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많이 밀리는구먼요. 요 앞에 내려 드릴 테니 지하철 타고 가이소. 그게 빨라.”
“네, 감사합니다.”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남자가 눈 소식을 알고 있었는데, 정작 여기 사는 이들은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 복잡한 퇴근길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대륙 고기압이 크게 확장되며 예상 적설량을 훨씬 웃도는 많은 양의 눈이…….
라디오에선 이제야 눈을 조심하라고 했다.
와이퍼의 빠른 움직임에도 눈이 옆으로 내리며 쌓일 정도였다. 도로는 선을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었고, 꼬리에 꼬리를 문 차들이 가득했다. 신호등에 초록불이 켜졌음에도 움직일 수 없었다.
심지어 몇몇 차들은 미끄러지기 시작했고, 그걸 휴대폰으로 촬영하는 이들도 보였다.
“어휴, 염병들을 하는구먼.”
내리막길을 앞둔 그때, 택시 기사는 무의식적으로 브레이크를 살짝 밟았다. 앞바퀴가 멋대로 돌더니 쭉 미끄러졌다. 동시에 핸들이 멋대로 돌아 버렸다.
“어?”
아차 싶었다.
불길한 택시 기사의 목소리를 알아차렸지만 이미 손을 떠난 바퀴가 제멋대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주도권을 잃은 차가 눈길에 쭉 미끄러져 멋대로 굴러가다가 보호 난간을 들이받았다.
***
“기자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정은하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커피를 마시고 있던 남자가 손사래 쳤다. 진갈색의 재킷에 안경이 진부하다 싶을 정도로 직업적 느낌을 내고 있었다.
그가 소속된 출판사는 아직도 종이로 된 잡지를 내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예술 분야를 진중하게 다루는 정통성으로 평판이 자자했다. 그런 곳과의 인터뷰는 입지를 다질 좋은 기회였다.
“괜찮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도예가로서 최초 인터뷰 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근데 방금…… 은혜 작가님입니까?”
정은하에게 은혜를 찾았다.
“네? 아, 네. 맞아요.”
“두 분 정말 친하시군요. 솔직히 이쪽 분야 인간관계가 겉치레인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근데 작가님이 도와주시고 하는 거 보고, 우린 정말 대단하다 싶었어요.”
“……뭘요. 친동생이나 다름없는걸요.”
“시너지 효과도 장난 아닐 것 같은데, 도자를 시작하고 첫 전시까지 준비하면서 은혜 작가님 영향도 있었습니까?”
미리 받았던 질문지와는 차이가 있는 질문이었다.
“없다곤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은혜를 보면 영감을 많이 받습니다.”
“그렇군요. 다복을 상징하는 항아리가 주체인데, 전시 제목은 ‘깨진 독’입니다. 과한 무늬와 구멍이 전체적으로 기괴하다는 부정적 평도 있습니다. 그 안의 어떤 부분이 은혜 작가와 연관이 있을까요.”
계속 거론되는 은혜의 이름과 부정적인 비평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 아마 언론에 얘기하는 건 처음일 텐데……. 아시다시피 혜수가 아니, 은혜 작가가 최근에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옆에서 봐 온 산증인이죠. 그리고 싶어도 그리지 못하는 모순, 깨진 독처럼 결핍될 수밖에 없는 감정적 상황. 그런 거겠죠.”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음에도 거짓말이 술술 튀어나왔다. 기자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타이핑을 서둘렀다. 상대의 집중력이 깊어졌다는 걸 단숨에 알았다.
열등감과 자격지심 때문에 회화를 버리고 홧김에 시작한 도예였지만, 어리석게도 또 이혜수에게 묻어가는 길을 택했다.
“은혜 작가님이 슬럼프시라고요?”
“네, 좀 어렵습니다. 환경도 그렇고 전 남자 친구와 헤어진 지도 얼마 안 됐어요. 고민이 많습니다. 거기다 슬럼프를 슬럼프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이 정도 이야기면 은혜와 묶여서 화제성을 얻고 더불어 이혜수가 얌전하게 그림을 그만둘 수 없을 효과까지 가져올 거라고 확신했다.
정은하는 욕심에 눈이 멀어 어리석게 굴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두뇌 회전이 비상한 여자였다.
빠르게 타이핑하던 기자의 눈빛이 노트북의 알림음과 함께 갑자기 번뜩였다.
“작가님, 그럼 이혜수 씨와 정우주 배우의 사이도 알고 계셨던 겁니까.”
“……예?”
#5. 선택한 여자와 간택당한 남자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서준이 갤러리를 나오자마자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에서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손을 허공으로 뻗어 눈송이 하나를 잡았다. 코트 깃을 여미는 얼굴에 소년 같은 웃음이 묻어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순순히 맞이하는 겨울이었다. 추위와 눈에 격하게 요동치던 감정이 생각보다 잠잠했다.
이혜수가 자신의 눈앞에 살아 숨 쉬고,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겨울을 버틸 수 있었다.
헤어지고 나서야 ‘은혜’의 정체를 알아차린 서준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몸의 회복과 참고인 조사까지 모두 마치고 오느라 귀국이 좀 늦어지긴 했다.
큰 목적이나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처음엔 그저 잘 지내는지 궁금했고, 보고 싶었다. 씩씩하고, 밝은 성격이니까 괜찮을 거라고 막연히 예상했다.
그런 그의 생각은 오늘 있었던 우연한 만남에서 철저하게 박살 났다. 이혜수는 괜찮지 않았다.
언 바닥을 딛는 구두 소리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뚝 멈추고 결국 돌아섰다.
계획했던 일들이 모두 틀어졌다. 다시 만나면 사실 내가 누구고, 우연히 그 모로코에서 만나서 반가웠고, 앞으로 네가 잘 지냈으면 한다는 말 따위를 건네려 했다.
이혜수만 괜찮았더라면 예정대로 됐을지도 모른다.
‘왜 자꾸…… 내가 이럴 때만 나타나요?’
보자마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안고, 입 맞추기 바빴다. 거기다 만나자는 멋없는 고백 같은 것도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이혜수와 도대체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하는 자문도 잠시, 만나 보자고 했다.
“제기랄.”
유치한 청춘 영화에서조차 쓰지 않을 것 같은 말을 후회하면서 차를 몰았다.
세검정로를 지나, 국회대로를 타고 한 시간 정도 달렸다. 아직 등에 남아 있는 불편한 감각은 시도 때도 없이 길이 밀리는 이런 도로를 운전하기에 적합한 상태는 아니었다. 연신 벨트를 당기며 등을 곧추세웠다.
사막의 세컨드 하우스가 폭발한 이후, 뒤늦게 도착한 요원들에 의해 겨우 살아남았다. 물론 안에 남아 있던 증거는 모두 날아갔다.
그나마 요한이 수집한 영상 증거와 나중에 국도에서 화물차를 잡아 압수했다지만, 그것도 경쟁 카르텔이 요란하게 총기 난사를 벌이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누구 하나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사람 없이, 죽거나 다친 피해자만 남은 상황.
‘준, 이 사람 맞아요?’
요한이 건네준 보고서엔 총에 맞아 사망한 시체들이 길옆에 쌓여 있는 사진도 있었다. 안타깝지만, 모건도 거기 있었다.
늠름한 체구에 유머러스한 성격으로 어디서든 늘 사람이 따랐다. 술 한잔 들어가면 노인네 같은 말을 떠들어도 밉지 않았던 사람이 더는 없었다. 눈 한쪽이 뚫리고, 목울대 아래가 잘린 덩어리일 뿐이었다. 잔인한 도륙은 전형적인 마약 카르텔의 살해 방식이었다.
그 와중에 스페인 클랜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던 엘리스는 제가 꾸민 일이 아니라고 부인해서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물론 데나로 계열사의 대표직에서 해임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앞으로 평생을 국가와 집안의 감시 아래에서 살아가겠지만, 적어도 배곯으며 살지는 않을 것이다.
그곳에 두고 온 광경을 상기하며 신호가 바뀌는 타이밍을 잠깐 놓쳤다.
빵! 빠앙!
금세 뒤쪽에서 경적을 울렸다.
큰 사거리를 지나서 세 블록 정도 들어가면 20년이 조금 넘은 5층짜리 건물이 나왔다. 리모델링을 이제 막 마친 터라 아직 비어 있었지만, 도보로 5분 거리에 지하철역도 있었고 주변에 공원과 맛집들이 속속들이 숨어 있어서 가치가 상당했다.
1층엔 동물 병원과 식당만 들어와 있었는데 아직 두 곳 다 준비 중이라 어두웠다. 병원 쪽으로 들어서자 내부는 아직 어수선했다.
데스크 뒤에서 회색 스웨트 셔츠에 청바지 차림인 남자가 나왔다. 동그란 안경에 앞머리만 올려 묶고 있어서 좀 우스운 꼴이었다.
“이, 이 미친놈!!”
그는 서준을 발견하자마자 삿대질을 하고 욕부터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래, 나도 반가워.”
“뭐야? 갑자기 뭐냐고!”
고무줄로 묶어 놓은 앞머리를 서준이 손가락으로 튕기자 더 펄쩍 뛰며 욕했다. 격했지만, 오랜 친구 사이의 지극히 평범한 반응이었다.
아직 한창 정리 중이었는지 여기저기 포장되어 있는 상자와 물건들이 쌓여 있었고, 동물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 광경을 둘러보던 서준은 로비 의자 뒤로 긴 코트를 넘기고 앉았다.
“개원했다고 들었는데?”
“개원식만 하고 영업은 모레부터 할 거야.”
“목 탄다. 커피라도 줘.”
“이 새끼가……. 저기 커피믹스랑 정수기 안 보이냐? 우리 집에서 인간은 취급 이하야!”
다리를 꼬고 앉아 두리번거리던 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밖에만 있다 보니 한국 부동산 시세를 잘 몰랐던 것 같더라. 우리가 한 터무니없는 계약, 수정 좀 해 볼까.”
“하! 진짜, 어이가 없다.”
현진은 거칠게 숨을 뱉으며 정수기 옆으로 다가갔다. 커피 봉지를 탈탈 털어 내고, 뜨거운 물을 부어서 익숙한 손놀림으로 젓더니 양손으로 받쳐 그에게 건넸다.
“일단 달달한 것 좀 드시고…… 물 양은 괜찮으시겠습니까?”
“대통령이 와도 셀프라더니?”
“갓물주님은 다르시죠. 아니, 곽 소장님 대리인으로 앞세워서 계약서도 다 쓰고, 개원식마저 한 마당에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 입장이……. 서울 시내 한복판에 주차장까지 빵빵한 건물에 새로 개원했다고 동네방네 소문 다 냈어요.”
조금 전과 달리 한껏 얌전해진 친구의 태도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달달한 커피를 홀짝였다.
“농담이야.”
현진이 어금니를 악물고 손바닥을 비비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아하하! 우리 갓물주님, 농담이 하고 싶으셨구나! 그럼 이제 진담을 해 보실까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전화 한번 없다가 어쩐 일이실까요? 곽 소장님 말로는 시세가 미친 듯이 오른 건물도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팔아 주세요.’라고 지랄했다면서.”
“혜수랑 만났어.”
“하하, 그랬구나. 혜수랑…… 뭐?”
현진이 입을 쩍 벌리며 경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