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접점-30화 (30/76)

[30화]

“이렇게 된 김에 솔직해져요.”

“……둘 다 기분 더러워.”

혜수는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파란색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다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정우주나 언니나 더는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나도 기분 더럽거든요.”

이혜수의 욕과 표정을 잠깐 믿지 못하던 은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숨을 뱉어 냈다. 입술 한쪽이 비뚤게 올라가고, 길게 연장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병원에 있던 날, 언니 인터뷰해 줬던 기자님이 찾아왔었어요. 모르셨겠지만 그분, 청춘 전시 할 때마다 기사 써 주시는 분이라 친해요.”

“그래서? 내가 틀린 말 한 거 있어?”

“사실이냐고 물으시더라고요. 도자기에 갖다 붙인 그딴 거 알고 싶지도 않지만, 적당히 맞춰 드렸어요. 힘들 때 언니가 날 도와준 건 사실이니까. 잘 써 달라고 부탁까지 드렸어요.”

“하, 고맙다고 해야 하니?”

추한 소리를 내며 은하의 자존심이 부서졌다.

“새 이름까지 붙여 주면서 도와준 건 고맙게 생각해요. 그래서 그리라는 거 열심히 그렸어요. 인터뷰할 때마다 은혜라는 이름 갖다 붙이고, ‘언덕’ 홍보할 때도 이용하고, 하지 말라고 한 상품 만들어서 판매한 것도, 그림을 멋대로 판 것도…… 전부 다 그러려니 했는데, 이젠 그만하세요.”

“네 고귀한 이름 갖다 쓴 건 참 미안한데, 그 이름이 이 정도가 된 게 다 누구 덕인 것 같아? 누구 때문이냐고!!”

귀가 찢어질 것 같은 목소리에도 혜수는 끄떡하지 않고 웃을 뿐이었다.

알고 지내는 내내 이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은하는 당황했지만, 혹시라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까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려 제 허벅지를 마구 꼬집었다.

“이럴 때 보면 언니랑 윤 회장님, 두 분이 정말 똑같네요. 훌륭한 분들이 왜 그렇게 제가 덕을 봤다는 걸 확인받고 싶어 하시는지.”

“뭐?”

“큰 소리 내지 마세요. 전 아무것도 가진 게 없지만, 언니는 가진 게 많잖아요. 여기서 우리가 다투는 거 들켜 봤자 언니만 손해예요.”

늘 순응하던 얼굴에서 처음 보는 반감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너, 진짜. 아주 날을 잡았구나? 그동안 그렇게 말하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어? 얌전한 척, 착한 척, 억울하고, 불쌍한 척 혼자 다 떨더니 속으로 그렇게 기만하고 있었어?!”

챙 아래의 작은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워졌다.

“어쩌면…… 어쩌면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게 기만이라면, 기만이겠죠.”

그림을 그릴 때마다, 결국 완성할 때마다 정은하가 제게 보여 줬던 애정과 열정이 모두 자기를 향한 거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계약 해지 하고 싶으면 이참에 하세요. 어차피 3년 내내 드린 것도, 보여 준 것도 없으니 명분은 충분하겠죠. 이언 오빠한텐 제가 따로 연락할게요.”

혜수는 주머니에 있던 만 원짜리 한 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등 뒤로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한참을 달렸다.

길거리를 뛰는 내내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분명 열에 아홉은 의미라고는 없는 것들이겠지만, 기사 아래로 적혀 있던 댓글들과 어우러져 수군거림처럼 느껴졌다. 또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사람이 없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다가 주르륵 미끄러졌다.

“하아, 하…….”

벽에 닿은 모직 코트가 망가지는 소리가 났지만 일어나지 못했다. 몸이 떨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파리하다 못해 색을 잃은 얼굴에 공포가 일었다.

‘앞으로는 소란 피우고, 하고 싶은 말도 다 해요.’

양심 없게도 보고 싶어졌다.

진작 지워진 손바닥의 파란 글씨는 환영처럼 보였다 사라졌다 했다. 어쩐지 그 번호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감히 걸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딱딱한 벽에 닿은 머리가 아픈 줄도 몰랐다.

서준이 알려 준 대로 호흡했고, 그와 같은 브랜드의 담배를 꺼내 피웠다.

깊이 생각하지 말자고 할수록 하릴없이 깊이 빠져들기만 했다.

***

“여긴…… 너한테 너무 멀지 않겠어?”

“됐어. 매일 있을 것도 아니고, 밟으면 30분밖에 안 걸려. 정 필요할 땐 내 집에서 자면 돼. 너야말로 알겠다고 한 거 후회하지 마라. 여기 편의점도 차 타고 가야 돼.”

갑작스러운 이사는 당분간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눈에 띄지 말고, 죽은 듯이 조용히 있어 달라는 우주의 부탁 때문에 결정됐다.

“새집 구할 때까지만이라도 여기서 조용하게 쉬자. 정은하나 회장님도 여긴 몰라.”

“사업 때문에 대출도 받을 만큼 받았다면서. 무리하지 마.”

스캔들이 터진 이후, 정우주는 모든 걸 ‘알아서 하겠다’고 선언했다. 외할머니의 결혼 강요를 일차적으로 막아 내는 대신 모든 지원은 끊겼고, 정은하와도 크게 다툰 것 같았다. 아무리 천하의 윤 회장이나 제 친누나일지라도 고집불통이 된 우주를 막아 낼 수 없었다.

“하, 저기요! 나 정우주거든? 집 살 돈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고 아직 맘에 드는 집을 못 찾은 거야.”

어이없다는 듯 허세를 떨자 혜수가 시선을 돌렸다.

빨간색 스포츠카는 아기자기한 주택들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조성된 단지의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그곳엔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혜수가 고개를 들어 멍하니 자신이 머물게 될 곳을 올려다봤다.

“월세? 전세?”

뭔가 수상해 던진 질문에 입술이 비쭉 튀어나왔다. 짐을 내린 트렁크를 일부러 소리 내어 세게 닫더니 발을 구르며 다가와 코끝을 잡아당겼다.

“이 미친, 자꾸 의심해라.”

“그냥 물어본 거야.”

“아는 형네 집이고, 월세야. 됐냐!”

우주는 뭉그적거리는 어깨를 잡아 억지로 떠밀었다. 위엄 있는 검은색 대문과 중문을 하나 더 열고서야 나타난 내부는 차갑고 단단해 보이기만 하던 겉과는 영 딴판이었다.

“짜잔!”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분위기에 압도당하여 입술 사이가 살짝 벌어졌다. 하얀 벨벳을 붙여 놓은 것 같은 벽과 곳곳에 우드로 포인트를 준 세련된 거실엔 벽난로까지 있었다.

현관과 비슷한 아이보리색의 대리석이 깔린 거실. 정원이 보이는 통창에 가까워질수록 천장이 높아져 2층까지 뚫려 있는 구조였다.

창을 향해 놓여 있는 베이지색 소파에 앉았다. 정원을 안에 품고 있는 폐쇄적인 형태에 마음이 놓이다가도, 다시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답답해졌다.

“원래 정성스레 지은 집이라 관리해 주시는 분이 낡은 곳만 보수하고, 필요한 것만 사다 넣었대. 1층 방은 내가 쓸 거니까 2층은 네가 다 써. 아, 그리고 저기 마당에 작은 집은 별챈데, 집주인 짐 있으니까 들어가지 마.”

“응.”

혼자 외딴섬처럼 지어져 있는 별채는 동화 속에 나오는 과자 집 같았다.

“욕실이랑 세탁기가 위에도 있어. 찬찬히 보면서 더 필요한 거 없는지 확인해 봐.”

도저히 엄마를 견딜 수 없어서 뛰어나와 살게 된 자취방은 겨울이면 춥고, 여름이면 더운 닭장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도 감사했다. 밤낮없이 아르바이트하고, 간신히 그려 내는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그릴 수 있게 된 현실이 기뻤으니까.

그런 혜수에게 지금 정우주는 더 필요한 게 없는지 채근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정원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 보고 이것저것 건드리며 연신 떠들었다.

“필요한 거 없어. 사치는 더더욱 필요 없고, 너도 그럼 안 돼.”

단호하게 끝나는 말에 눈빛도 날이 서 있었다.

“무, 뭐? 왜? 뭐!”

늘 뻔뻔한 정우주지만 이럴 땐 잔뜩 기가 죽었다. 허리춤 위로 손을 올리고 센 척했지만,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너 엄마한테 가방 해 줬잖아.”

“야…… 그건, 입막음이야. 네가 연락 안 받으니까 또 나한테까지 연락 와서 왜 진작 말 안 했냐, 섭섭하다 이러시는데 내가 거기다 대고 뭐라 하냐? 우리 때문에 좀 피곤해지신 것 같기도 하고, 사람들이 막 아는 척해서 곤란하시대. 그래서 그냥 위로하는 차원에서 작은 거 샀어. 큰 것도 아니야!”

“이혜균한텐 돈 빌려줬고?”

“하, 진짜. 네 동생은 왜 이렇게 입이 싸냐?”

심증만 있어서 떠본 거였는데, 정곡이었다. 하필 제일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결말이었다.

“얼마나?”

우주는 조심스레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삼천. 누군가에겐 선뜻 내줄 수 있는 돈일지 몰라도 혜수에겐 1년을 생활하고도 남을 만한 큰돈이었다.

눈앞에 차려진 밥상, 떠먹기로 해 놓고 이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숨이 찼다. 거기다 엄마의 가방과 삼천이라는 돈까지 더해져 명치끝이 꽉 막혔다.

“네 스캔들 덮어 주겠다고 받은 값은 이 집에서 지내게 해 주는 거로 충분해. 아니, 옷 쌓인 아파트도 솔직히 나한테 과했어. 그러니까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러지 마. 또 그러기만 해.”

우주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머리를 헤집었다.

“너 이럴 때마다 존나 피곤해, 진짜. 알아?! 어머니 생각은 안 해?”

“그렇게 엄마가 좋으면 네가 가서 새 아들 해. 피곤하면 다 때려치우든가.”

“와……. 이혜수 진짜 미쳤나 봐. 너 뭐 잘못 먹었냐? 애가 왜 이렇게 예민해?!”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맛을 안다는 말이 괜히 나온 소리가 아니겠지. 평생을 풀만 씹던 인간이 순식간에 육식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뻔뻔하고, 제 분수를 모르고 살았더라면 차라리 조금 더 편했겠지만, 이혜수는 지나치게 올곧았다.

성난 그를 두고, 계단 위로 올라갔다.

천장으로 연결되는 구조라 위에서 거실이 보였다.

필요한 게 다 있어서 내려가지 않고도 생활이 될 것 같았다. 2층의 거실은 좁고, 가구 하나 없이 빈 곳이었지만 햇살이 잘 들어오고 깨끗했다. 보스턴백을 내려놓고, 냉기 어린 바닥에 주저앉았다.

여기서 작업을 해도 될 것 같단 생각 끝에 자조적인 웃음을 띠며 중얼거렸다.

“못 그리는 주제에.”

우울한 기분을 애써 지워 내려 욕실에 들어가 세수를 했다. 수건을 찾지 못해 소매로 대충 닦고 나오는데 1층이 소란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우주가 정원이 있는 곳을 향해 중얼거리고 있었다. 통화라도 하는 건가 싶었지만 주춤거리며 한 걸음, 한 걸음 물러나기까지 했다. 못 볼 걸 본 것처럼 겁에 질린 모습으로.

벌레라도 나왔나 싶어 얼른 내려갔다.

“왜 그래?”

황급히 몸을 돌린 우주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고, 정원엔 키 큰 남자가 담배를 입에 물고 서 있었다.

차가운 시선이 젖은 혜수의 얼굴을 꿰뚫었다. 한 번도 다정한 적 없었던 것처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