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접점-29화 (29/76)

[29화]

***

밖으로 나온 윤 회장이 가방을 건네자 바로 옆에 있던 황 비서가 받들었다.

“퇴원 못 하게 해라. 영양제든 안정제든 뭐든 핑계 대고 내일 밤까지 누워 있게 해. 분명 날 밝자마자 도망가려 할 게야. 그리고 지난번에 얘기했던 대로 주변인들 파악해서 정리해라.”

“예.”

“할머니!!”

우주가 분홍빛 머리를 마구 긁어 대며 쫓았다. 사람들이 많지 않았지만 지나가는 몇몇과 병원 내 직원들이 그를 보고 힐끔거렸다. 세 사람의 발걸음이 무의식적으로 빨라졌다.

승강기에서 내리자마자 검은색 고급 세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윤 회장이 조수석에 타려던 우주를 뒤로 불렀다.

“옆에 앉아라.”

대꾸 한번 못 하고, 입술을 비쭉 내민 채 올라타자 차는 누가 볼세라 금방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몰랐지만,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에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도 못했다. 아까부터 주머니 안에서 진동하고 있는 휴대 전화도 꺼내 보지 못했다.

5분 정도 달렸을까. 대로변에 차를 세운 황 비서는 입김이 나오는 날씨임에도 밖에 서서 대기했다.

“전화부터 확인해.”

확인해도 좋다는 명령을 듣고 나서야 휴대폰을 꺼낼 수 있었다.

“정은하야.”

“하이고, 또 난리 나겠구먼. 됐다. 받지 마라.”

“그냥 두면 나중에 더 난리 칠 거야.”

“두래도. 네가 지금 받아 봐야 욕밖에 더 먹겠어? 가뜩이나 도예전 반응도 별로인 것 같던데 지금은 아무것도 알리지 말고 둬라.”

윤 회장은 차창을 내리며 암 레스트를 위로 올렸다. 안에는 담배와 크리스털 재떨이, 라이터에 고급스러운 무늬가 새겨진 힙플라스크까지 들어 있었다. 불을 붙이자 우주는 인상을 쓰며 제 쪽의 창문을 더 내렸다.

“사진에 찍혔던 차 버리고, 만나던 그 새끼한테까지 내 손 뻗치는 게 싫으면 알아서 치워.”

“내가 알아서 해. 하, 그리고 제발 혜수 좀 그냥 가만히 두면 안 돼? 시키는 일만 해도 충분하잖아. 도대체 걔 주변인들을 왜 할머니가 정리해?”

“작은 빌미라도 남겨 두지 말아야지. 넌 혜수랑 최대한 빨리 날 잡아라. 저 물건, 어딘가가 이상해졌어.”

주홍빛 가로등 아래,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윤 회장의 눈빛은 시퍼렇게 빛나는 듯했다.

“회장님이 이러는데…… 지금껏 제정신이어도 이상하지.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한다. 할머니 입장에선 이혜수 미운 건 알겠는데 적당히 좀 하세요, 예?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내 문제야. 애 미치는 꼴 보고 싶어? 주변에 미친놈이 나 하나로 부족해?!”

윤 회장이 재떨이를 들어 올리려 하자 우주가 움찔거리며 팔로 얼굴을 가렸다. 순식간에 줄어든 담배를 버리고 새것을 물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지 정녕 몰라서 그래?”

“나까지 걔한테 그러면 너무 불쌍하잖아!!”

“불쌍한 거 아는 새끼가 눈앞에서 술 처마시고 그 지랄을 떠는 게냐?! 염병할 놈.”

잔뜩 취해서 혜수가 만났던 남자를 먼지 나게 패 버린 일이 바로 얼마 전이었다. 본인이 괴롭히는 건 생각하지 못하고 대단한 보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난동을 부렸다.

두둑한 합의금으로 일단락 지었지만, 앞으로의 일이 그런 식으로 풀릴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살벌하게 욕하면서도 윤진영의 속은 불안하게 끓었다. 누가 봐도 모자라고, 어리석어도 정우주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지켜야 했다. 소중한 핏줄을 허무하게 잃는 경험은 한 번으로 족했다.

“그건 또 어디서……. 아, 할머니! 제발 나한테 관심 좀 꺼!!”

“네 그 약해 빠진 정신머리도 문제다! 지금이야 이혜수가 죄책감에 붙잡혀 있고, 네가 불쌍해서 챙겨 준다지만 더 이상 그럴 필요를 못 느끼면 가차 없이 버릴 게다. 좋다며! 그럼 그렇게라도 데리고 있어!”

“이혜수가 장난감이야?”

“그러는 네놈한텐 도대체 걔가 뭐니?”

윤 회장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정우주를 한심하게 쳐다보다가 비릿하게 웃었다.

“못난 놈.”

깊게 빨아들인 숨을 내뱉자 짙은 연기가 아직 젖어 있는 저녁하늘로 부유했다.

정적이 이어지는 동안 죽은 이들을 대신해 붙잡아 두고, 이용하며 놓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상념이 이어졌다.

장난감이라기엔 이용 가치가 다분했고, 애정 없이 원망했다.

돈과 권력, 명예 따위를 초월한 힘 앞에 모든 인간은 결국 동등해지는 가능성을, 윤 회장은 그 아이에게서 봤다.

본인과 자기 자식들은 절대 해내지 못한 일을 ‘생존’한 이혜수는 너무나 손쉽게 실현시켰다.

그걸 소유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또 다른 격차가 생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완전히 가질 수 있는 인간은 없으리라.

그러니 본능과 의지를 갖고 달아나려 하더라도 쉽게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윤진영은 오늘 비서의 보고로 확인한 은하의 작품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깨진 자기들을 이어 붙이고, 열등감의 색으로 얼룩진 조악한 도자기들은 어쩐지 제 속을 닮아 있었다.

“사진 보낸 범인부터 잡을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손자의 말에 늘어지던 생각의 고리가 툭 끊어졌고, 눈빛은 더욱 표독해졌다.

“넌 그놈 못 잡는다.”

“그걸 어떻게 알아?”

“돈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원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내밀지도 않았어. 이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몰라? 우린 머리채부터 잡힌 거야. 알아? 널 내세워서 홍보하고, 돈 버는 내 사업체, 천오백 가맹점주들 목숨 줄 휘어잡은 거나 다름없다.”

담배를 짓이겨 끄며 혀를 찼다.

“할머니 말대로 그 새끼가 혜수랑 스캔들 터진다고 가만히 있을 것 같아?”

“그렇게라도 막아 놓지 않으면 어쩔 건데! 해결 방법 있으면 말해 봐. 어디 뚫린 입으로 지껄여 보라고!”

결국 참지 못하고 손을 올렸다. 맨손으로 어깨와 목덜미를 내려치다가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휴대폰으로 내려쳤다. 퍽, 퍽 소리가 났다.

“아, 아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혜수랑 결혼을 해?! 차라리 다른 사람을…… 아, 왜 결론이 그런 쪽밖에 없는 건데!”

“그러라고 여태 곁에 둔 거니까.”

“할머니!”

“이혜수만 한 적임자 없어. 그냥 하라는 것도 아니고, 필요한 건 다 해 줄 거다. 집, 차, 생활비……. 그림만 그릴 수 있는 환경만 주어지더라도 감사하겠지. 우선 내일부터 관계 인정하고, 사진부터 내보내.”

“퍽이나 이혜수가 감사합니다, 하겠어?!”

“감사하진 못해도 거역하진 못한다. 네놈은 당장 내일 잘 곳이 없다는 공포가 뭔지 모르지.”

“그딴 거 알고 싶지도 않아!”

“황 비서!”

윤 회장이 소리치자마자 우주가 앉아 있던 쪽의 문이 벌컥 열렸다. 황 비서는 순식간에 그를 끌어내렸다. 다시 문고리를 잡아 봤지만, 대차게 버려진 그는 도로 위에 덩그러니 남겨 둔 채 차는 출발했다.

***

혜수가 잠깐 입원했다가 퇴원한 후, 정우주는 공식적으로 연인 관계를 인정했다. 소셜 네트워크에 짧은 글을 남겼다. ‘힘들 때마다 늘 제 곁을 지켜 줬던 사람’이라고. 결혼설은 부정했다.

혹시라도 범인이 사진을 공표할 상황도 대비하며 주변 정리도 잊지 않았다. 만난 사람 역시 성 정체성을 들키면 안 되는 정도의 영향력을 가졌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납득하지 못했지만, 납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후 한동안 남녀 사이는 친구가 될 수 있다, 없다는 주제가 미디어를 채웠다.

일단 저지른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대체로 연애하는 정우주, 약간 모자란 국민 막내 삼촌에 대한 반응은 뜨겁고, 긍정적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간 크게 윤 회장에게 직접 사진을 보냈던 범인은 이상할 정도로 미동도 없었다.

“미대 언니, 임신한 거 아닐까?”

물론 혜수에겐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카페에 앉아 휴대폰에 집중하고 있던 은하가 깜짝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혜수는 모자를 푹 눌러썼다.

“에이, 그건 아니겠지.”

“맨 처음에 기사 났을 땐 결혼이라고 했잖아.”

대화의 주제가 바뀌지 않은 걸 보아하니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차리진 못한 것 같았다.

“결혼을 전제로 만난다는 거 아니야? 애 낳으면 대박이긴 하겠다. 우주가 아빠…… 푸흡. 애 둘 키우는 기분이겠네.”

“분홍 머리 진짜 귀엽지 않아? 무슨 염색한 몰티즈 같아.”

“아하하, 미친! 염색한 몰티즈래. 찰떡이네.”

친구의 표현이 마음에 들었는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니, 이럴 거면서 왜 여태까지 아니라고 잡아떼고 버텼나 몰라.”

“서로 좋아만 하다가 어느 순간에 불이 붙었겠지. 남녀 사이가 그렇잖아.”

혜수는 피식 웃으며 검은색 야구 모자를 더 깊숙이 눌러썼다.

“제작진 인터뷰 봤는데 정우주가 드라마랑 성격 차이가 거의 없대. 좀 철없는데, 사람 좋아하고 장꾸 같대.”

“좀 철없고, 장꾸면 어때. 돈 많으니까 됐지.”

“그건 그렇지. 아…… 미대 언니 부럽다. 봉 잡았다. 꽃길만 걷겠네.”

고등학생 때도, 사람들은 뒤에서 정 남매를 두고 혜수의 ‘스폰서’라고 지칭했다.

그 뒤로 작은 간식이나 음료 같은 것들도 굳이 거절했다. 배가 고프고, 먹고 싶어도 주머니 안에 든 백 원짜리 몇 개만 만지작거리던 그때와 현실은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하하 호호거리며 웃던 두 사람이 자리를 뜨자마자 은하는 기다렸다는 듯 테이블을 내리치며 성질을 부렸다.

“진짜 거지 같다. 왜 똑같이 난 스캔들인데 정우주는 여자 사람 친구랑 만난 지고지순하고 귀여운 남자, 다정한 남자 뭐, 그딴 말도 안 되는 수식이 붙으면서 너한테는 임신 같은 말이 도냐? 다 망해서 빚밖에 안 남은 알코올 중독자 새끼가 누군데? 꽃길은 무슨 꽃길이야.”

열을 내며 길길이 뛰는 은하를 보던 혜수는 갑자기 웃어 보였다.

“언니, 제 슬럼프랑 전시회를 엮어서 낸 기사가 묻힌 게 화가 나는 거예요? 아니면 정우주가 절 이용하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뭐?”

겁 없이 초연해진 맑은 눈은 다른 사람의 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