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멍청한 놈. 사람들이 주는 관심으로 빌어먹고 살겠다고 결심했으면은, 쥐 죽은 듯 네 욕망 숨기고 살아야 한다고 내 몇 번이나 말했지! 그런데 그걸 전부 다 네 손으로 엎어 버려?!”
“하……. 씨발, 진짜. 어떤 관음증 새끼야!”
“도련님!”
윤 회장이 우주의 멱살을 쥐었다. 귀 뒤로 곱게 넘겨 놨던 흰 머리가 내려오며 얼굴의 반을 가렸다. 회색으로 옅어진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그 가운데가 섬뜩한 노란빛을 띠는 것 같기도 했다.
“네 처지도 모르고 저치가 불쌍하기만 하느냐?!”
옆에 혜수가 누워 있었음에도 폭발한 윤 회장은 좀처럼 화를 누르지 못하고 으르렁거렸다. 황 비서와 정우주가 두려움에 떨며 아무 말도 못 했다.
윤진영 회장은 각종 요식업과 호텔까지 주무르고 있는 큰손으로 크고 작은 사업단의 본체였다. 그 모든 걸 혼자서 이뤄 낸 대단한 이의 기백은 웬만한 남성들조차도 덤비지 못할 정도로 억셌다.
창백한 얼굴로 가만히 누워 있던 혜수가 참지 못하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지금…… 이게 다 무슨 얘기예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인형처럼 얌전히 누워 있기만 하던 혜수가 소리도 내지 않고 일어나자 놀란 세 사람이 눈을 크게 뜨고 달려들었다.
“이혜수!”
“혜수야, 괜찮니?”
조금 전의 다툼은 잊고 얼른 곁에 다가왔다.
윤 회장의 귀와 목엔 새하얀 머리에 어울리는 진주로 된 화려한 보석이 매달려 있었다. 검은색의 트위드재킷, 붉은색 립스틱은 그 눈빛과 어울렸다. 무엇 하나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정우주.”
“너 정신이 좀 드나?”
“야, 괜찮아? 나 알아보겠어? 응? 어디 아프진 않아? 안 부러졌냐?”
우주의 커다란 눈은 이미 울었는지 빨갛게 부어 있었다. 지랄맞다가도 이럴 때 보면 눈물도 많고, 약해 빠졌다.
“나 괜찮으니까…… 방금 그게 무슨 말인지 설명해.”
금방 울먹이더니 시선을 침대 시트 위로 떨구었다. 미안하다며 중얼거리기 시작하더니 욕을 하고,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윤 회장이 혜수의 얼굴을 만지며 대신 말을 이었다. 붉은색 손톱이 제 얼굴 위에 닿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고, 딱딱하게 경직됐다.
“황 비서! 저거 데리고 나가고, 가서 닥터 불러와! 혜수야, 내가 다 설명하마.”
“예!”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정우주는 무력하게 밖으로 끌려 나갔다.
“엊그제 회사로 우편 하나가 도착했다.”
윤 회장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사진을 들어 혜수에게 건넸다. 흐릿하지만 분명 정우주였다. 차 안이었고, 그의 애인과 다정하게 스킨십하고 있는 모습. 뒤에는 온갖 욕과 비난 문구가 적힌 편지 하나가 더 붙어 있었다.
모델 활동만 하던 정우주가 배우로 인정받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딸 많은 집’이라는 드라마에서 철없지만,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막내 삼촌을 연기하며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런 그가 게이라는 사실은 업계 안에서도 아는 이가 몇 명 없었다.
대중들의 사랑을 받기로 한 이후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지고 있었다. 또 무엇보다 윤 회장의 의지이기도 했다.
“혜수 너도 잘 알겠지만…… 우주, 이거 이제 막 걸음마 뗀 애새끼다. 연기력 논란이 있었어도 이제야 드디어 인정받기 시작했다.”
혜수는 사진을 제 다리 위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렇다고…… 저랑 엮인다고 해결될 일이에요, 이게?”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눈빛은 벼려져 있었다. 보통 때와는 다른, 순하지 않은 반응에 윤 회장은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건조한 얼굴 옆으로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적어도 혐오하진 않겠지.”
“저는…….”
“내 너한테 설명을 먼저 했었어야 하는데, 미안하구나. 금방 정정 기사 내 주마. 아니라고 할게. 근데 범인부터 찾아야 하지 않겠나? 조금만 말미를 주려무나.”
혜수는 쥐고 있던 사진을 찌그러뜨렸다.
지금 가장 슬픈 건, 우주와의 스캔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받는 오해나 욕도 아니었다. 그저 자기가 나서서 아니라고 말할 때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제 무능함이었다.
담당의가 병실로 들어오며 얼어붙을 것 같았던 분위기가 잠깐 누그러졌다.
검사 결과도 나쁘지 않고 크게 이상은 없었지만, 교통사고는 후유증이 무서운 법이니 조심해야 한다는 게 결론이었다. 의사는 안정을 위해서 하루 입원을 권했고, 윤 회장에게 허리를 깊이 숙이며 사라졌다.
“오늘 퇴원하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의 돈으로 누워 있기 싫겠지. 안다. 배고프고 힘들어도 내색 한번 안 하고 너 스스로 버텨 온 것도 전부 기특하다만, 도움받을 줄도 알아야지.”
“불편해서 못 자요.”
“우주 집은 괜찮고?”
혜수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다 고개를 떨어뜨렸다.
“급하게 집 보증금까지 뺐다고 들었다. 미련하고, 어리석기는. 그렇게 속이 곪아 버리니……. 혜수야. 네가 원하는 건 전부 다 들어주마. 집이든, 차든 필요한 건 다 해 주마.”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기세였다. 부탁임에도 불구하고 명령조로 들릴 만큼 무거웠다.
“……회장님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저한테 ‘아가’라고 부르기 시작한 거, 우주가 게이라는 걸 아셨을 때부터였죠.”
“내가?”
“그날 쓰러지셨고, 병원에서부터 그러셨죠. 그 이후론 바깥에서도 틈틈이 큰 목소리로 아가라고 부르셨어요. 그래서 더 사람들이 수군거렸죠.”
“기억이 안 나는구나.”
“차라리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이런 일이 생길까 봐 여태 우주랑 제 스캔들이 터지더라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쉬쉬하셨던 거예요? 아니면 설마…… 처음부터 회장님이 시작하신 거예요?”
한껏 맹랑해진 태도에 윤 회장의 눈동자가 한 바퀴 돌아 다시 혜수에게 돌아왔다. 이유나 상황은 모르겠지만, 확실히 달라졌다.
“말씀해 주세요! 제가 정말…… 정우주랑 결혼이라도 하는 게 회장님께서 바라시는 그림인가요?”
떨리는 몸으로 한 최대의 발악이었지만 윤 회장은 게슴츠레 눈을 뜨더니 이혜수의 손목을 붙들고 순식간에 압도해 버렸다. 약점을 들이밀었다.
“올해는 은재한테 안 다녀왔더구나.”
핏기가 사라진 얼굴을 보고 안심하듯 웃는 윤진영의 얼굴은 흡사 악마 같았다.
“너는 이제 잊으려고 하는지 몰라도 나는 네가…… 내 딸과 손녀 대신 살아 돌아온 그날부터 너를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혜수의 눈에 빛이 사라졌다. 새파랗게 질려서 한참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다가 숨을 토해 냈다. 눈물을 참아 보려 하얗게 질릴 때까지 두 손을 꼭 쥐었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앞으로도 필요한 게 있으면 다 맞춰 주마.”
“정우주가 원하지 않을 거예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주는 제가 하는 일 좋아한다. 한번 단맛을 본 이상 절대 포기 안 하지. 그거 못 하게 되면 아마 죽을걸. 그 애가 얼마나 연약하고, 어리석은지 너는 누구보다 잘 알지 않느냐. 은재 손도 못 잡아 줬는데, 우주마저 그렇게 두면 쓰겠니?”
벼랑 끝까지 몰린 우주의 곁에 때마침 집도, 절도 없는 혜수가 서 있는 상황. 물러설 곳이 없었다.
‘너한테 있는 거라곤 그림으로 사람들한테 잠깐 인정받았다는 알량한 자존심, 그거 하나야.’
엄마의 말이 귓가에 반복되며 혜수의 빈속을 긁어내렸다.
“조건이 있습니다.”
우연한 도망 덕분에 제대로 살겠다는 결심이 들었지만, 다시 돌아온 곳에 제 자리가 없는 건 여전했다. 일단 살아야 했기에 선택했다.
“이 촌극에 그냥 이용당할 생각 없습니다.”
당돌한 발언에 날카롭게 올라가 있던 윤 회장의 눈이 서늘해졌다. 혜수의 손등을 문지르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암, 거래는 확실히 해야지. 근데 너, 눈빛이 달라졌구나. 모로코에서 또 저승 문턱까지 다녀오기라도 한 게냐? 누워 있던 은재가 벌떡 일어나겠어. 날 나쁜 사람처럼 만드는데, 이렇게 살기로 한 것도 모두 네 선택 아니었냐.”
맞다. 모두 이혜수의 선택이었다.
10년 전, 윤 회장의 큰딸과 어린 손녀를 두고 혼자 살아남았다. 재활에 필요한 모든 값을 치러 주었다. 혜수의 엄마, 숙현은 몸도 성치 않은 제 딸을 끌고 가 시키는 건 뭐든지 하겠다고 선언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고개만 끄덕였다. 그게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더는…… 원하시는 그림은, 안 그리겠습니다.”
“그러렴. 우주랑만 잘해 준다면야 내 억지로 널 붙잡고 있을 생각 없다. 아, 근데 혜수야. 너 혹시 남자 생겼니?”
“……무슨 말씀이세요.”
“얼마 전에 서해 건설 김 이사랑 식사했다. 두 사람, 모로코에 같이 갔었다며. 네 애인이 왔다면서 침을 튀겨 가며 말하던데. 사실이야?”
몸을 일으키며 말하는 진영을 혜수가 다급하게 붙잡았다.
“아무 사이 아니에요! 그냥 관광객이었는데 김 이사님이 저한테 무례하게 구셔서, 그래서 좀 도와준 거예요!”
“말이 많아지니 오히려 이상하구나.”
절박한 목소리와 다시 선명해진 눈빛에 윤 회장이 입매를 구겼다. 특유의 웃음을 띠었다. 자잘하게 박힌 주름이 선명해졌다.
친절하고 다정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다시 차가워졌다.
새로운 약점을 찾아냈다. 너를 휘두를 만한 것은 얼마든지 있으니 얌전히 말 들으라는 새 목줄을 들이밀었다.
“……그러지 마세요. 괜한 사람까지 건드리지 마세요.”
“설사 만나는 놈이 있다 한들 소리 안 나게 정리하면 그만 아니겠느냐. 네가 말만 잘 들으면 괜한 사람까지 건드릴 필요 없겠지. 연락하마.”
윤 회장이 나가자마자 무거웠던 공기가 풀렸다.
짙푸른 색으로 얼룩진 손바닥을 문지르며 혜수가 침대 위로 쓰러졌다. 더는 그 사람이 이런 자신과 엮이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