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6. 거짓말과 거짓말, 그리고 거짓말
열어 놓은 문 앞에 갑자기 나타난 남자를 보고, 정우주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형……?”
당황한 건 그쪽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우주의 얼빠진 얼굴을 보자마자 신경질이 튀어나왔다.
“뭐야, 너.”
“강서준? 진짜 형이야?”
눈앞의 그를 보고도 못 믿겠다는 듯 굴자 짜증은 심화됐다.
“뭐냐고 묻잖아.”
정원에서 집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며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낮고, 작은 목소리였음에도 느껴지는 위압감에 우주는 자기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형! 형? 잠깐만! 그……, 내가 다 설명할게! 사정이, 좀 사정이 있었어!”
우주는 두 사람이 마주칠 거라는 생각에 아찔해져 팔까지 허우적거리고 발을 동동 굴렀다.
의미 없는 노력을 비웃듯 곧바로 이혜수가 나타났다.
정우주의 머릿속에 비상벨이 시뻘건 빛을 내며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돌겠네!’
술이 당겼다.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어차피 거짓말이 일상인 인생, 당황은 길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직진밖에 없었다. 윤 회장의 도움도 거절하고 나온 마당에 더는 갈 곳도, 피할 길도 없었다.
혜수를 발견한 서준의 입꼬리가 쭉 올라갔다.
한국에 있는 이상,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만날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빠른 재회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정말 이렇게까지 예상을 벗어나는 사람은 이혜수가 처음이었다.
심지어 입고 있는 원피스는 그날, 사막에서 그가 사 준 그 옷이었다. 낮게 묶은 머리는 살짝 젖어 있었다. 겁먹은 건지, 당황한 건지. 창백해진 혜수를 그냥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입에 문 담배를 빼내자 진한 숨이 어느새 흐려진 하늘 위로 상승했다.
“서준…….”
이 와중에 제 이름을 읊조리는 저 여자가 참 반가웠다.
혜수의 몸은 악몽 안에 있는 것처럼 굳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순식간에 꽁꽁 얼어 버린 몸은 곧 잘게 떨렸다. 그에게 고정된 시선은 저주라도 걸린 것처럼 서준을 벗어날 줄 몰랐다.
반면 그는 지독히도 침착해 보였다. 입고 있던 터틀넥이 답답한지 목 부분을 만지작거렸고, 길게 늘어진 눈은 이혜수를 훑었다. 샅샅이, 무엇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끈질기고 질척였다.
사냥감을 가두는 포식자처럼 다가왔다. 누런 잔디를 밟고, 타일이 깔린 데크까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감히 제 공간을 침범한 것들이 불쾌하다는 듯 쳐다보며 담배를 밟아 짓이겨 버렸다.
“언제까지 구경만 할 거야?”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재차 그 사람임을 확신했다. 누구에게 향한 질문인지 알아차리지 못하다 퍼뜩 정신을 차린 우주가 혜수를 챙겼다.
“어? 어어. 야, 이혜수! 혜수야! 자, 잠깐 올라가 있을래? 뭔가 착오가 있었나 봐.”
우주가 옆에서 뭐라고 계속 떠들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저 뒤에 서 있던 서준이 검지를 코끝에 가져다 대며 비릿하게 웃는 모습이 무서웠다.
그가 조용히 하라고 하지 않았어도 이 황당한 상황에서 혜수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아, 빨리! 조금 이따가 다 설명할 테니까. 어?”
뒤에서 밀어 주는 정우주가 이렇게 고마워질 줄 몰랐다. 손잡이를 붙잡고, 계단을 겨우 오르면서도 내내 그의 시선이 몸 뒤에 남아 있어 몸이 저렸다.
떨리기는 우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계단 끝을 보며 한참 고민하다가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눈을 하고 최대한 느리게 그에게 다다랐다.
“형! 아, 진짜 개 놀랐잖아!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집주인한테 묻기 전에 몰래 들어온 네가 설명하는 게 먼저인 것 같은데.”
정우주가 가까이 다가온 그 순간, 서준의 후각이 날을 세웠다.
하얗지만 건조한 피부, 화장으로 가리려 노력했지만 거무튀튀한 눈 밑과 누런 눈동자, 진한 향수와 체취 사이에서 물씬 느껴지는 알싸한 냄새.
그는 이런 종류의 인간을 잘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뭐래. 나도 몰래 들어온 거 아니거든? 하아. 일단 날이 추우니까 들어…… 아니, 아니다. 나가자.”
두 남자는 멀리 가지 않고, 정원에 놓인 낡은 의자에 자리 잡았다.
“적당한 집 좀 알아봤는데, 급하게 찾다 보니까 아무리 봐도 없는 거야. 그러다 곽 소장님 생각나서 연락드렸더니, 여기 알려 주셨어. 그래서 나는 당연히 비어 있는 줄 알았지! 형이 한국에 있다는 것도 몰랐어. 있었으면 절대 여기로 안 왔어! 아, 진짜야! 억울해! 소장님한테 물어봐!!”
곽동원 소장은 서준의 대리인으로 그가 가진 부동산 계약 및 관리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설마 집주인이 외국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지낼 거라곤 그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고, 우주가 친척이라는 걸 다 아는 사이라 자잘한 과정은 미룬 게 뻔했다.
잘못된 건 없었다. 본채와 별채가 따로 등록된 다가구 주택이기에 계약이 가능한 데다가 서준은 철저하게 별채에서만 지내는 터라 생활에 불편함도 없을 것이다. 유일한 문제는 ‘이혜수’였다.
대답 없이 담배만 태우는 서준의 옆모습에 초조해진 우주가 발꿈치를 잔디에 문지르며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30분도 넘게 떠들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집도 절도 없고, 그나마 있는 아파트는 월세인데 망한 사업의 짐 때문에 생활하는 게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 그 와중에 스캔들이 터져 버렸고, 조용한 데서 지내고 싶다는 혜수를 위해 고민하다가 곽 소장님에게 확인 후 이곳에서 지내기로 했다는 결론.
비록 사업이 망했지만, 자신의 인기가 빛을 보고 있다는 것 역시 빼놓지 않았다.
강서준은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정우주가 빨리 닥치기를 바랐다.
“결론만 간단하게 해.”
동정을 끌어내고, 최대한 상황을 순화시키기 위한 노력이 그 한마디와 사나운 얼굴에 무산됐다. 이럴 때면 돌아가신 이모부와 꼭 닮은 것 같다고, 우주는 생각했다.
“우리, 잠깐만…… 여기 있으면 안 돼? 어차피 이혜수는 형 기억도 못 하는 것 같은데.”
‘우리’라는 말에 비웃으며 새 담배를 물었다. 이게 이렇게까지 거슬리는 대명사였던가.
“내 대리인이 그러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해. 구두 계약도 엄연한 계약이야.”
우주는 그제야 안도하며 긴 숨을 내뱉었다.
“아, 시발. 다행이다. 근데 진짜 언제부터 있었어? 형 보고 기절할 뻔했잖아!!”
“그래. 얼마나 급했으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혜수를 여기로 데려왔겠어. 그게 아니면…… 정신이 나간 건가?”
분명 미묘하게 비웃었지만, 정우주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서준을 따라 일어나더니 팔을 붙잡고 사정하기 시작했다.
“진짜 여기 있어도 되는 거지? 어? 내가 오죽하면 여기까지 왔겠어. 형, 여기 있는 거 알았으면 당연히 무리해서라도 다른 곳으로 갔지. 몰랐다니까. 이혜수 알면…… 난리 나. 쟤 괜찮아진 거 얼마 안 됐어. 자기 잘못 아니라고 옆에서 누누이 말해도 등신처럼 공황 일으켜.”
“공황?”
서준은 전시회에서 숨도 못 쉬고 쓰러지려 했던 혜수를 떠올렸다.
“어! 얼마 전에 정은하가 술 먹는데 실수로 은재 이름 꺼냈다가 진짜 쟤 죽는 줄 알았어. 말로는 괜찮다고 하는데 숨도 못 쉬는 거야. 아니, 솔직히 지가 무슨 죄가 있어? 그런데 여태…….”
우주의 말에 남자의 눈빛이 벌레라도 본 듯 더욱 차갑게 식었다.
“내, 내가 나중에 혜수한테 천천히 얘기해 볼게. 어? 나도 생각 안 한 거 아ㄴ…… 아악!”
살짝 밀었을 뿐인데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잔디밭에 발라당 굴러 버렸다.
“저 여자한테 잘못 없다는 건 나도 알아.”
“아프잖아!”
“한국 일 끝나면 조만간 다시 돌아갈 거야. 시끄러운 일 생기는 거 질색이니까, 그냥 닥쳐.”
“……아아, 정말?! 당연하지!”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구질구질했고, 구차했다.
“윤 회장님한테라도 빌어 보지 그랬어. 잘하잖아.”
맨바닥에 뒹굴며 비난받았지만, 반박할 수도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추운지 훌쩍거리며 코끝을 닦아 냈다.
“그러고야 싶었지. 근데 회장님이 갑자기 결혼하라고 압박하는 바람에 내가 알아서 한다고 큰소리치고 나온 거야. 쥐 죽은 듯이 지내다가 월셋집만 해결되면 바로 나갈게.”
‘결혼’이라는 말에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주먹을 움켜쥐고, 화를 참았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거, 다른 사람들한테 함구해.”
조금 전까지 침울해 있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지더니 손을 꼭 붙들었다.
“암요!! 정은하 나한테 빡돌아서 연락도 안 해. 근데…… 회장님한테도 말하지 마?”
“뭐 좋아하신다고.”
“하긴……. 할머니도 할머닌데, 형 돌아온 거 알면 ‘윤’가 인간들도 난리 나겠다. 형, 그래도 회장님 예전이랑 달라. 부쩍 외로움도 많이 타는 것 같고, 잠도 잘 못 잔대. 그거 알고 다들 눈에 보일 정도로 들락날락해. 외할머니는 자기 언제 죽는지 기다린다고 우울해하고. 결혼 얘기도 그래서 하는 것 같아. 가끔 너무한다 싶다가도 이해가 돼.”
“알 바 아니야.”
“아, 알았어. 그나저나 이혜수가 형을 모르는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다. 또 난리 날 뻔했네.”
“날 모른다고 어떻게 확신해?”
“그거야…… 알았으면 그때처럼 기절했겠지?”
그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하는 정우주의 해맑은 태도에서 서준은 이번에도 제 감을 믿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