지 집요했다. 평소 같으면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갔을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넘어지는 혜수 때문에 정우주는 환장할 것 같았다.
“그만 징징대고, 그만 물어봐. 애초에 너만 아니었으면 나도 이 정도까진……!”
“너만 아니었으면, 뭐?”
“하, 됐다.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겠냐.”
‘애초에 너만 아니었으면.’
우주는 아무렇지 않게 상처를 건드리는 문장을 내뱉으며 쿵쿵 소리를 내고 나갔다. 가장 가깝다 믿는 친구는 지금처럼 화가 나거나 흥분하면 누구보다 손쉽게 혜수의 약점을 건드렸다.
무슨 말을 싫어하는지, 무슨 말에 반응하는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흘러내린 머리를 넘기며 엉망이 된 부엌을 둘러봤다. 계란이 터진 전자레인지, 탄 자국이 남은 인덕션, 바닥까지 튄 기름.
어떻게 닦아야 하나 고민하며 큰 그릇을 들어 올렸다. 생각보다 무거웠고, 기름까지 튀어 있어 미끄러웠다. 순식간에 손을 빠져나간 접시가 바닥에 떨어졌고, 와장창 소리를 내며 산산이 조각났다.
“하아.”
가장 큰 파편을 집어 들었는데, 하필 날이 선 부분이 손바닥에 닿으며 금방 일자로 피가 배어 나왔다. 되는 일이 없었다.
그 순간, 목뒤로 소름이 돋았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서준이 성큼성큼 다가와 거리를 좁혔다. 도망이라도 가려는 듯 뒷걸음질 치는 몸을 잡아 번쩍 안아 올리더니 아일랜드 조리대 위에 앉혔다.
그가 유리를 밟는 소리가 날 때마다 아찔했는데, 다행히 실내화를 신고 있었다. 발로 대충 큰 조각들을 구석으로 밀어 내고, 주변을 둘러보던 서준이 물었다.
“이렇게 만들어 놓은 당사자는 어딜 나간 건데?”
“병원에……. 좀 다쳤어요.”
비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