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접점-27화 (27/76)

[27화]

「국민 막내 삼촌 정우주 내달 결혼!」

「정우주의 그녀, 미대 여신 이혜수는 누구……?」

「정우주, 화가 이혜수 결혼」

분명 조금 전까지 자신과 입을 맞추고 있던 여자가, 저녁 약속까지 한 여자가 제 외사촌과 결혼한다는 기사였다.

파랗게 질린 서준을 보고 더욱 놀란 건 현진이었다. 혼자 착각해서 여기까지 날아왔냐고 놀려 주려 했는데, 그런 얼굴을 보는 건 10년 전 이후 처음이었다.

“그, 굳이 너한테 말 안 하려고 했는데, 혜수. 너희 외할머니 밑에 있는 것 같아. 그분한테 후원받는 입장이라 그런지 어쩔 수 없이 우주랑도 자주 엮여! 어, 그래서 그래! 애초에 다른 작가들이랑 활동하는 방식도 좀 다르더라고. 네 친척 동생이 운영하는 스튜디오에 전속 계약 됐는데 그림도 거기서만 살 수 있어. 상업적인 활동도 제이 윤에만 쏠리고…… 좀 이상해!”

새하얀 호접란을 보고, 윤 회장의 이름을 듣고 질려 버린 혜수의 얼굴을 떠올렸다. 뭔가 이상하다는 건, 일찍이 눈치채 버렸다.

“네가 왜 변명을 해? 나도 알아.”

“……그새 뒷조사라도 했냐? 소름 돋아, 이 미친놈.”

서준은 대꾸 없이 짐이 쌓인 진료실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뒷조사, 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이름 세 글자를 검색하면 연관된 검색어엔 익숙한 이름들이 따라왔다.

활동 내역과 추측성 기사들까지 정독했다.

포털에 뜨는 사진을 보며 드는 묘한 기분에 자못 음흉한 방식이라는 걸 자각하면서도 검색 결과 마지막 페이지까지 확인했다. 상대의 정체를 알아 버린 동시에 표현할 길을 잃은 관심과 감정을 그런 식으로 분출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견딜 수 없었다.

서준은 다 버리고 뛰쳐나갔던 계절, 그 한가운데 서서 여전히 괴로워하는 이혜수가 궁금했고, 보고 싶었다.

물론 한국까지 돌아온 건 지나치게 충동적인 결정이라는 걸 인정했다.

“뭐, 10년 만에 우연히 만나서 반할 수도 있지. 혜수가 좀 예쁘냐? 근데 아무리 그래도 너는…… 너는, 넌 좀 아니지. 차라리 남사친이었던 우주 쪽이 훨씬 더 현실감 있어. 애초에 너처럼 우악스러운 놈을 받아 줄 리도 없잖아. 괜히 잘 사는 애 들쑤시지 말고, 응? 내 말 듣고 있냐?”

현진의 물음에 서준은 다시 덤덤해진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닥쳐.”

애초에 정은하 전시회를 찾아간 목적은 이혜수에 대한 일을 묻기 위함이었다.

비록 사실 확인은 할 수 없었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우연한 만남과 불안정한 이혜수를 본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열렬하게 키스하고, 저녁까지 약속한 여자가 갑자기 결혼을 발표했다. 뭔가 잘못된 거라는 걸 확신하면서도 정리되지 않아 불쾌했다.

머리를 헤집으며 일어나려는데 입원실 밖으로 탈출한 검은색 고양이가 냉큼 달려 나오더니 서준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뭐야.”

기척도 느껴지지 않은 빠른 행동에 어깨가 튀어 오를 정도로 움찔거렸지만, 제 손바닥만 한 생명체가 더 놀랄까 꿈쩍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현진만 쳐다봤다.

“와, 강서준. 이 와중에 간택을 당하네. 방금 먹이 주는 사이에 문 열어 놨더니 나왔나 봐. 얘 진짜 낯가림 심하고 사람 손 싫어하는데.”

“뭐?”

“네가 좋대.”

현진이 고양이와 서준을 번갈아 보더니 박수를 치며 히죽거렸다.

“야, 잘됐다. 그러지 말고 네가 얘 키우면 되겠네!”

순식간에 눈빛이 날카로워졌지만, 고양이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그를 비웃으며 술술 떠들기 시작했다.

“내 말이 틀리냐? 너 돈 많고, 시간 많잖아. 부탁 좀 하자. 어? 가뜩이나 예민한데, 병원에만 두면 스트레스 엄청 받을 거야. 제발 부탁해애!”

그림자처럼 온통 검은색인 고양이가 옆으로 누웠다. 허벅지 위가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고, 꼬리 끝이 따로 살아 있는 것처럼 살랑거렸다. 황금빛의 눈동자가 서준을 담으며 반짝였다.

“아, 강서준!”

“나 호텔에서 지내.”

함부로 밀어내지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서준을 보고 낄낄거리며 현진은 제 할 말만 하기 바빴다.

“이참에 호텔에서 지내지 말고, 네 집에서 지내면서 집사 노릇 해 봐. 호텔도 하루 이틀이면 몰라도 피곤해. 그리고 얘가…… 엄청 불쌍해. 혼자 살아남았는데 두 번 버려졌어. 키우라고 안 할게. 입양될 때까지 임시 보호만이라도 좀 부탁한다. 어?”

현진은 능글맞게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다리 위에 있던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눈을 뜬 고양이가 서준을 올려다보며 그릉그릉, 진동이 느껴지는 소리를 냈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말과 두 번 버려졌다는 강조에 그는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긴 고민 끝에 서준이 입을 열었다.

“좋아.”

현진이 쾌재를 부르며 주먹을 쥐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방방 뛰기까지 했다.

“예쓰!!”

“대신 조건이 있어.”

얼핏 불쾌함으로 일그러졌던 반듯한 얼굴이 다시 살벌하게 빛을 냈다. 맛있는 걸 코앞에 둔 짐승의 눈빛이었다.

“뭐, 뭔데?”

“명의 좀 빌려줘.”

“네?”

서준이 내민 뜻밖의 조건에 온몸의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현진이 고개를 저었다.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아, 아니. 자본력 빵빵한 본인 명의 놔두고 저처럼 하찮은 시민의 명의 따위 빌려서 뭐 하시려고요? 나, 신용 등급도 안 좋고, 대출도 안 나와! 얼마 전에 차 샀는데 그거 할부하는 것도 겨우겨우 했어.”

“이름만 빌려주면 돼. 네 이름 사용하면서 생기는 부대 비용이나 세금은 내가 다 처리할 거니까 걱정 마.”

“됐다. 그냥 고양이 내가 볼게!”

서준의 품 안에 누워 있던 고양이를 현진이 안으려고 하자 하악, 소리를 내며 이빨을 드러냈다.

“야, 너까지 나한테 이러기니?”

“쫄지 마. 안 죽어.”

“죽음까지 결심해야 되는 일이냐?! 뭔데! 음흉하게 웃지 말고, 말을 해! 말을! 너 같으면 빌려주겠냐?!”

“네가 네 입으로 이상하다며. 그러니까 도와.”

***

‘말하는 걸 깜빡했는데 나 집착이 좀 심해요. 그쪽이 도망간다고 해도 찾아낼 거야.’

‘기다리는 거 잘하는데,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말아요.’

찾아내지도, 기다리지도 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입을 벙긋거려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 풍경이 제 무의식의 찌꺼기라는 걸 깨달았다.

절대 닿지 않는 그에게 닿으려고 허우적거리다 겨우 눈을 떴을 땐, 이미 늦은 밤이었다. 약간의 두통이 있었지만 일어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납이라도 달린 것처럼 무거운 상체를 일으켜 가장 먼저 확인한 건 손이었다.

떨림이 있었지만 쥐었다 폈다 할 수 있었고, 통증도 없었다. 멀쩡하게 움직이는 양손을 확인하고 안도하다가 파랗게 얼룩진 손바닥에 다시 절망했다.

옆에 있던 티슈 한 장을 뽑아 지워 보려 했지만, 더 번질 뿐이었다.

울컥했다.

어차피 안 될 인연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대단한 사랑이나 운명 같은 게 아니어도 서로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했는데 결국 또 이렇게 됐다.

행복한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보란 듯이 불행이 몰아닥쳤다. 기만이라도 하는 것 같은 타이밍이었다.

거의 빈 수액 병을 확인하고 다시 누웠다. 몸에 큰 이상은 없는 것 같은데 샤워실까지 포함된 1인실을 보아하니 우주나 은하가 다녀간 게 분명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기억을 떠올려 보려는데 병실 바깥이 소란해졌다. 사람들이 들어오기 전에 얼른 눈을 감았다.

“회장님, 진짜 사람이야? 어떻게 이렇게까지 해?”

정우주와 그의 외할머니인 윤 회장, 그리고 비서까지 우르르 들어와 병실 안인 것을 잊은 것처럼 소란을 피웠다. 빽빽거리며 우는소리를 내는 정우주와 달리 윤 회장은 그런 그가 가소로운 듯 웃었다.

“황 비서, 얘 말하는 거 들어 봐라! 남들이 들으면 내가 애 잡은 줄 알겠구나.”

듣기만 하던 비서가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왜소한 그는 둘 사이에 껴서 한겨울임에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늘 그런 식이었다.

“도련님. 사고는 안타깝지만, 회장님이 일부러 그러신 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는 언론사에 항의할 예정이었지만, 도련님 사진 때문에 대기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지금 사진 따위가 문제야?! 내 스캔들 막으려고 안 그래도 아픈 애를 이용해요? 애가 얼마나 놀라고, 아팠으면 이렇게 사고까지 났겠냐고!”

화를 낼 때면 심하게 날카로워지는 정우주의 목소리에 가만히 누워 있던 혜수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냥 사진이 아니었으니까요. 거기다 작가님 사고는 단순히 눈길에서 미끄러져 난 사고입니다. 저희가 어떻게 한 게 아닙니다.”

“시끄러워! 할머니는 등신같이 약한 애를 앞세워서 날 숨긴 거야!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내가 전화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기나 해?! 더는 이혜수 이용하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지?”

우주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윤 회장이 벌떡 일어났다. 불같이 성을 내며 옆에 있던 빨간색 가방을 그에게 집어 던졌다.

“으아악!!”

“아이고, 도련님!”

“이 모자란 새끼한테 입 아프게 설명해 줄 필요 없다. 사진 보여 주거라. 어서!”

고개를 끄덕이던 황 비서는 제 가방을 뒤졌다. 그 안에 뭐가 그리 많은지 한참을 찾다가 갈색 서류 봉투 하나를 우주에게 건넸다.

여전히 날이 선 시선을 숨기지 못하고 우주가 씩씩거리며 봉투를 열었다.

“이게 뭐야?”

보자마자 기세등등하던 어깨가 한껏 움츠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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