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혜수.”
다시 그 이름을 제 입으로 부르자 목뒤로 소름이 돋아났다.
왜 몰랐지?
그제야 제대로 기억해 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도, 목소리도. 묘한 기시감이 괜한 것들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단순히 닮은 게 아니라 이혜수였다.
10년 전, 엉엉 울다가 제 앞에서 쓰러졌던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손에 힘이 빠져 그림을 놓칠 뻔했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혜수, 그 여자가 아프리카 끝의 사막에서 파도로 나타났다.
‘운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연의 과장된 도출이며 있을 수 없다고 제레마이의 말에 반박했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의 이런 상황을 그 단어가 아닌 이상 설명할 수 없었다.
― 우리 요원들이 먼저 도착해서 증거 수집부터 하겠지만, 현지 경찰까지 신고 마쳤어요. 곧 CIA도 도착할 테니까 나오는 게 좋겠어요. 아, 그리고 오늘 오전에 국도에서 총기 사고가 있었다는데 아무래도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미안한 얘기지만, 요한이 하는 얘기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
― 준? 괜찮아요?
“괜찮아.”
― 난 진짜 아까까지 설마 했어요! 아니, 솔직히 역외 법인 찾아보라고 할 때부터 의심했잖아요. 괜히 벌집 건드렸다가 우리만 엿 먹는 건 아닐까? 역으로 추궁당하면 어떡하지? 그런데 당신, 진짜 대박이잖아요! 보스가 왜 그쪽을 무한 신뢰 하는지 이제 알겠어요!
호들갑 떠는 요한의 목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들으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놀란 건 잠깐이었다. 그저 그 여자를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파도’를 한쪽에 소중하게 품고, 밖으로 나섰다.
“제레마이한테 내 사직서 수리하라고 해.”
― 네?! 진짜 사직하겠다고요? 당분간 몸 사리라는 의미에서 휴직은 허락하겠지만…….
“가야 해.”
― 어디를요!
문밖에 나와 차로 가려는데, 이상하게 승합차가 눈에 거슬렸다.
“승합차 타고 입구까지 갈게. 안에 아무것도 없어.”
운전석에 올랐다. 이상한 건 없었지만, 어쩐지 여기 두기엔 불길했다. 아니나 다를까 시동을 켠 순간,
쿵!
운전석 바닥이 울렸다. 뜨거운 화력이 등을 밀어내는 게 느껴졌다. 이를 짓이겨 물며 본능적으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쿠아아앙!!
엄청난 소리와 함께 하얗게 빛나던 아름다운 건물이 폭발했다.
타고 있던 승합차가 폭발에 밀려났다. 열기가 운전석에 타고 있던 서준의 등까지 타고 흘렀다. 자동차는 폭발에 이염되면서 순식간에 반이 날아가고, 옆으로 전복됐다.
제대로 정신이 들지 않았다. 바닥과 닿아 있는 왼쪽 어깨는 부서진 것 같았고, 의자에 등이 쩍 달라붙은 것 같았다. 엄청난 고통과 함께 몸을 일으켜 보려 해도 움직이질 않았다.
호흡하는 게 점점 힘들어지더니, 피비린내가 났다.
바닥에 머리를 비비며 어떻게든 정신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크윽…….”
미간에 힘이 들어갔고, 눈은 붉게 충혈됐다. 몸에서 나온 피와 차에서 흘러나오는 기름이 바닥을 적셨다. 그 뒤에서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불꽃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여전히 품 안에 있는 ‘파도’를 꼭 끌어안으며 서준은 눈을 감았다.
그렇게까지 진심으로 살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4. 다시 서울, 다시 겨울
― 마약 밀수가 큰 문제로 불거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달 모로코에서 발생했던 미술관 폭탄 테러 역시 그와 관련된 범죄로 밝혀졌습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김나나 특파원 연결해 보겠습니다. 김 특파원, 사상자는 없었습니까?
― 폭발 사고로 타박상을 입은 시민과 직원들이 40여 명 가까이 됩니다.
―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죠?
― 카사블랑카로 가던 길목에서 체포된 트럭입니다. 언뜻 보면 평범한 트럭이지만 안에는 모로코 미술관에서 스페인의 한 박물관으로 이동하던 그림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캔버스 뒷면을 뜯어보면……. 보십시오! 이 틈 안엔 마약 봉투들이 꼼꼼하게 붙어 있었습니다.
― 얼마 전엔 드론으로 밀매를 시도한다는 기사를 봤는데요. 그런 기상천외한 방법을 봐서 그런지 이번 방식은 어떻게 보면 허술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동 중에 적발될 가능성은 없었습니까?
― 이들이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은 이유는 미술관 개관식 자체가 기부금 행사였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기업인과 유명인들이 참석한 것은 물론, 지상으로 이동했기에 의심 없이 가능했습니다. 이들은 미국과 모로코를 거쳐 스페인까지 대량의 마약을 운반할 수 있는 루트를 만들어 기반을 다질 예정이었으나 경쟁 상대의 범죄 조직이 이를 알아차리고, 미술관을 폭발시키며 범행이 탄로 나게 됐습니다.
― 범인들은 체포됐습니까?
― 네. 폭발을 일으킨 스페인의 마약 클랜 조직원들과 브로커 역할을 한 세력이 이동하던 중간에 총기를 난사하며 다투었고, 그 과정에서 몇몇이 사망했으나 나머지 인원들은 모두 체포됐습니다. 도시에서 벌어졌다면 일반인들이 사망할 수도 있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 브로커 역할을 한 범인이 D 어패럴 경영진이라는데 사실입니까?
― 맞습니다. 세계적인 모델로도 활동하던 엘리스 오펠리온은 자신의 혐의를 일절 부인하고 있습니다.
― 이게 결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도 마약 관련 범죄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인데 심지어 얼마 전엔 모 아이돌이 마약을 소지한 혐의로…….
택시 조수석에 앉아 있던 혜수는 DMB에서 흘러나오는 국제 뉴스를 보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한국에 돌아온 지 한 달. 모로코에서 쫓기듯 귀국해야 했던 사고의 이유를 지금에야 알게 됐다.
폭탄이 터지고, 총으로 협박받았던 한 달 전의 일이 생경하게 오른쪽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마약…….”
아무리 되새겨도 어색하기만 한 단어였다.
제 그림이 마약 운반에 이용됐고, 끝내 버려졌을 거라는 상상에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림도 그림이었지만 그 남자가 걸렸다. 그날 밤 이후로 연락은 끊겼다. 배터리가 없었던 휴대폰을 다시 켠 건 한국에 도착한 이후였다.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를 확인하고 늦게나마 답장을 보냈지만 받지 않았다.
정말 단지 하룻밤으로 끝날 사이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가 보여 줬던 눈빛과 다정한 말들을 떠올리면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다. 답은 내내 나오지 않고 삼켜 버린 생선 가시처럼 목 안에 남아 괴로웠다.
시간이 지나도 혜수의 안에 칠된 푸른색은 희미해지기는커녕 짙어질 뿐이었다.
‘엘리스’를 쫓으려고 했던 그가, 총기 난사에 사망자가 나올 정도로 위험한 상황에서 그저 무사하기를 바랐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꿈같았던 사막을 뒤로하자, 현실은 북악산이 보이는 높은 동네로 혜수를 인도했다. 싫어하는 풍경이었다.
[공용 주차장에서 걸어 올라오면 돼. 길 잃어버리지 말고, 전화해, 꼭!!]
분명 목적지 근처에서 내렸고, 지도 애플리케이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진밖에 모르는 혜수는 은하에게 불안감을 안겨 줬다.
아니나 다를까.
택시에서 내린 이후로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찾고 있음에도 헤맸다. 다행히 오르막길을 오르다 보니 목적지는 금방 나타났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고급 주택가들을 지나고 보이는 작은 갤러리가 그곳이었다.
캐주얼한 코트에 야구 모자를 쓴 제 모습이 유리창에 희미하게 비쳤다. 그곳에 들어차 있는 인파와 제 모습이 겹쳐지며 묘하게 초라해졌다.
용기를 내 들어가려는데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달갑지 않은 번호에 고민하다가 화랑 옆의 구석으로 돌아가 받았다.
“여보세요?”
― 넌 뭐 하는데 전화를 한 번에 받는 일이 없니? 어디야!
목소리를 듣자마자 명치 근처가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꾹 참으며 대답했다.
“은하 언니 도예전.”
― 걔는 결국 개인전까지 열었다니? 나이 다 들어서 왜 그러나 모르겠다.
“시작에 정도가 어디 있어? 괜한 말 하지 마.”
― 잘났지, 정말. 너 이번 주말에 시간 좀 내.
벽을 보고 얘기하는 것 같은 느낌에 주머니 안에서 담배를 찾았다. 돛대에 불을 붙이고 빈 담뱃갑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날 새벽, 주최 측의 전화를 받기 위해 테라스로 나갔었다. 서준이 자신과 같은 브랜드의 담배를 태운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래서일까. 전에는 어쩌다 한번 생각날 때마다 피웠지만 모로코에서 돌아온 이후로 찾는 일이 잦아졌다.
― 듣고 있어?!
날카로워진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왜?”
― 선봐.
“……엄마.”
― 춘천 언니네 큰아들인데, 이번에 작게 개원했다더라.
황당한 설명에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결혼하면 식당이라도 차려 준대?”
평소와 다른 혜수의 태도에 숙현은 당황한 것 같았지만, 잠깐뿐이었다.
― 큰 식당까지는 아니어도 우리 집 사정 대충 알고, 춘천 언니가 엄마 손맛 알고 있잖니?
“춘천 사는 그분 정도면 지방에 분식집 정도는 차려 주시겠네. 아드님 나이는 나보다 한 열 살 넘게 많겠다.”
― 남자 나이는 흉도 아니지.
“보증금까지 빼서 빚 갚아 준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젠 하다 하다 날 팔아먹으려고 해?”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딸의 말투에 당황한 숙현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 뭐라고? 이 미친년! 너 양심 좀 있어 봐! 뭐가 있어야 팔아먹는단 소리를 해야지. 너처럼 그림만 그릴 줄 아는 애가 앞으로 뭘 하면서 먹고살 건데? 집, 차, 돈! 뭐라도 하나 있어? 그깟 빚 몇 푼 갚아 준 거, 너 낳아 기른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거기다 요 최근은 활동도 안 했잖아! 빈털터리잖아!!
“엄마.”
― 너한테 있는 거라곤 그림으로 사람들한테 잠깐 인정받았다는 알량한 자존심, 그거 하나야.
분명 매번 듣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서 버티고 있던 무언가가 쉽게 깨지고 만다. 무뎌졌다고 생각해도 자신을 낳아 준 사람의 말엔 이상하게 면역력이 생기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