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내가 없어도 다 잘 있어요. 일은…… 치킨집이라도 차릴까.”
“장난해요?”
“아니면 혜수 씨가 나 먹여 살려 줘요.”
인내심 없는 입술은 또다시 혜수의 볼에 와 붙어 버렸다. 쪽, 쪽 소리를 내며 눈 옆과 광대, 볼, 턱과 귀 옆 등에 닿았다.
“자, 잠깐만요! 그만!”
어깨를 겨우 밀어 냈지만, 그는 제 어깨를 밀어 낸 손을 붙잡아 다시 입을 맞췄다.
“미쳤어요, 진짜?”
“내가 제정신이게 그럼? 어떻게 그렇게 가 버려. 나 먹고 버린 거예요?”
적나라한 단어에 깜짝 놀라 뒤늦게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이 근처까지 오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런 거 아녜요!”
누가 듣진 않을까 걱정하며 속삭이듯 소리치자 서준이 다시 활짝 웃어 보이더니 너스레를 떨었다.
“그럼 다행이네. 난 너무 충격받아서 일도 다 때려치우고 한국으로 아예 돌아왔잖아요. 책임지고 먹여 살려요.”
“연락 안 한 건…… 서준 씨잖아요.”
진심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에 혜수는 여태 했던 걱정이 생각나 약간 짜증이 몰려왔다.
꺼질 것처럼 작은 목소리는 얼굴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했다.
“미안해요. 믿을지 모르겠지만 휴대폰이 복구도 안 될 만큼 완전히 날아갔어요.”
“근데 어떻게 여기 있어요?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요?”
“은혜 작가 검색했죠. 젊은 나이에 인정받은 천재로 유명하시던데.”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게 귀여웠다. 하얗고 작은 얼굴, 동그랗고 맑은 눈과 도톰하고 붉은 입술 같은 것들이 올망졸망하게 모여 있는 게 꼭 인형 같았다.
“겁먹지 말고. 오늘 여기서 마주친 건 우연이니까.”
“우연이라고요?”
“나도 안 믿겨요. 정말이에요.”
그저 반복되는 우연이었지만, 이 남자는 또다시 이혜수를 구원했다.
둘 사이를 채우는 공기가 먹먹하게 바뀌며 눈빛도 변했다. 황당함과 놀라움, 목 안쪽을 간지럽히는 설렘, 사막에서 나눈 지난 밤의 열기가 피부 아래에서 잔잔하게 일었다.
차갑고, 건조하던 주변이 순식간에 따뜻하고, 부드러워졌다.
“작가님은 본명도 알려 주지 않을 만큼 날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겠지만, 난 다시 보고 싶다고 기도까지 했어.”
아무 말 못 하는 혜수를 대신해 서준이 말했다. 신앙심이라고는 모래알만큼도 없는 남자가 하는 뻔뻔한 말에 결국 웃었다.
어쩌겠는가. 눈앞에 나타난 걸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두 번 다시 못 만날 것 같았어요.”
“나도 그랬어요, 이혜수 씨.”
자신의 본명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뜨겁게 불어왔다.
“그럼, 여기는 정말 전시 보러 온 거예요?”
“아는 사람한테 초대권을 받았어요. 나 원래 전시회 같은 거 관심 없는데, 이혜수 씨 만나려고 왔나 봐.”
혜수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오르자 서준은 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탁탁 털어 다시 씌워 주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은하는 스튜디오와 카페를 직접 운영하면서 도예나 회화는 물론이고 외부 강의에 인터뷰, 방송에까지 출연하며 여러 방면에서 활동했다. 사람 좋아하는 성격 탓에 늘 곁에 사람이 많았다. 그런 작가의 전시회 초대권을 받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좀, 그만해요!”
잠깐 방심했을 뿐인데 서준은 혜수의 목 근처에 코를 박고 비비며 입을 맞췄다. 코트 안으로 들어온 손도 갈비뼈 밑에서 대담하게 움직였다.
“싫어요?”
“싫은 게 아니라 누가 보면 어쩌려고 이래요?”
“하아. 난 떨어져 있는 내내 미친놈처럼 작가님 생각만 했는데, 나만 그랬어요?”
순진한 눈을 하고 물었지만, 내뱉는 숨소리엔 음흉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미친놈처럼’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도 생각을 하긴 했다. 그것도 쳐 주려나?
“그냥…… 적당히.”
“작가님은 캐주얼한 차림도 귀엽네.”
“좀!”
“혹시 내가 창피한 건 아니죠?”
소심한 척 물어 왔지만, 손은 옷 안까지 침범하고 있었다.
“내가 언제 창피하다고 그랬어요?”
창피할 리 없다. 이마가 살짝 보일 정도로 자연스럽게 가르마 진 머리는 마라케시에 있을 때보다 조금 더 긴 것 같았다. 자연스럽고, 편한 모양이어서 날카로운 인상을 조금 부드럽게 만든 것 같았다.
옷은 검은색 터틀넥의 긴 코트, 머리부터 발끝까지 올 블랙이지만 무식하지 않고, 세련됐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자연스러운 스타일링. 하나같이 좋은 브랜드임이 분명했다.
한마디로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잘난 모습이었다.
“그럼 이참에 저기 가서 기자들한테 내가 숨겨 둔 애인이라고 공표해 줘요.”
“놀리지 말아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혜수가 손을 밀어 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쏘아붙였다.
“난 진심인데.”
오랜만에 보는 뻔뻔함에 면역이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혜수와 달리 그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눈과 몸을 부딪쳐 왔다. 발끝마저 닿았다. 낡은 운동화와 반짝이는 그의 구두가 비교되는 것 같아 좀 창피해졌다.
발을 뒤로 빼려고 했지만, 그는 허리를 끌어안으며 다시 몸을 붙여 왔다.
“나랑 만나요.”
갑자기 나타난 것도 모자라 사람을 정신없이 몰고 가는 건 여전했다.
“우리 고작 사흘 아니, 이틀 같이 있었어요.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정말 겁도 없다.”
혜수의 말을 들은 그가 킥킥거리며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코끝에 닿는 진한 향기에 몸이 반응하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그 핑계 식상한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성격인지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성격 나쁘고, 히스테릭하고, 변태거나 범죄자이면 어쩌려고 그래요?”
서준은 웃으며 질문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러는 혜수 씨는 내가 나쁘고, 히스테릭하고, 변태나 범죄자일 것 같아요?”
“……변태는 맞는 것 같아요.”
“그건 부정 못 하겠다. 오늘 시간 있어요?”
“지금요?”
서준은 혜수의 허리를 안아 다시 제 옆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없으면 저녁에라도 좋아요. 천천히 알아 가고 싶은 거라면 그렇게 해요. 나랑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영화도 보면서 시작해요. 이혜수는 범죄자가 아니고, 나는 변태가 확실하다는 거…… 천천히 알아 갑시다. 그게 좋으면 그렇게 해요. 당신도 나한테 끌리잖아.”
당황한 혜수가 아름아름 망설이는 사이 서준은 다시 몰아붙였다.
“난 이혜수가 성격 나빠도 괜찮고, 범죄자이거나 변태여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원나잇 상대로 남기는 싫어요.”
약간 터서 거칠 것 같은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갑자기 먹먹해지는 눈동자를 보고 한숨을 내쉬며 끌어안았다.
“아직 할 말 많은데 이혜수 또 도망갈까 봐 못 하겠다. 천천히 할게요, 천천히.”
“……도망간 거 아니라니까요.”
두 팔에 다 감기지도 않는 커다란 등을 어색하게 안았다. 커다란 짐승을 달래는 기분이었다.
아프리카와 서울 같았던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지는 순간이었다. 서로의 체온이 비슷해질 때쯤이 되어서야 몸을 떼어 내며 혜수는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다시 만나면 맛있는 거 사 주기로 약속했잖아요. 먹고 싶은 거 없어요?”
두 사람의 머리 위에 걸려 있던 그림을 손으로 가리키며 서준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 그림 보니까 먹고 싶은 건 생겼어요.”
“응?”
‘뭉개진 케이크’, 채도를 다르게 한 여러 분홍색으로 표현한 그림 역시 은하의 것이었다.
“케이크가 먹고 싶어요?”
일차원적인 물음에 그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답했다.
“삼겹살.”
“네?”
“너무 무식하다고 생각하지 마.”
듣고 보니 하얗고, 분홍색의 절묘한 조화에서 생삼겹살 느낌이 나기도 했다.
혜수는 살짝 미소 짓다가, 소리 내어 후훗 웃었다. 작은 손으로 그걸 가려 보려 애썼다. 이 낯선 남자가, 이 우연한 만남이, 삼겹살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웃음이 날까.
“너무 크게 웃는 거 아녜요?”
“미안해요.”
사과하면서도 계속 웃자 민망해하던 그가 따라 웃었다.
“먹어요, 삼겹살. 약속 장소는 이따가 문자로 보내 줄게요.”
갑자기 손목 안쪽에 입을 진하게 맞추며 불쌍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늘 눈도 온다는데 그냥 지금 같이 나가면 안 돼?”
커다란 남자가 제 어깨에 고개를 박고 투정을 부리는 게, 분명 끼 부리고 있다는 걸 이제 알면서도 퍽 귀엽게 느껴졌다. 귀여우면 답도 없다고 하던데, 큰일이다.
“눈이 싫어서 아프리카까지 도망간 사람이 여긴 어떻게 왔어요?”
“작가님이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아서.”
잔잔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끓어올랐다. 이 만남이 너무 운명적이고, 하필 상대가 강서준이라 당장에 끌고 나가 버리고 싶은 지경이었다. 불쾌하던 기분과 악몽 같은 현실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욕정을 가라앉히고, 진정하며 말을 이었다.
“여기 전시하는 사람, 나랑 아는 언니예요. 축하 인사는 하고 가야죠.”
“친해요?”
“그냥…… 오래됐어요. 혹시 서준 씨는 정은하 작가 알아요?”
“그냥, 대충. 인사할 사이는 더더욱 아니고.”
묘한 말이었지만, 완곡하게 대답을 피하는 것 같아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러자 서준은 또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정말 안달 난 사람 같았다.
분위기가 조금 더 짙어지려는 찰나, 화분을 든 배달 기사가 두 사람 옆에 나타났다. 당황한 그들에겐 관심조차 없었다. 그저 두리번거리더니 화환들 사이에 커다란 호접란을 두고 사라졌다. 하얀색의 거대하고 화려한 꽃이었다.
“혹시 저 사람이랑도 친해요?”
서준이 손끝으로 가리킨 호접란의 리본엔 ‘제이 윤, 윤진영’이라고 적혀 있었다.
“윤 회장님을 알아요?”
“꽤 유명하잖아요.”
“……저분은 저 싫어하세요. 친한 건 더더욱 아니고.”
씁쓸해진 얼굴을 만지는 서준의 표정은 예사로워 보였다.
“다른 사람이 다 무슨 상관이야. 나만 이혜수 좋아하면 됐지.”
“하, 진짜.”
“펜 있어요?”
갑작스러운 요청에 눈을 깜빡이다가 가방에서 메모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펜을 건네주었다.
“손.”
무슨 말인가 싶어 잠깐 고민하다 이내 깨닫고 아아, 소리를 내며 제 손을 내밀었다. 서준은 손바닥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하필 파란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