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내가 왜 돈이 없을까? 집에다 바친 돈만 합쳐도 전셋집 정도는 진즉 나왔겠지!”
― 허, 이 독한 년. 내가 너 고작 그거 갚아 주고 유세 떨 줄 알았어!!
“입학하고 졸업할 때까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어. 학비며 생활비며 엄마한테 보태 달라고 했던 적 있어? 엄마랑 이혜균 뒷수습도 모자라서…… 이젠 결혼까지 하라고?”
― 내가 나 좋으라고 그러는 거야?!
“내 그림 판 돈도 모자라서 이번엔 보증금까지 보탰어. 그나마 아빠가 남긴 집, 혹시라도 남한테 넘어갈까 봐!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 번이라도 생각은 해 봤어?”
― 가족끼리 도와준 것 갖고 유세는! 그러니까 더더욱 한번 만나 봐! 남자가 나이가 좀 있어서 그렇지, 요새 그렇게 우직한 남자가 흔한 줄 알아?
“그렇게 흔하지 않으면 엄마나 만나 봐.”
― 야!
결심을 굳힌다. 착한 딸 노릇은 이제 끝내기로.
끊자마자 전화도 메시지도 받을 수 없도록 수신 차단 했다.
어는 줄도 모르고 전화기를 잡고 있던 손이 뒤늦게 덜덜 떨렸다. 잠깐 잊고 있던 불행이 귀와 손을 타고 다시금 혜수를 끌어내렸다.
오늘은 참지 않고 할 말을 했지만, 고작 이 정도로 숨이 찼다.
이럴 때면 머릿속은 자연스레 이 얼어붙은 도시와 정반대 편에 있는 사막을 떠올렸다. 겨우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오래전에 꾼 꿈만 같았다.
“하아.”
깊은숨에 담배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혜수는 모자를 조금 더 눌러쓰고, 유리문을 열었다. 들어서자마자 묘한 음악과 인센스 향이 바짝 긴장한 감각을 녹게 했다.
군데군데 몰려 있는 이들의 발끝만 보고 인파가 없는 쪽으로 비켜 나가며 벽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가 의도한 순서대로 전시를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 동네는 다 좋은데 주차할 자리가 없어서…….”
“택시도 잘 없는 동네입니다. 다들 집 안에 주차장이 있는데 주차할 곳이 왜 필요하겠어요?”
“좀, 실험적인 게 많네요.”
“제 눈엔 별로입니다.”
타인의 대화에 제 발걸음 소리가 묻히길 바라며 최대한 천천히 걸었다. 우윳빛의 대리석 바닥만 보던 혜수가 서서히 고개를 올렸다.
갤러리는 작은 규모이고 불편한 위치지만, 신선한 기획 전시로 유명했다. 화가 정은하가 도예가로서 첫 전시를 열기에 손색없는 곳이었다.
밝은색을 마음껏 칠해 놓은 동그란 도자기, 만들다 만 것 같은 도자기에 유화를 덕지덕지 발랐거나 일부러 반쯤 깨뜨린 항아리…….
절대 채워질 수 없는 작품에 묘한 불쾌감이 이는데 누군가 성급하게 말을 걸어왔다.
“어? 은혜 작가님이다! 은혜 작가님! 맞죠?!”
그의 말 한마디에 안에 있던 모든 이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혜수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정말?”
“어어, 진짜 은혜 작가다.”
“작가님, 잘 지내셨어요? 와, 반갑습니다. 혹시 잠깐만 시간 내 주실 수 있으세요?”
앞뒤로 꽉 막혀 도망가지 못한 채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짧은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조금은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이런 상황에선 속절없이 심장이 쿵쾅거렸다.
“혜수야.”
그때, 안경을 낀 키 작은 중년 남성이 인파 안으로 성큼 들어와 손을 내밀었다.
“……신 교수님.”
“그래, 인마. 이게 얼마 만이냐? 잘 지냈니?”
허공에 떠 있는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자 옆에 있던 다른 이가 신 교수에게 귓가에 대고 말했다.
“교수님, 저 친구, 손 안 잡아 주지 않습니까.”
“아, 맞다! 내 정신 좀 봐. 오랜만에 만나서……. 내가 미안하다.”
혜수가 작게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아뇨, 아닙니다. 건강하셨어요?”
신 교수가 어깨를 토닥이는데 옆에서 한마디씩 거들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이 좁은 곳에서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아니, 아무리 싫어도 어른이 먼저 손을 내밀면 잡아 드리는 게 예의지. 한국대학교 신 교수님이면 제 스승이잖아.”
“그래? 유별나네.”
“결벽증 아닐까?”
“싹수가 없는 거지.”
아끼는 제자가 비난을 받자, 되레 제 행동이 민망해진 신 교수가 나섰다. 혜수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사람들이 없는 쪽으로 자연스레 이끌었다.
“지난달에 모로코 얘기 들었다. 큰일이었다며. 괜찮니? 그림은 찾았어?”
모자를 벗고 머리를 누르며 애써 웃어 보였다.
“못 찾았어요.”
“저런. 얘기는 다 해 본 게냐?”
“수사 중이고, 보험사에 청구할 예정이라고만 들었어요. 다른 작품들도 못 찾고 있어서 어려울 것 같아요.”
그림에 대한 희망은 버렸다. 이따금 뉴스에서 중요 문화재와 유명 화가들의 그림이 소실됐다는 게 언급되긴 했지만, 혜수에 대한 내용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데나로 측에서 주최한 공모전 내용에 대해 홍보조차 크게 하지 않아 차라리 다행이었다. 국내에선 거의 모르는 추세였다.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상황인데 제 스승에게 마지막 그림이 마약 범죄에 사용됐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일부러 전하지 않았다. 믿을 수나 있을까. 은연중에 마약 범죄가 흔해진다지만 여전히 먼 세상 이야기 같았다.
“좋은 그림이었는데……. 찾을 수 있을 거다. 분명 돌아올 거야. 은하 그 녀석도 좋은 뜻에서 그런 건데, 안타깝구나.”
정은하는 공항으로 마중까지 나왔다. 벌겋게 충혈된 눈을 하고, 엉망인 혜수를 보며 ‘안 죽어서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약 한 달 동안 그림에 대한 종용도 심부름도 없었다.
힘들다는 핑계로 돌아온 한 달 내내 윤 회장님과도 보지 않았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은재에게 가지도 않았다. 잘 살겠다는 결심을 알릴 용기가 없었다.
“전 괜찮아요.”
“녀석…….”
신 교수가 웃으며 어깨를 몇 번 토닥였다. 혜수는 신준형 교수의 순수함을 좋아했다. 학생들의 화풍에 간섭하지 않았고, 취향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상냥하고, 훌륭하지만 그만큼 혜수에게 기대가 큰 사람이기도 했다.
“은하 얼굴은 아직 못 봤지?”
“네.”
“그럼 사무실부터 다녀오렴. 아마 거기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혜수야.”
“네?”
“너 그림은……. 아니, 아니다. 조만간 연락할 테니 작업실에 한번 오려무나.”
“네, 교수님.”
씩씩하게 대답하고 몸을 돌렸지만, 주변의 시선에 심장이 불쾌하게 움직였다. 주체할 수 없이 손이 떨려서 양손을 꼭 끌어 잡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발을 떼고 걸어야 하는데 움직여지지 않았다. 눈앞이 팽팽 돌고, 피가 빠지는 느낌에 기절이라도 할 것 같았다. 주변 사람들이 다가올까 봐 쓰러지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현기증을 이기지 못한 몸이 기우뚱하며 체중이 한쪽으로 쏠리려는 순간, 커다란 손이 혜수의 어깨를 안았다.
“이혜수.”
낮지만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
“어……?”
얼굴을 확인하자 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았다. 꿈인가 싶었다. 제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에 숨 쉬는 것도 벅차 대답하지 못했다.
옆에서 자기 차례가 오면 달려들려던 사람들을 신경 써 주는 건지 일부러 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작가님 여기 계셨네. 오늘 약속 있는 거 잊으신 건 아니죠? 저 한참 기다렸어요.”
“왜, 왜 여기…….”
“나한테 기대요.”
바짝 다가와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그러고 싶지 않아도 다리에 힘이 풀려 체중을 온전히 실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쉿, 조금 이따가.”
모로코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람이 없는 곳으로 둘이 함께 걸었다. 전시 공간을 지나자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심긴 좁은 중정이 나타났다.
모퉁이를 돌자 흰 벽엔 분홍빛 케이크 그림이 덩그러니 걸려 있고, 그 아래로 긴 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주변엔 화환들이 가득했다. 꽃밭처럼.
서준은 혜수를 의자에 앉혀 주곤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올려다봤다. 입고 있던 검은색 코트가 바닥에 닿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지만, 혜수는 숨통이 트이는 기분에 가느다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 자꾸…… 내가 이럴 때만 나타나요?”
그는 말없이 말아 쥔 채 덜덜 떨던 양손을 제 손으로 덮어 줬다. 다른 손으로는 한 달 전보다 더 파리해진 얼굴을 살짝 붙잡았다.
혜수는 그 손을 피하지 않고 얼굴을 기댔다.
“숨 급하게 쉬지 말고, 천천히 코로 들이마셔요.”
그의 말에 따라 천천히 들이마셨다.
“잠깐 참았다가 입으로 길게 내쉬어요.”
“……후우.”
얼마나 반복했을까. 진정된 혜수가 살며시 눈을 떴다.
“괜찮아요?”
“네.”
“정말?”
고개를 끄덕이자 바닥에서 일어나 옆에 앉았다.
“여기 어떻게……!”
혜수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서준은 성급하게 입을 맞춰 왔다. 어찌나 성급하게 구는지 모자가 툭, 떨어졌다. 화들짝 놀라 가슴팍을 밀어 내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망가지 못하게 허리를 꼭 끌어안고 입술을 빨아 댔다.
누군가에게 들키진 않을까 하는 불안은 금세 사라졌다. 그날 밤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매달려 입술을 벌렸다.
불안하게 남아 있던 호흡이 부드러운 입맞춤에 점차 안정적으로 변했다. 연한 살들이 붙었다 떨어졌다 반복하며 점점 강도가 깊어지려는 찰나 정신을 차린 혜수가 그의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분명 아팠을 텐데도 내색 없이 천천히 멀어졌다.
혜수가 달뜬 숨을 뱉어 내며 늘어났던 그의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러 주곤 다시 물었다.
“여기, 여기 어떻게 왔어요?”
“집착 심하다고 분명 말했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일은요? 뉴욕은? 다 어쩌고 왔어요, 응?”
아직 정신이 몽롱한 건지 눈동자의 움직임이 느렸다. 화장기 없는 눈가를 손으로 쓸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