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아무리 서준 씨가 사람을 잘 본다고 해도…… 우리 이제 고작 두 번 만났고, 서로 잘 모르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
“시간이나 횟수가 중요해요? 난 지금이 중요한데. 다 알면서 빠지는 경우가 얼마나 돼요?”
설득으로 기울어지는 마음을 애써 부정하며 다 마른 머리를 한쪽으로 내렸다.
“보통 사람들은 그렇잖아요.”
“자주 만나거나, 잘 아는 사람이랑은 오래 만났어요?”
잠깐 고민하던 혜수는 입술을 비쭉 내밀더니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보니 딱히 그렇지만도 않았다.
서준은 가볍게 웃으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조명을 받아 선명하게 보이는 위압적이고, 아름다운 몸의 형태에 혜수는 잠깐 숨을 참았다. 예전에 어느 전시회에서 봤던 석고 남상이 떠올랐다. 제목이 ‘이상형’이었고, 그땐 과하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 이런 게 있으니 왜 만들기까지 했는지 납득이 갔다.
그는 시선을 즐기며 위태롭게 발치 앞에 있던 혜수의 빈 잔을 치우고, 소파에 앉았다.
“‘보통 사람’은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소리 지르면서 도망가던데? 그림 찾아야 한다고 총 가진 대머리랑 싸우지도 않을 거고, 위험한 거 알면서도 길거리로 혼자 뛰쳐나가고……. 내가 볼 때 작가님은 ‘보통’ 아니야.”
“어느 작가인지 몰라도 겁을 상실했네요.”
알면서도 모르는 척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그의 다음 말은 혜수의 허를 찔렀다.
“화낸 건 미안한데, 앞으로 그러지 말아요. 못 죽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힘이 실린 말에 노란 조명 아래에서 일렁이며 아까부터 조금씩 어긋났던 둘의 시선이 그제야 세게 부딪쳤다.
“……근데 서준 씨는 왜 뉴욕에 있어요?”
주제를 어설프게 돌리는 시도에 서준이 몸을 돌려 마주 앉았다. 꼬고 있는 혜수의 하얀 발끝을 살짝 건드리며 웃었다.
“왜? 장거리 연애는 별로예요?”
“정말 뻔뻔하네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받아치는 말이 너무 기가 막혀서 무릎에 고개를 푹 박았다. 귀까지 빨개졌다.
“한국에 있는 게 힘들어서 도망쳤어요. 싫어하는 사람도 많고, 발붙이고 있을 이유도 없었거든요. 미국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어떻게 되는 대로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됐어요.”
“그렇구나.”
“작가님은 한국에 있는 게 좋아요?”
이따금 잔을 부딪치던 두 사람이 술을 비우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냥 어쩔 수 없이 사는 거죠.”
“죄는 커도 참고 사는 스타일이구나.”
“아는 척이 심하네요.”
“아는 척하는 게 싫으면 좀 알려 줘요. 궁금하니까.”
“그러는 서준 씨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예요? 이런 호텔 관계자라면서 총까지 들고 다니고…….”
“먼저 아는 척해 봐요. 알려 줄게요.”
“또 끼 부리는 거예요?”
뭐가 이상하냐는 듯 반반한 얼굴을 끄덕였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 같았다. 일부러 망가뜨렸거나.
“너무 부담 갖지 말아요. 작가님이랑 잘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맞는데, 만난 지 사흘 된 사람한테 장황한 말 쏟아 내면서 억지로 강요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담백하고 시원한 결론이었지만, 혜수는 생뚱맞게 불을 붙여 왔다.
“그럼 그냥…… 잘래요?”
정은하와의 통화 때문일까. 살면서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알을 깨고 나온 본능이 참아지질 않았다. 수치도 모르고 뱉은 말에 뒤늦게 깜짝 놀란 당사자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마어마한 발언에 얼어붙어 있던 서준은 조소를 띠더니 순식간에 소파 끝으로 떨어져 앉으며 제 가슴을 손으로 가렸다.
“아, 미안. 미안해요! 내 말은 그게, 그러니까…… 어차피 하룻밤이면 끝날 테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자 보고 별로면…… 하, 미치겠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미안해요. 그런 뜻이 아니라…….”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정말 지루할 틈이 없다.
한번 자 보고 말자는 식으로 덤빈 것 같은데, 너무 서툴렀고 어리숙했다. 비록 그 시도가 괘씸하긴 했지만, 호감이 통했다는 사실이 썩 나쁘진 않았다. 별로인 남자랑 자려고 하진 않을 테니.
당황하여 허공에 손을 휘젓는 모습이 귀여워서 더 골려 주고 싶었다.
“와, 작가님 정말 무서운 사람이구나. 처음부터 내 몸이 목적이었어요?”
“그럴 리 없잖아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하룻밤 자고 끝내려고?”
“아, 아니, 내 말은…….”
“내가 생긴 건 그렇게 보였을지 몰라도 생각보다 보수적인 사람이에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박했다.
“먼저 끼 부리고 키, 키스하고 싶다고 한 사람은 뭔데요?”
그래. 평소 같았으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무뢰한은 아니라는 확신에 얼굴과 몸도 취향. 밤늦은 시각에 같은 방에서 술을 마시는 게 이 여자가 아니었다면 제레마이가 가방에 총과 함께 챙겨 둔 콘돔을 칭찬했을지도.
결론은 차치하고 책임감과 사회적 위치가 있는 성인들이 적당히 호감을 느끼고, 캐주얼한 섹스를 나눈다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다.
욕망을 인정하며 옷을 벗고, 밤새 끌어안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정사가 끝나면 사라질 것 같은 이 정서적 교감이 그는 못내 아쉬웠다.
또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불안감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서는 일이 망설여지기도 했다. 결국 가벼워 보이는 대답으로 이어졌다.
“이거랑 그거랑 같아요? 난 순수하게 마음을 참지 않겠다고 말한 건데……. 우리 작가님이 굉장히 개방적인 분이셨구나. 그림처럼 대담하시네.”
“그만, 그만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얼굴을 가리고 소파 끝으로 도망가더니 민망함을 못 이기고 발을 마구 흔들었다.
“뭐, 마음은 잘 알았어요.”
그의 비웃음에 혜수는 갑자기 비장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술잔을 챙기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단단하게 얼어 있던 둘 사이의 분위기가 처음처럼 풀리고, 따뜻해졌다.
“수, 술 더 있죠? 술이나 더 먹어요.”
“먹여서 뭐 하려고?”
“다 잊는 게 좋겠어요. 마셔서 안 되면 머리를 한 대 때려 줄까요?”
“……아아, 그런 취향이구나.”
“아 진짜, 1절만 해요. 미안하다고.”
성내는 모습에서 이상하게 보호 본능만 커졌다. 한없이 불안해 보이다가도 이렇게 웃으니 한없이 예뻤고, 귀여웠다. 이성에게 이런 기분을 느낀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작가님 오늘 나한테 여러 번 미안하네.”
“미안하게 됐어요.”
“누가 날 도와주는 걸 빚으로 생각하지 말고, 받을 일이 생기면 받아요. 미안하다 하지 말고, 앞으로 작가님도 도와주면 돼요. 언젠가 내가 베풀었던 친절의 보답이라고 생각하면 받는 게 좀 편하거든.”
부끄러움에 살짝 젖어 있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어느 정도 형태가 남아 있어 택시 안에서부터 열심히 재건하던 마음속 모래성이 완전히 무너졌다. 어디서 학원이라도 미리 다니고 온 건지.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심장에 박혔다.
와르르 무너진 성이 사막을 만들어 냈다. 비좁은 사막에 낮에 보았던 정원과 강서준이 불쑥 나타났다.
그가 외국에서 만난 사람이라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물리적으로 가까이에 있었다면 제대로 생활하지 못할 정도로 헤어 나오지 못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알겠어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지만, 다시 닿은 시선이 오래오래 서로에게 머물렀다.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고 했지만, 혜수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눈으로 찬찬히 훑었다. 평생 갖고, 지키고 있던 어떤 관념과 규범이 깨져 버릴 것만 같았다.
낯선 여행지의 아름다운 호텔, 어둑하고 따뜻한 조명, 달콤하고 센 술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완벽한 남자.
현실에서 멀어져 마주한 것들은 여태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그걸 가능케 한 남자가 눈앞에 실재했다.
“……자꾸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니까 그러네.”
“이렇게 생겨 먹은 거예요.”
남자의 웃음에 몸 안쪽이 화끈거리고, 간지러운 것 같아 괜히 말없이 술만 들이켰다. 열기가 심화되는지도 모르고 잘도 마셔 댔다.
“잘 마시네. 술 좋아해요?”
“으음, 잘 못 마시는데 좋아는 해요.”
“와인? 맥주?”
“가리진 않는데 그나마 탈이 덜 나는 건 소주더라고요. 거의 집에서 혼자 마셔요. 그럼 취해도 별 탈 없으니까. 해장도 같이하고요.”
어느새 붉게 상기된 볼과 부드럽게 풀어진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주당이었구나.”
헤헤 웃는데 들고 있던 잔이 위태로워 보여 서준이 잔 바닥을 살짝 잡아 주었다.
“그런 소리 처음 들어 봐요. 서준 씨는요?”
“좋아해요.”
“그럼 더 마셔요. 아까 보니까 모로코 술도…….”
미묘한 대답을 들은 혜수가 어색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술을 더 꺼내 오겠다며 일어섰는데 휘청거리는 게 불안했다.
서준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는 혜수의 손목을 슬쩍 잡아당겨 다시 소파에 앉혔다.
“안 마실 거예요.”
“왜요?”
“더워요.”
실내는 적절한 온도로 유지되고 있었고, 상의를 벗고 있는 그가 땀을 흘리거나 술에 취한 것 같지도 않았다.
혜수는 아직도 손목을 붙잡고 있는 커다란 손을 내려다봤다. 길고 두꺼운 손가락, 짧고 바른 손톱, 선연하게 튀어나온 손등 위의 푸른색 혈관까지. 천천히 그것들을 훑어 올리며 다시 눈을 맞췄다.
어두운 조명에 검은색 눈동자가 붉게 일렁거렸다. 얌전하게 내려온 머리카락 때문인지 낮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지만, 매력적인 건 참 여전했다.
다시 심장이 쿵쿵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몸과 얼굴이 문제다.
취했나.
아랫입술을 몰래 물었다가 여의치 않아 그가 마시던 술까지 들이켰다. 바닥까지 비우고 내려놨지만, 목마름은 더욱 심해졌다.
서준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자는 게 좋겠어요.”
굳은 몸을 억지로 일으켰지만, 피하려는 그를 혜수가 붙잡았다.
손 아래로 느껴지는 맥박이 제 심장처럼 선명하게 뛰고 있었고, 그걸 알아차린 눈동자가 처연하게 올려다봤다. 뭔가 말하려는 듯 작고 붉은 입술이 오물거리며 한참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