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3. 회개 없는 밤
새로 탄 택시는 서준의 말처럼 딱 10분 정도를 달렸다. 험한 운전과 숨 막힐 것 같은 분위기에 토할 것 같았다. 흙길을 지나고, 도시 외곽으로 달리자 잘 닦인 길이 나타났다. 그 끝엔 이슬람 양식을 차용하여 세워진 아름다운 건물이 있었다.
“여긴…….”
“내가 지내고 있는 호텔이에요.”
괜한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고, 여전히 화가 난 것 같은 그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서준이 데리고 온 곳은 출장 목적으로 지낸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좋은 호텔이었다.
붉은색 젤라바를 입은 직원들의 환대를 받으며 안에 들어서자 커다랗고 화려한 샹들리에가 달린 로비가 나왔다.
천장은 아라베스크 무늬로 꾸며져 있었다. 곳곳에 호화스럽고 복잡한 무늬의 장식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지만, 과하지 않게 유려했으며 세련된 느낌을 유지하고 있었다.
걷는 내내 바닥의 타일 모양 또한 계속해서 바뀌어 나중엔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바깥의 커다란 정원은 아까 낮에 본 정원보다도 큰 것 같았다. 더불어 호텔 안에 있는 중정은 정말 이슬람 사원에 와 있는 것처럼 웅장했다.
시선을 빼앗긴 채 구경하는데, 앞에 가던 서준이 서서 기다리고 있다는 걸 늦게 알아차렸다.
“아, 죄송해요.”
급히 따라가 바짝 붙었지만, 그는 좀처럼 기분이 풀리지 않는지 아무 말도 없었다.
모르는 사람을 열정적으로 도와주는 이타심에 고맙다가도 왜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도가 과한 걱정에 불쾌하기는커녕 기대감만 커지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서준이 묵고 있었던 방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거실엔 모로코에서 만든 게 분명해 보이는 러그가 깔려 있었다. 방 안의 구조 자체는 단순했지만, 그 안을 채우고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고급스러웠다.
커다란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 침실을 보고 혜수의 무의식이 꿈을 불러들였다. 몸이 뻣뻣하게 굳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편하게 있어요.”
이번에도 대답할 시간을 주지 않고 사라졌다.
“후우.”
눈치 보며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잘 웃고 다정하던 사람이 화를 내니 불편했고, 냉정한 시선이 사람을 누르는 것 같아 좀 무섭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철저한 타인이자 은인이다. 머릿속으로는 열심히 선을 긋고 있었지만, 일정하게 뛰던 심장은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얼굴의 열을 식히기 위해 거실의 격자무늬 창을 슬며시 밀어 냈다. 라탄 의자가 있는 고풍스러운 테라스가 나왔다.
바깥을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 그곳에 맨발을 디디는 순간, 다시 문이 열렸다. 생각보다 빨리 그가 돌아왔다.
혜수는 못된 짓을 하다가 들킨 강아지처럼 꽁꽁 얼어 버렸다.
“밖에…… 잠깐 보려고요.”
묻지 않았는데도 변명이 나왔다.
서준은 그 어색한 말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라앉은 표정으로 빠르게 걸어와 몸이 닿을 정도로 가깝게 붙었다.
아까처럼 또 안기라도 하진 않을까 눈까지 감으며 몸을 움츠렸다. 그런 기대와 다르게 서준은 뒤쪽으로 긴 팔을 뻗더니 열어 둔 문을 슬쩍 닫아 버릴 뿐이었다.
자기만 아는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밤엔 추워요. 불편하겠지만, 호텔이 아직 정식 오픈 전이라 따로 준비된 객실이 없어요. 청소하려면 한참은 더 걸릴 것 같고, 오늘 밤엔 같이 있어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방도 거실도 넓은데 불편할 게 뭐가 있을까. 다만 궁금했다.
“정식 오픈 전?”
“관계자예요.”
깔끔한 결론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직원을 제외하고 이용객 하나 마주치지 않은 일엔 다 이유가 있었다.
“전…… 저는 괜찮지만, 서준 씨는요?”
“……일단 필요한 거 가져왔으니까 좀 씻고, 쉬죠.”
“감사해요.”
서준은 대꾸 없이 가져온 하얀색 종이 가방을 안겨 주더니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혜수는 도망치듯 욕실로 들어왔다. 문을 닫고, 주르륵 미끄러지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침착하자.”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제법 두툼한 종이 가방 안을 확인했다. 호텔의 어메니티 키트와 유명 브랜드의 로고가 박힌 베이지색의 원피스가 들어 있었다. 외출복 같았지만, 잘 때도 입을 수 있는 편한 디자인이었다.
“이건 뭐지?”
가장 밑에 있던 것을 확인한 혜수가 헉 소리를 내며 가방을 떨어뜨렸다. 착각했나 싶어서 종이 가방을 들어 올리자 안에 있던 내용물들이 바닥에 톡 떨어졌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분홍색의 레이스 속옷. 혜수는 조심스럽게 그걸 들어 올렸다. 크기가 손바닥으로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컸다.
“우, 우와…….”
어떤 의미로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한 번도 입어 본 적 없는 로고가 달려 있었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지나친 친절에 이젠 온몸이 빨개졌다. 감당할 수 없는 속옷을 잠시 미뤄 두고 민망한 기분을 애써 지우며 찬물로 씻었다.
오늘 입었던 것을 다시 입기도 찝찝했고, 그렇다고 벗고 있을 수는 없어서 한참을 노려보며 고민했다.
“아, 모르겠다.”
엉거주춤 욕실에서 나와 보니 서준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황금빛 술이 담긴 잔을 들고 있었고, 밖의 어두운 풍경에 고정된 시선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갖고 있던 짐을 정리하고, 젖은 머리를 다 닦아 낼 때까지도 꿈쩍하지 않아서 혜수가 다가가 아주 어색하게 말했다.
“저, 욕실 다 썼어요.”
그의 시선이 혜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잠깐 머물렀다. 거의 빈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곤 일어섰다.
“짐 뺐으니까 침실에서 편하게 쉬어요.”
“네? 안 돼요. 제가, 제가 여기서 잘게요!”
서준은 제 셔츠의 단추를 하나, 둘 풀어내며 혜수를 내려다봤다.
“그렇게 해요, 그럼.”
거실의 조명을 어둡게 낮춰 주더니 욕실로 들어갔다.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하고 싶었는데 틈을 주지 않았다. 냉랭해진 태도에 이젠 죄스럽고, 민망하기까지 했다.
아직 촉촉한 머리를 대충 말리고 곧바로 누웠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누워서 발을 뻗어도 널찍할 정도의 소파는 분명 편했지만, 한참 뒤척였다.
***
겨우 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익숙한 압박감이 목을 옥죄이기 시작했다. 신음해도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손톱을 붉게 칠한 손이 혜수의 얼굴을 붙잡았다.
“네가 어떻게 발 편하게 뻗고 자는 게냐? 감히, 감히 네가 어떻게 편하게 살 생각을 하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피하지도 못했다. 죄송하다고 빌어도 이내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긴 손톱을 박아 넣을 것처럼 목과 얼굴을 세게 압박했다.
“내 딸, 내 손녀가 못다 한 것 다 이룰 때까지 살아야지.”
실핏줄이 튀어나올 것처럼 흥분한 회색빛 눈동자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 순간,
“일어나요.”
낮고, 서늘한 남자의 음성이 대번에 정신을 깨웠다.
“하, 하아…….”
벌떡 일어난 혜수의 손발이 떨렸고, 연신 숨을 토해 내느라 콜록거렸다. 서준이 등을 쓸어내리며 다독이자 그 손을 밀어내며 또 습관처럼 웃었다.
“아, 별거 아녜요. 피곤해서…… 가위 눌렸나 봐요.”
“죄목이 뭐예요?”
“네?”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길래 꿈에서도 죄송하다고 사과를 해. 사람이라도 죽였어요?”
서준은 소파 아래에 주저앉아 테이블 위에 있던 술을 따라 혜수에게 건넸다.
“비슷해요.”
한참 침묵이 흘렀다.
그는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혜수 역시 잔 안에 든 술을 단번에 마셨다. 평소에 위스키는 잘 마시지 않는 터라 무거운 맛에 놀랐지만, 나쁘지 않았다. 부드럽게 목 안으로 넘어갔고, 배 향기가 입에 남았다.
“더 줄까요?”
병을 들어 올리는 그가 위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조심스럽게 어깨 옆으로 잔을 들이대자 투명한 안이 황금빛으로 채워졌다.
“왜 더 안 물어봐요?”
“물어봐 줬으면 좋겠어요?”
혜수는 대답하지 않고 그 술을 또 다 들이켰다. 첫 잔보다 훨씬 많은 양이었음에도. 서준이 다시 잔을 채우려는데 방 안에서 전자시계의 알람 같은 벨 소리가 들렸다.
“전화 오는 거 아녜요?”
“이 시간이면 회사 주치의일 거예요.”
“어디 아파요?”
“건강한데 가끔 잠을 못 자요. 주치의가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잘 잤다고 회개라도 해 줘야 납득하거든요.”
“나랑 똑같네요. 믿는 신도 없으면서 누군가를 납득시키려고 회개하는 거…….”
“응?”
“아녜요.”
혜수는 웃으며 일방적으로 그의 술잔에 잔을 부딪쳤다.
황금빛 액체가 손안에서 일렁거렸다.
“짠 해 준다는 건, 화가 풀린 거로 봐도 되는 거죠?”
“아, 당했네.”
“이겼다.”
밝게 웃는 걸 지켜보던 서준이 중얼거렸다.
“예쁘면 원래 겁이 없나?”
“……아, 안 예쁜데. 서준 씨가 훨씬 더 예뻐요.”
탄탄하고, 넓은 어깨 너머로 쳐든 그의 옆모습이 깎아 만든 석고상 같단 생각이 들었다. 혜수는 날카로운 코끝에 자기도 모르게 손을 올리며 중얼거렸다.
“이거 봐. 옆에 가까이만 가도 움찔거리면서 남의 몸엔 아무렇지 않게 손 올리네. 겁도 없이.”
제 얼굴을 간지럽히는 손길을 느끼다가 번뜩 움직인 눈동자가 뜨겁게 빛났다. 혜수가 움찔거리며 손을 떼어 냈다.
“미안해요.”
“……농담이에요. 만지고 싶으면 만져요. 그러라고 끼 부린 거 맞으니까.”
혜수는 조용히 웃으며 손을 거두고 제 무릎을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