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접점-23화 (23/76)

[23화]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온기와 손바닥에 닿는 간지러운 감각에 머리카락이 서는 것 같았다.

“새 번호. 모로코에서처럼 통신 장애가 생기거나 휴대폰 망가지면 큰일 나니까.”

“설마요.”

“기다리는 거 잘하는데,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말아요.”

예쁜 웃음에 서준은 가볍고 짧게 입을 맞추고, 코끝이 맞닿아 있는 채로 속삭였다. 이번엔 혜수가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호기심 담긴 눈으로 바라봤다.

“우리…… 예전에 어디서 본 거 맞죠?”

거듭되는 우연에 접점이 있다고 확신했다. 이 남자의 존재와 만남에 대단한 의미를 두지 않으려 했지만, 미친 듯이 끌리고 있다는 게 사실이었다.

그림 이외엔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려 했다. 제게 오는 불행을 당연시했고, 참아 왔지만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 남자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서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제 얼굴을 잡고 있던 작은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비밀을 만들었다.

“혜수 씨가 기억하기 전까지, 난 말 안 할 거예요. 기억해 봐요. 안 하면 더 좋고.”

“왜요?”

“옛날 일 같은 거 다 잊고, 새로 시작하고 싶어서.”

“그다지 좋은 인연은 아니었나 보네요.”

“좋은 지금이 중요하지.”

눈이 오지 않을 것처럼 밝은 하늘을 올려보다가 다시 혜수를 쳐다봤다. 잠깐이지만 진득한 시선에 많은 말이 숨어 있는 것만 같았다.

“이따 봐요.”

그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또 붙잡기도 전에 사라졌다. 검은색 코트 끝자락이 모퉁이를 돌 때까지 혜수는 움직이지 못했다.

손바닥에 적힌 파란색 숫자를 바라보던 혜수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에 그가 모든 걸 그만두고 돌아왔다는 게 괜한 소리가 아니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서준이 곁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밝았던 하늘이 다시 흐려졌다. 빛이 가득 들어오던 공간이 어두워지며 혜수의 낯빛 역시 컴컴해졌다.

[마루 은행 대출 상환 안내]

“타이밍 진짜…… 미치겠다.”

짧게 자른 손톱에 물어뜯은 상처까지 가득한 엉망인 손끝이 화면을 밀어 내도 대출 잔액과 현실은 변함없었다.

‘나랑 만나요.’

‘이혜수는 범죄자가 아니고, 나는 변태가 확실하다는 거…… 천천히 알아 갑시다.’

‘성격 나빠도 괜찮고, 범죄자이거나 변태여도 상관없을 것 같지만.’

‘천천히 할게요, 천천히.’

꿈같은 풍경에 현실이 덧그려졌다. 그가 왼쪽 귀에 속삭였던 따뜻한 말들이 맴돌다 명치끝에 박혀 버렸다.

혹시라도 강서준을 만나면, 그 이후엔 뭔가가 달라질까. 시작은 좋을지 몰라도 현실은 끝끝내 그 사람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성큼성큼 다가오던 사람도 바닥을 기고 있는 제 모습을 보고 실망할 것이고, 지쳐서 끝끝내 같이 말라 버릴 거라고 확신했다.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헐레벌떡 도망가던 전 남자 친구의 뒷모습마저 떠올랐다. 물론 완전히 다른 사람이지만, 자신이 만드는 결말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욕심내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여기 있었어?”

괴로운 사색을 깨 버린 건, 오늘 이 갤러리를 가득 채운 주인공이었다.

단발머리와 붉은색 벨벳 머리띠, 그에 어울리는 사랑스러운 옷차림은 편하게 입는 평소와는 확연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도 길치가 여기까지 잘 찾아왔네. 성수에서 바로 왔어?”

“네.”

“정우주 그 자식, 의류도 다 정리 못 해서 아직 그 집에 쌓아 놨다며. 그냥 우리 집으로 들어오라니까! 그 새끼 술 마시고 지랄하는 거 지겹지도 않니?”

모로코에서 들어온 이후 더는 미룰 수 없어서 곧바로 집을 나왔다.

혜수가 아는 이들의 작업실과 스튜디오,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들켜 정우주 손에 붙들린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방 다섯 개에 화장실도 네 개나 딸린 고급 아파트이지만, 최근에 우주가 야심차게 준비했던 의류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처리하지 못한 재고들이 쌓여 있었다.

먼지가 많아서 기침이 나오고, 가끔 우주가 애인을 데리고 오는 바람에 귀가 아플 정도로 이어폰을 끼고 있어야 해도 딸을 상대로 장사까지 하려는 엄마 집보다야 나았다.

혜수는 해가 가장 들어오지 않는, 작은 방에서 생활했다.

죽지 않을 만큼 먹고, 자면서 일자리를 알아보는 게 요즘의 생활이었다.

“우주 요즘은 술 안 마셔요. 생각보다 편해요. 조만간 집도 구할 거예요.”

“편하긴, 개뿔. 걔 향수도, 옷도 다 망하는 바람에 쪼들려서 조만간 그 집도 뺄 거야. 이 추운 겨울날에 길거리로 나가서 개고생하지 말고, 그냥 우리 집으로 들어와!”

“말씀은 감사해요.”

“어휴, 미친년. 진짜 말 안 들어. 나 계속 밖에 있었는데 못 봤어? 사람들이 옆에서 괴롭히는 바람에 나도 너 놓쳤잖아. 그 덕에 신 교수님한테 붙잡혀서 한참 잔소리 듣다 왔네.”

“괜히 제가 일찍 와서 전시회 흐렸네요. 죄송해요.”

은하는 혜수의 볼을 꼬집었다.

“알면 좀 눈치껏 오지! 야, 근데 아까 너 보자마자 알아차린 그 새끼! 조심해. 예전에 네 외모랑 실력의 상관관계 어쩌고 해서 인터넷에 저질 기사 올라왔던 거 기억하지? 그때 그 기자야.”

데뷔 당시 그림뿐만 아니라 혜수의 외모도 화제가 됐다. 10년 전, 큰 사고로 부서진 얼굴을 재건하며 달라진 외모를 비꼬는 이들이 많았다. 중학교 졸업 사진이 떠돌며 한동안 시끄러웠다.

길거리를 걷다 보면 알아보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림을 사거나 의뢰하는 이도 늘어났지만, 그만큼 세간에서 보내는 악질적인 비판도 비례했다. 이미 여러 차례 수상한 경력이 있음에도 실력을 헐뜯었고, 관심받지 못해 안달 난 사람인 것처럼 만들었다.

그때 정은하가 본격적으로 ‘은혜’ 만들기에 나섰다.

은혜가 혜수인 것을 철저하게 숨긴 채 직접 만든 스튜디오에서 홍보하며 전시했다. 누군지 밝힌 적 없는 신인 작가임에도 금세 인정받았다.

원래 계획은 얼굴 없는 작가로 작품만 판매할 생각이었지만, 그 열띤 반응에 은혜가 혜수임을 밝혔다. 연일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은 그제야 조용해졌고, ‘언덕’은 소규모 스튜디오임에도 폭발적으로 인지도를 올렸다.

“그런 사람이 한둘도 아니었고…….”

“한둘 아니니까 더 조심해야지. 지난번에 너 특강할 때도 수강생인 척 왔다가 인터뷰하라고 생떼를 부리고 지랄하던 놈도 있었잖아.”

혜수의 공백이 길어지는 만큼 사람들의 관심도 사라졌지만, 악질은 여전히 존재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더 털릴 것도 없잖아요.”

“모르지, 또. 아무것도 없는 걸 수상하게 여겨서 터는 사람 생길지도. 근데 아까 너 옆에 있던 키 큰 기자는 누구야?”

“키 큰 기자?”

“사람들이 기자라고 하던데, 나는 오늘 여기 온 기자 중에 그런 피지컬을 가진 뒷모습을 보질 못했거든?”

눈치가 빠르다고 해야 할지, 유독 이런 데에서만 감이 좋다고 해야 할지. 눈이 번쩍이는 정은하를 보며 혜수는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까 고민했다.

“기자는 아니고 사실…… 마라케시에서 만났던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왜 여기 있어? 네가 초대했어?”

“우연히 만난 거예요.”

“뭐? 우연? 모로코에서 만났던 사람을 이 서울 구석에서 우연히 만날 수 있다고?”

“그러네요.”

눈꼬리가 내려가며 살포시 짓는 미소에 은하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웃음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너 그 남자랑 뭐 있었어?”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화랑 안에 울려 퍼졌다.

대단한 게 있었다고 한들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은하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호오, 대답 못 하는 거 봐라? 쓰읍, 이혜수. 요년 봐라. 수상하다. 너 왜 얼굴이 점점 빨개져? 진짜 뭐 있었어?”

“아니에요.”

“아니긴 뭘 아냐? 이거 봐라, 눈도 못 마주치고? 어? 사막에서 아라비안나이트 그런 거 있었어? 그런 거야?!”

은하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음흉한 빛으로 변했다. 어깨를 퍽퍽 치며 어서 빨리 얘기하라며 다시 몸을 흔들었다. 어찌나 흔들어 대는지 어지러워 눈이 도는 것 같았다.

“그런 거 없어요.”

“하긴. 손도 안 잡아 주는 어려운 애송이한테 뭘 바라니.”

그 ‘애송이’가 그 남자한테 먼저 자자고 했다고 하면 뭐라고 할까. 손잡는 거 빼고 다 했다고 하면 은하는 어떤 얼굴을 할까. 아, 손도 잡긴 잡은 건가.

혜수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려 뒤늦게 모자를 깊이 눌러썼지만, 은하는 제 할 말만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쩌다 이런 구석까지 굴러왔지?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인가?”

오히려 그에 대해 혹시 아는 게 있냐고 은하에게 먼저 묻고 싶었지만, 말해선 안 될 것 같았다. 혜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는 사람한테 초대장을 받았대요.”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어색했다. 다행히 은하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제 논리를 펼치기에 바빴다.

“아무튼 내가 어차피 다 그놈이 그놈이라고 그랬지? 잘생겼고, 성격이나 매너 나이스하면 일단 붙잡으라고. 자 봐야 해. 얼굴과 몸매에 나타나는 성실함과 청결함, 경험, 성정…… 그 모든 걸 알 수 있다니까!”

열정이 넘치는 적나라한 강의에 혹시 누가 듣진 않을까 걱정된 혜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언니, 또 술 먹었죠? 제발 목소리 좀 낮춰요.”

“축하의 샴페인 한잔했지. 어차피 여기 사무실 가는 길이라 사람 거의 없어. 사진 같은 거 없니? 연락처는 주고받았어?! 설마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보낸 건 아니지?”

맑고 큰 눈이 또르르 구르더니 고개를 저었다. 파란색 글씨가 새겨진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 부정했다.

“연락처는 주고받았어요.”

“아니, 근데 왜 이렇게 빨리 보냈어?! 내가 분명히 너 남자 만나기 전에 컨펌 받으라고 했지!”

“언니. 제가 아직 다 못 보긴 했는데 느낌이 좋은 것 같아요.”

계속되는 질문에 혜수는 필사적으로 말을 돌렸다.

“내 청춘이 통째로 갈려 있는데 좋아야지. 하, 그럼 뭐 하니. 내일부터는 오는 사람들도 없을 것 같은데.”

“팬 많잖아요.”

“첫날이라 그렇지. 너랑 신 교수님 빼곤 나도 잘 모르는 실속 찾는 관계뿐이야. 아 참! 팬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 수의사 선생님한테 의뢰 들어왔어.”

“의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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