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수의사 선생님’은 혜수의 오랜 팬이었다. 첫 전시회부터 꾸준하게 작품을 사 준 건 물론이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꽃다발과 카드에 커피까지 보내 줬다.
자신을 소개하는 일에 적극적이진 않았지만, 수의사라는 건 알려 줬다. 그 이후로 모두 ‘수의사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이번에 동물 병원 이전한다고 프런트 데스크에 걸 만한 그림 원한다고 하셨어. 50호 정도가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넌 어때?”
혜수는 씁쓸하게 웃으며 차창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죄송하지만 거절해야겠네요.”
“뭐?”
“저 취업하려고요.”
은하 역시 혜수를 따라 차창 쪽으로 몸을 휙 돌렸다.
“뭐라고?”
“혹시 리오라는 외국인, 기억나요? 제 전시회랑 우리 스튜디오에도 몇 번 오셨어요. 잘생겼다고 언니가 좋아했는데.”
“어? 어어, 기억해. 그 얼굴은 못 잊지.”
은하는 심각한 표정을 지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 우연히 만났는데 외국의 유명 가구 회사 대표님이래요. 서울에 공식적으로 지점 낼 계획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너한테 거기서 일하래? 네가 무슨 일을 해?”
“홍보도 하고, 판매도 하고…… 괜찮아요. 그림도 그릴 거예요. 다만 아르바이트냐 정직이냐의 차이일 뿐이죠.”
은하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야, 미친년아! 그게 그렇게 네 말처럼 쉬울 것 같아? 아르바이트는 잠깐씩이라지만 정규 직원으로 일하면 네 시간도 없어질걸?! 돈 때문에 그런 거라면 차라리 수업해!! 그렇게 벗어났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봤어?!”
화를 내는 이유는 다르겠지만, 정우주의 반응도 비슷했다. 계속 자기 집에서 지내면서 그림만 그리라고 했다. 이 나라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르는 남매였다.
혜수는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리고 난 뒤에도 많은 일을 했다. 졸업 후 현역 작가로 활동하면서도 레스토랑, 입시 학원 강사, 카페, 하다못해 편의점까지 다녔지만 먹고 싶은 걸 못 먹을 때도 많았다.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일해도 집에서 만들어 놓은 빚과 생활비만 나가도 숨이 찼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림은 계속 그릴 거예요.”
“하, 시발…… 그걸 말이라고. 아오! 속 터져!! 아니, 잘됐어. 일할 거면 할머니한테 얘기할 테니까 제이 윤 들어가. 거기 가서 비서든 뭐든 하라고!”
제이 윤으로 들어가라는 섣부른 말이 곧바로 튀어나왔다. 그림을 그리지 않는 혜수의 쓸모 방향은 이미 논의가 끝난 문제인 것 같았다. 물론 당사자인 이혜수를 제외하고.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야! 어디 가!”
단호한 거절에 은하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모로코에 다녀온 이후로 어딘가 좀 이상해진 느낌이었다.
혜수는 그런 의심을 무시하고, 빠르게 걸었다.
운명이나 연애,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남자 같은 걸 감당하기엔 퍽퍽한 제 현실을 잠깐 잊고 있었다.
망한 사업으로 옷 더미에 둘러싸인 친구의 집에서 지내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일자리를 권유받고 덥석 물 만큼 각박하다는 걸 망각하고 있었다.
사막의 오아시스에 머물러 있던 마음이 순식간에 눈 내리는 현실로 돌아왔다.
“끝나는 거 기다렸다가 오랜만에 회장님 댁에서 저녁이라도 먹고 가. 바로 근처잖아. 아니면 나가서 다 같이 외식이라도 하든가.”
혜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말을 꺼낸 은하가 뒤통수를 긁었다.
“왜? 불편해? 너무 그러지 마. 내가 너 모로코 갔다 와서 충격이 커서 힘들다고 부르지 말라고 그랬더니 얼마나 섭섭해하시는 줄 알아?”
“약속이 있어서요. 인터뷰 잘해요, 언니.”
전 같으면 무조건 알았다고 했을 텐데, 뭔가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혜수의 변화에 어쩐지 초조해진 은하는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려는 어깨를 붙잡았다.
“이혜수, 너 다시 생각해! 슬럼프는 누구나 겪는 거야. 네가 거기서 이렇게 지면 안 돼.”
애초에 이겨 본 적 없는 혜수에게 은하는 ‘진다’고 표현했다.
3년 동안 보여 주는 결과물이 없었고, 손에 이상이 생겼다는 걸 숨겼다. 은하나 윤 회장에겐 슬럼프나 작품 준비로 둘러댔기에 그저 그렇게 짐작만 하고 있었다.
“안 그리겠다는 거 아닌데.”
“처음엔 누구나 그렇게 말하지! 병행할 수 있다고, 다 해낼 것처럼 말해도 결국 도태돼! 졸업하고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만 따져 봐도 보이지 않냐? 그렇다고 네 주제에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 윤 회장님한테 다 말할 거야! 그런 줄 알아!!”
도망치듯 밖으로 빠져나왔다. 눈은 펑펑 내리고 있었고, 캄캄해진 주변에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5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이런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한 달 전에 봤던 사막이 더 환상 같았다.
눈이 더 쌓이기 전에 이 높은 동네에서 내려가야 할 것 같아 발걸음을 서두르며 머릿속으론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일단 식당 리스트를 추렸다. 갔던 곳 중에 맛있었던 곳을 떠올리며 서준에게 어떤 방식으로 연락할까 생각했고, 시작도 안 한 이 어중간한 관계를 어떻게 끝내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렇게 택시 정거장으로 내려와 조수석 문을 여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빽 소리를 질렀다.
“작가님!!!”
생각에 잠겨 있느라 누가 뒤에서 쫓아오고 있다는 것도 몰랐는데, 귀가 아플 정도로 옆에 바짝 붙어서 소리쳤다. 너무 놀라는 바람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은혜 작가님! 안녕하세요. 아까 인사드렸는데…… 혹시 저 기억하세요? 엣지 미디어 임도운입니다.”
명함을 내밀며 씩씩하게 소개했지만, 혜수의 얼굴엔 금방 불쾌한 기색이 어렸다. 아까 은하가 조심하라고 했던 그 기자였다.
“뭐죠?”
즉각적이지만, 곱지 않은 반응임에도 그는 이죽거리며 세게 팔을 붙잡고 늘어섰다.
“다름이 아니라 정우주 배우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어서요.”
그가 ‘정우주’라는 이름 세 글자를 말할 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약속도 없이 불쑥 튀어나와 협박하듯 묻는 건 대체 요즘 같은 세상에 무슨 경우일까. 가뜩이나 기분이 안 좋았는데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무례하게 굴었다.
“뭔지 몰라도 제 몸에서 손 떼세요.”
“아, 당사자가 모른다는 게 말이 됩니까? 작가님! 진짜 이번 한 번만요. 저 진짜 작가님 데뷔하셨을 때부터 팬이었어요. 좀 전에 전시회에서 뵙고 기절하는 줄 알았잖아요! 정은하 작가님이랑 절친한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여기서 만나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제가 착하게 살았나 봐요. 이런 복도 생기고…….”
위아래로 훑으며 웃는 임도운의 얼굴이 소름 끼쳤다. 진심이 아닌 사람에겐 ‘팬’이라는 말이 참 쉽고, 가볍다.
강경한 태도에도 그는 끝까지 놔주지 않았다. 유명한 연예인이어도 똑같이 취급했을까.
“정말 잠깐만요! 딱 1초만! 네? 길게 바라지도 않으니까, 슬럼프랑 정우주 배우님에 대해서…… 아니, 우주 씨 얘기만이라도 좋으니까!”
임 기자는 혜수의 손을 잡아 보도블록 위쪽으로 끌어당기기까지 했다.
“놓으라니까!”
하필 손을 잡았다. 소리치며 그를 밀어 냈지만, 균형을 잃은 건 혜수 쪽이었다. 눈과 추위로 깡깡 언 바닥, 발뒤꿈치로 바닥을 밟으며 쭉 미끄러졌다.
“허?! 자, 작가님!”
옆으로 넘어지면서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는 건 본능이었다. 파란 글씨가 새겨진 손바닥엔 흙과 피가 묻어 있었다.
혜수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임 기자가 그제야 한 걸음 물러났다.
“제가 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어이가 없어 조소가 새어 나왔다. 일을 키우고 싶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넘어가기도 싫었다.
“사람 하나 죽일 뻔하셨네요.”
“지금 그 정도 상처에 협박이라도 하시겠다는 건가요?”
“이 정도로 붓을 놓진 못하겠지만 트라우마가 생기기엔 충분하겠어요.”
그림만 아는 온순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빛을 잃은 눈동자가 어쩐지 소름 끼쳤다.
“와, 작가님. 못 본 사이 독해지셨습니다!”
“공식적으로 항의하겠습니다. 아니면 비공식적으로 SNS에 올려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그림 잘 만드시네요. 하긴 이제 무서운 것도 없으시겠죠. 잘나가는 젊은 배우랑 결혼하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말 같지 않은 소리에 차가운 표정으로 일관했지만, 그는 신이 난 듯 떠들었다.
“옆에서 작가님, 작가님! 미대 여신! 하면서 불러 주니 착각하시나 본데 당신 정도는 널렸어. 운 좋게 상 몇 번 받고 얼굴로 인정받았겠지만, 당신 이름이 미술사에 영광스럽게 남을 것 같습니까? 차라리 정우주 와이프라는 타이틀이 낫겠네요. 축하드려요!”
남자는 더러운 눈빛을 하더니 침까지 뱉고 빠르게 사라졌다.
제 할 말만 지껄이던 그는 여유 넘쳐 보이는 비아냥거림과 다르게 꽁지 빠진 도마뱀처럼 급하게 모습을 감췄다.
“기사님, 성수동으로 가 주세요.”
조수석에 오른 혜수는 목적지를 말하고, 곧바로 우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을 걸어도 받지 않아서 매니저에게까지 했지만 역시나 꺼져 있었다.
둘의 관계를 의심하는 수준 낮은 기사는 예전부터 존재했다. 은하와 셋이 만날 때도 둘이 만나는 것처럼 사진 찍히고, 시답잖은 연예 기사까지 올라갔다.
습관처럼 손톱 끝을 깨무는데 휴대폰 알림음이 다시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예전에 전시 홍보용으로 만들어 뒀던 소셜 네트워크 계정의 알림이었다.
숨 쉬는 것보다 빠르게 올라오는 문구들을 보고 호흡이 가빠졌다.
[ㅋㅋ남녀 사이에 친구 없다더니 결국 ㅊㅋㅊㅋ]
[그르케 아니라고 하더니……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애초에 정우주가 물주 아니었음?]
[미대 언니 임신했대. 내 친구가 청담 산부인과 다니는데 우주랑…….]
잠깐 읽은 댓글들만으로 평소와 다른 심각성이 느껴졌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됐는지 모르겠는데, 당사자는 여전히 전화조차 받지 않고 있었다.
애꿎은 제 입술만 빨갛게 부을 정도로 말아 물었다가 애플리케이션을 삭제했다.
눈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더욱더 거세게 내렸다. 평탄한 길을 지나오는데도 시간이 꽤 걸려서 퇴근길을 마주치고 말았다. 눈까지 쌓인 도로 위는 아비규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