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폭발 원인은?”
― 아직. 조사 중이라고만 떠들고 있어.
“단순 테러 아니야. 이미 폭탄 테러 경험이 있는데 관광지 운영도 중지하지 않았고, 밤늦게까지 시민들 통제도 없었어. 종교나, 정치적인 문제로 일으킨 테러였으면 그렇게 허술하게 둘 리 없지.”
― 안 그래도 여기서도 방식이 구렸다고 떠들고 있어. 사망자 없고, 미술관만 피해가 커.
“엘리스 쪽에서는 연락 없었어?”
― 없었어. 그냥 돌아와.
“또 다른 건?”
― 강서준!
제레마이는 화가 나면 서준의 풀 네임을 또박또박 발음하곤 했다.
다시 방 안으로 돌아온 그는 침대맡 테이블에서 아까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했다. 호텔 메모장에 파란색 볼펜으로 그려진 잠들어 있는 남자의 그림. 자신의 얼굴이었다.
― 준?
그는 종이를 들고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보고 또 보고, 종이에 구멍이라도 낼 것처럼 보고 웃었다. 그림의 밑엔 작게 글씨까지 쓰여 있었다.
「연락이 와서 먼저 돌아갈게요. 테라스에 있던 담배 하나 빌렸어요. 근데…… 우리 예전에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요?」
다행히 하룻밤 보내고 끝내려고 한 것도, 지난밤이 별로인 것도 아니었나 보다. 단순하게도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 미친놈, 약이라도 했냐?!
***
제레마이에게 욕을 먹어 가면서도 실실거리던 것도 잠시, 여자는 제 전화를 받지 않았다. 메시지도 읽지 않았다. 지금은 급하게 한국으로 돌아가느라 연락할 시간조차 없을 거라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사막과 광야만 번갈아 나타나는 황량한 도로 가운데, 핸들을 돌리던 서준은 괜히 만만한 이름을 쓸쓸한 목소리로 여러 번 호명했다.
“요한.”
보기만 해도 목이 간지러운 풍경을 바라보며 운전하고 있는 그는 어제와 달리 완전히 전투태세 복장이었다. 검은색 컴뱃셔츠에 선글라스, 타고 있는 건 사륜구동의 지프 차량이었다.
― 네.
“요한.”
― 미쳤어요?!
속이 타서 요한에게 행적이라도 캐 보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서 그의 이름을 여러 번 부르고 말았다.
“요한……. 아냐, 아니다.”
― 한 번만 더 쓸데없이 불렀다가 아무 말 안 하면 여자랑 있었던 일, 다 보고할 거예요.
그가 뭐라고 떠들든 관심 없었다. 운전대를 잡고, 이동하는 내내 빈 옆자리를 힐끔거렸다. 선글라스를 벗어서 던지고, 잠들어 버린 것 같은 휴대폰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엉덩이가 아플 정도로 터덜터덜한 길도, 모래바람이나 푸른 하늘도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하아.”
― 한숨도 금지. 근데 세컨드 하우스 꼭 찾아가야겠어요? 제레마이가 알면 난리 날 텐데. 그냥 평소처럼 적당히 하지 그래요.
“찾아볼 게 있어.”
정황상 엘리스 때문이라고 했지만,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온 건 따로 이유가 있었다. 어제 마지막 인사를 하듯 헤어졌던 모건과 그림을 찾던 은혜의 표정이 걸렸기 때문이라곤 차마 말할 수 없었다.
― 뭔지 몰라도 조심해요. 건물의 생체 반응까지 확인해 줄 수 없어요.
엘리스가 중간에 경유했고, 혜수가 들었다는 위치의 세컨드 하우스에 도착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서준은 차에서 내려 플레이트 캐리어까지 장착하고, 제레마이가 챙겨 준 권총과 무기를 점검했다.
모래 밟는 제 걸음 소리만 들렸다. 그를 제외하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라고는 없는 것 같았다. 먼 행성처럼 낯선 그곳을 조금 더 걷자, 이파리가 별로 없는 뾰족한 나무들이 인위적으로 심겨 있었다.
그 앞으론 환영한다는 듯 잘 다져진 길이 나왔다.
몸을 낮게 숙이고, 총집에 손을 가져다 댄 채 천천히 걷자 길 끝엔 위용 있는 하얀 건물이 드러났다.
풍경과 어울리지 않지만, 눈에 익은 하얀색 승합차 또한 그 앞에 서 있었다. 어제 그 차가 틀림없었다. 서준은 총을 가슴에 가깝게 파지하고, 차의 문을 밀어 열었다.
드르륵!
안엔 어떤 흔적 같은 것도 없었다. 증발하기라도 한 것처럼 깨끗했다.
다시 호흡을 고르고, 기척을 죽인 채 건물로 들어갔다.
커다란 문 하나를 지나자 사방이 아치형으로 뚫려 있는 거대한 안뜰이 모습을 드러냈다.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 하얀색이 마구 섞여 있는 기하학적 무늬의 타일로 꾸며져 있었고 그 가운데 분수가 있었다.
물이 나오고 있진 않았지만, 온 바닥엔 잔잔하게 깔려 있던 물이 바람이 일면서 찰랑거렸다.
눈이 부신 풍경이었다.
긴장하느라 참고 있던 숨을 짧게, 여러 번 내뱉었다. 커다란 등과 어깨의 근육이 들썩거렸다. 내내 바짝 들고 있던 총을 내리자 어깨가 빠질 것처럼 아팠다.
“요한, 영상 보고 있지?”
― 얍. 뭔지 몰라도 아름답네요. 딱히 위험한 건 없는 것 같은데. 문화유산이라고 해도 믿겠는데요? 위성으로 봐서는 아무것도 확인이 안 돼요. 별장 같은 건가?
“들어올 때 보니까 차를 바꿔 타고 이동한 것 같아. 바퀴 자국이 여럿 있는데, 승합차만 여기 있어.”
건물 안에 들어서자마자 시원하게 바람이 불고 있는데도 긴장한 탓인지 땀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다시 움직였다.
낮은 수심임에도 그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요란하게 소리가 났다. 중간까지 걷자 수심이 종아리까지 깊어졌다가 끝에 가선 다시 얕아졌다.
반대편에 도착하자 아치형의 커다란 출입구와 바로 옆에 작은 문이 같이 붙어 있었다. 서준은 큰 문을 밀고 들어갔다. 무거울 거라는 예상과 달리 소리조차 나지 않고 가볍게 열렸다.
그 용도를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 안은 중정과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유리로 뚫려 있는 천장과 채도가 낮은 붉은색의 벽과 바닥. 기온이 크게 다르지 않았음에도 그 안에 들어선 것만으로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공기 중엔 어렴풋이 마리화나 냄새가 남아 있었다.
“굳이 경유한 걸 봐선 분명히 뭔가 있을 텐데.”
자세히 둘러보니 구석에 사치품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방 안 이곳저곳에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옷, 보석, 신발, 고급 브랜드의 자동차 열쇠까지. 뒤진 흔적에서 다급하게 움직인 흔적이 보였다.
미술관에서 봤던 조각상과 동상, 그림 같은 것들도 있었다.
쿠션이 쌓인 벽 옆에 붉은색의 카펫이 무언가를 덮고 있었다. 발로 그 뒤를 젖혀 버렸다.
수많은 캔버스가 마구 쌓여서 기대어져 있었고, 몇 개는 밑에서 뒹굴었다. 카펫을 완전히 걷어 내자 그곳에 엘리스의 전시 기획이 숨어 있었다.
왜인지 몰라도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찢긴 그림들이 중구난방으로 쌓여 있었다.
차갑게 인상을 쓰던 서준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허리를 숙였다. 바닥의 하얀색 가루를 손으로 찍어 냄새를 맡았다. 미처 다 챙기지 못한 거로 보이는 봉투도 몇 개 나뒹굴고 있었다.
“이거였네.”
― 그, 그게 뭐예요?
시각을 공유하고 있던 요한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서준은 다른 그림들까지 앞으로 끌어당겼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림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비어 있어야 할 캔버스 뒤가 얇은 천 같은 것으로 막혀 있었다. 손으로 만지던 그가 나이프를 꺼내 찢었다. 거기에 크고, 두툼한 봉투들이 노란색 테이프로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네 눈엔 설탕으로 보여?”
― ……설마.
이번에도 제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소름 돋는 충만함에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갔다.
“다 못 챙기고 갔나 보네. 와 보길 잘했군. 제레마이한테 연락해서 네 여동생이 전시하고 다니는 척하면서 그림 뒤에 약 붙여서 운반했다고 보고해.”
― 미친, 대박!! 진짜 약이 목적이었어!
“대량으로 운반하는 루트를 만든 걸 거야.”
― 와, 와! 어떡하지?!
“진정해, 어린이.”
―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자선 전시회 주최하고 다니는 CEO가 마약 브로커라고 누가 의심이나 했겠어요! 지금 당장 그쪽으로 인원 보낼게요.
“엘리스 쪽이 먼저야. 무조건 모로코 안에 있을 때 잡아야 해. 분명 아니라고 잡아뗄 거야. 최대한 데나로(DENARO)와는 떨어뜨려서 엘리스 이름만 거론하게 언론 통제하고, 스페인 농부도 잊지 마. 공급책이 그쪽일 거야. 제레마이한테 서두르지 말라고 해.”
― 네!
“아, 그리고 혹시 이번 일 때문에 필요한 사람들이 있으면 호텔 내줘. 휴양지 찾아다니는 인플루언서 수다쟁이들한테 퍼뜨리고.”
― 와, 이 와중에 진짜……. 준, 도대체 정체가 뭐예요? 업무 내용은 CMO(Chief Marketing Office_최고 마케팅 책임자)인데 이력이나 몸을 봐서는 그런 것 같지 않고.
“……잡부.”
― 일단 속아 줄게요.
생각보다 큰 수확에 요한만큼은 아니어도 서준 역시 흥분하긴 마찬가지였다. 기껏해야 탈세 정도로 생각했는데 마약이라니…….
손에 묻은 가루를 털어 내고 일어났다.
들어왔던 길을 돌아 문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멈칫하며 그의 발이 멈췄다.
무의식적으로 눈길이 가서 구석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그러곤 바닥에 떨어져 뒤집혀 있는 작은 그림에 손을 뻗었다.
무서울 정도로 흡입력이 있는 그림, 놀랍게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 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서준은 순식간에 그림에 빠져들었다.
검은색 파도의 그림, 부서지는 물과 햇살에서 향기와 소리마저 느껴질 정도로 선명한 질감은 은혜의 작품이 분명했다.
혹시 이 그림에도 약이 붙어 있을까. 슬쩍 돌려 봤지만, 사이즈가 작은 탓인지 없었다. 천만다행이었다. 벽에 있던 다른 그림들을 보고 이게 무사할 거라고 기대조차 못 했는데 기어코 찾아냈다. 기쁨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제 당당히 한국으로 돌아가서 안겨 줄 핑계가 생겼다.
밖으로 나오면서 그림이 멀쩡한지 살피던 그는 뒤에 작은 글씨로 서명이 들어간 걸 확인했다.
HyeSu.
심장이 발밑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여태 눈에 보이지 않던 불안한 감각이 실체화하여 손에 들어왔다.
눈앞에서 총소리를 들었을 때보다, 폭탄이 터졌을 때보다 놀란 그의 심장이 요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