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전시회 하러 모로코 왔더라.”
“그 테러 난리 났을 때 너도 있었어?! 왜? 아니, 그, 혜, 혜수가 널 알아봐? 어?”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현진은 그 상황을 다 알고 있는 눈치였다.
“아니.”
“하아……. 하긴 세월이 많이 지나긴 지났지.”
“나도 못 알아보다가 나중에 알아봤어.”
“아, 혜수가 좀 옛날이랑 달라지긴 했어. 사고 때문에 얼굴도 그렇고…… 크흑.”
만약 혜수가 먼저 서준을 알아봤다면 혹은 서준이 일찌감치 혜수를 알아차렸다면.
두 사람이 같이 밥을 먹는 일도, 관광지를 돌아다닐 일도, 함께 밤을 보낼 일도 절대 없었을 것이다. 새삼 그게 신기했다.
“오늘도 봤어.”
“또?!”
“평창동에 정은하 도예전 갔다가.”
“네가 거길 왜 가?”
“확인할 게 있어서.”
이유야 뭐가 됐건 혜수와 마주쳤다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현진은 한참 말을 골랐다. 저 이상야릇한 표정이 거슬렸다.
“세상 참 좁네. 악연이라고 해야 할지, 운명이라고 해야 할지. 야! 너 어디 가냐?”
아까부터 수상하게 움직이던 현진의 시선을 감지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멋대로 움직였다. 로비, 데스크를 훑다가 진료실 안까지 들어서는 게 순식간이었다.
“생각보다 좁네.”
“어휴, 이 정도면 궁궐이나 다름없지요.”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처치실과 수술실이 나왔다. 수가 많지 않아도 유리문으로 입원실까지 깔끔하게 꾸며 놨다. 그 가장 위 칸엔 검은색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얘는?”
“전의 병원 문 닫기 전에 들어온 앤데 골치가 아파. 가족들이랑 길에서 살던 앤데, 사나워서 임보가 안 돼. 모레부터 우리 강아지들도 데리고 출근해야 하는데 언제까지 가둬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사람을 봤는데도 기운 없이 앉아 눈만 움직였다.
“가족은?”
“엄마랑 형제들이 있었는데……. 아니, 됐다.”
동물에게 큰 관심은 없지만,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하는 현진 때문에 그 이유를 짐작했다. 마음이 동했다. 손끝으로 문을 톡톡 건드려도 움직이지 않았다.
“흐흠. 서준아, 그만 나가자.”
더는 그 안으로 못 들어가게 막으려는 것 같은 어색한 몸짓에 서준은 현진의 어깨를 잡아 물건 치우듯 밀어 버렸다. 종이 인형처럼 팔랑팔랑 떠밀린다.
“야아!! 하, 진짜 귀신같은 새끼.”
복도 끝에 크고 작은 캔버스들이 몇 개 세워져 있었다. 그럼 그렇지. 이유 없이 ‘서준아.’라고 다정하게 부를 리가 없다. 바로 뒤에 있던 현진의 눈동자가 당황한 듯 빠르게 움직였다.
캔버스의 모서리를 매만지며 주저앉아 자세히 살폈다. 그 뒤에는 전의 그림에서 봤던 것과 마찬가지로 ‘HyeSu’라고 작게 적혀 있었다.
“최현진, 언제부터 이런 고상한 취미가 생겼냐?”
“내, 내가 뭐 엄청난 팬이라거나, 무슨 큰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몇 번 우연히 소식 듣고, 전시회도 보고 그러다 보니까. 넌 잘 모르겠지만, 인기 작가다? 초반에 유명해지면서 잡음이 생겨서 그렇지, 하는 개인전마다 그림도 거의 다 팔렸어. 공모전 수상도 많이 했고, 해외에서도 알아줘. 이게 다 투자야!”
제 돈 모아서 산 그림들이 큰 죄라도 되는 것처럼 급하게 변명했다.
서준이 혜수에 관해서 까맣게 잊고 있었을 때, 화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건 현진을 통해 들은 이야기였다.
그땐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10년 전, 제 앞에서 울다가 실신한 여자아이가 기특하게 잘 커서 그림까지 그리고, 심지어 유명하기까지 하다니 천만다행이라고.
그런 혜수를 눈앞에 두고, 애먼 곳을 보며 응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 다시 들어올 거야.”
“갑자기? 아니, 잠깐…… 귀국하겠다는 거야?”
“뭘 그렇게 놀라?”
좀처럼 말의 진도를 따라잡지 못하던 현진과 다르게 서준은 태연하게 그림들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갑작스럽잖아! 어?! 소장님이나 나나 죽더라도 제발 시체는 온전하게 찾을 수 있게 곱게, 여기서 죽으라고 얼마나 부탁했냐? 들은 체도 안 하더니. 대가리에 총 맞았냐?”
“그렇다 쳐.”
그림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펴보는 반짝거리는 눈을 수상하게 보던 현진이 가까이 다가가 그의 휴대폰을 빼앗았다.
“너, 설마 혜수랑 무슨 일 있었지?”
“……있었으면?”
의외의 대답에 휴대폰을 꼭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빠졌다.
“네가 누군지 얘기했어?”
휴대폰에 고정되어 있던 천진한 눈이 천천히 식으며 현진에게 돌아왔다.
“아직.”
“왜?”
“도망갈 것 같아서.”
그 말의 진의를 읽는 건 좀처럼 힘들었다. 진심인지, 장난인지. 아니면 미쳐 버리기라도 한 건지.
“그러다 나중에 알면 도망 안 가냐! 애먼 사람 괴롭히려 하지 말고 아무 말도 못 할 거면 그냥 지금처럼 죽은 듯이 살아. 마주치더라도 모르는 척해.”
“덜하진 않아도 도망은 못 가게 해야지.”
“도망 못 가게 붙잡아 놓고 뭐 어쩔 건데?”
***
“의식은 있는데 말을 안 합니더! 눈만 몇 번 끔뻑거리고, 예! 그러고 앉았습니다! 세게 부닥치진 않은 것 같은데, 예, 예……. 퍼뜩 좀 와 주이소!”
통화를 마친 택시 기사가 정신을 잃은 혜수의 어깨를 조심스레 흔들었다.
“이봐요, 아가씨! 정신 좀 차리 봐라!”
눈을 뜬 혜수가 가장 먼저 확인한 건 손이었다. 파란색 숫자와 아까 넘어진 상처를 빼곤 멀쩡했다. 몸 어딘가가 크게 다친 게 아니라는 건 체감했다.
“그쪽 문짝이 망가져서 열리질 않아 직접 나와야 해! 어?”
차가 미끄러지면서 도로에서 한 바퀴 돌았고, 보호 난간에 조수석 쪽이 부딪혔다. 문은 난간에 바싹 붙어 우그러진 상태였고, 창문도 깨졌다. 외상은 없었지만, 조금만 더 충격이 컸더라면 혜수의 손은 물론이고 목숨마저 위험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기사는 오늘 사고가 많이 난 탓에 사고 처리가 늦어진다고, 조금 더 기다리라고 소리쳤다. 딴에는 혜수를 안심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어째 본인이 더 불안해 보였다.
혜수는 고개만 끄덕였다. 괜찮다고 대답하고 싶은데, 입이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차 안에서는 어서 나가라는 듯 삐삐삐― 하는 경고음이 연신 울렸고, 기사는 시끄럽게 떠들었지만 도무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벌 받는 건가.’
부서진 문틈으로 찬기와 눈이 조금씩 새어 들어오는 걸 보고 있자니 황당한 죄책감이 발현했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기일을 챙기지도 않았고, 찾아보지도 않은 탓일까.
힘겹게 올렸던 하얀 손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허벅지 위로 툭 떨어졌다. 내리깐 시선에 파란색 글씨가 들어왔다.
자꾸 이 남자 생각이 나 큰일이었다.
***
“글쎄.”
안경을 머리 위로 올린 현진이 제 가슴팍을 치며 망설였던 질문을 꺼냈다.
“잘 살던 애 앞에 뒤늦게 나타나서 뭐 원망이라도 할 거냐? 욕이라도 하게?”
“내가 어떻게 그 애를 원망해.”
사람들한테 치여서 숨도 못 쉬는 걸 방금 보고 오는 길인데 어떻게 원망할까. 무슨 이유를 붙여 욕을 할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답들이 그의 몸 안을 떠돌았다.
“그럼 뭔데? 뭐, 새삼 그 얼굴 보니까 반했냐. 연애라도 하게?”
웃으며 가볍게 던진 말에 서준은 입을 다물었다.
“야……, 왜 대답을 못 해. 미친놈아. 나 무서워.”
“그럴까.”
심각한 표정을 확인한 현진이 황급히 손을 들어 올렸다.
“아니! 더 말하지 마. 지금 네가 나한테 무슨 얘기를 해도 안 들을 거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마. 아악!! 그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하지 말라고!!”
“왜 물어봤어.”
현진은 고개를 마구 저으며 경악하더니 서준을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 키는 비슷하지만, 체격은 완전히 달라서 흔들리는 쪽은 현진이었다.
“돌았냐? 미쳤어? 어?!”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미친놈이 누구 같은지 물어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모로코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준다 한들 믿을 수나 있을까. 서준은 그 기억을 떠올리곤 정성스레 말을 골랐지만, 현진은 고개를 저으며 방어했다.
“아니, 그냥 말하지 마.”
비련의 주인공처럼 절망하고, 혼자 미쳐서 쇼하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믿기 어렵다는 눈치로 밖으로 나가더니 또 냉큼 돌아왔다.
“너는 그렇다 쳐도 혜수는? 울다가 네 앞에서 기절했던 애야. 그런 상황에서 네가 누군지 알면……. 아앗! 저도 좋아요. 같이 사귀어 주세요! 함께 행복합시다! 결혼해요! 이러겠냐? 정신 차려, 제발!!”
대체 어디까지 가려는지 모를 소란한 오두방정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때 되면 말할 거야. 그러니까 닥치고 그림이나 다 나한테 보내 줘.”
양아치 같은 요구에 정신을 차린 현진이 욕을 읊조리며 나갔다.
다시 조용해진 틈을 타 그림들을 살폈다.
하나같이 어둡고, 웅장한 그림들 같아도 자세히 보면 그 터치가 무척이나 섬세했다. 세포 하나하나 구현해 놓은 것 같은 정물화와 의미를 알 수 없는 추상화를 보다 보니 소름이 돋았다.
무슨 힘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린 이를 보고 싶어지기까지 했다.
아니, 이건 핑계일까.
우리 사이에 나쁜 접점이 있다고 하면, 이혜수는 무슨 얼굴을 할까.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자꾸 입이 말랐다.
한참이 지나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현진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들어왔다. 예민한 고양이는 잊은 모양이었다.
“야! 강서준! 너 이거, 이것 좀 봐!”
“뭘?”
그가 보여 준 휴대폰 화면엔 익숙한 사람들과 말도 안 되는 기사들이 올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