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그렇게 가치 있는 사람으로 봐 줘서 감사하네요.”
손 위를 덮었던 커다란 손이 조금 더 무게를 싣고 꾹 눌러 왔다. 건조하고 거친 느낌이었지만, 따뜻했다.
“그래도 작가님은 대단하네요.”
“네?”
약간 지친 것 같은 눈가가 스르륵 감기더니, 서준은 머리를 뒤로 젖혔다.
“무섭고, 고통스러운 일엔 방어 기제가 생기기 마련이거든요. 숨도 못 쉬면서 버티고 앉아 있는 것도 그렇고, 손이 안 따라 주는데도 계속 그린 것도 대단해요. 난 도망쳤거든요.”
“전 도망칠 곳이 딱히 없었거든요. 근데 막상 도망쳐 보니까 내가 좀 이상해지는 것 같아요.”
“그게 본모습 아닐까.”
“……나쁘지 않네요.”
***
중간에 길이 막히긴 했지만, 지루하다 느낄 새도 없이 금방 목적지 부근에 도착했다. 택시 기사가 예고했던 대로 광장은 험악한 분위기였다. 곳곳에 경찰과 군인, 방송국 차량과 기자들이 있었고 지나가는 차 안을 확인했다.
골목 구석까지 차량이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차창 밖을 내다보던 혜수가 결심한 듯 말했다.
“이 앞에서부터 저 혼자 걸어갈게요.”
손바닥 아래에 깔려 있던 제 손을 그제야 거두었지만, 빠르게 손목을 붙잡혔다.
“같이 가요.”
“아뇨! 이 이상 폐 끼칠 수는 없어요. 또 택시 잡기 힘들 거예요. 이대로 타고 가세요. 거짓말 아니라 정말 괜찮아요.”
“내가 같이 가는 게 싫어서 그런 거면 근처까지만 데려다줄게요.”
어울리지 않는 표정으로 자조적인 말을 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길 위의 인파 때문에 때마침 차는 멈춰 버렸다.
“애초에 싫었으면 이 시간까지 같이 있지도 않았겠죠.”
“그럼 좋다는 건가?”
“말이 또 그렇게 돼요?”
저돌적이고, 능글맞은 말에 혜수가 인상을 썼지만, 서준은 웃을 뿐이었다.
“부정 안 하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어떻게 그렇게 금방 자기감정에 확신할 수 있어요?”
“싫은 게 확실해지면 좋은 것도 확실해지는 편이죠. 거기다 난 감도 좋고, 사람도 잘 보는 편이거든요.”
산뜻한 대답에 피식 웃자, 잡히고도 남는 가느다란 손목을 쥐락펴락했다. 야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인데. 얼굴, 목소리, 대화하는 방식에 표정만 봐도 보여요. 거기다 작가님은 그림까지 보여 줬잖아요. 아, 이것도 끼 부리는 건가?”
“알면 놔 줘요. 자제한다더니.”
이어져 있던 체온이 떨어져 나갔다.
서준의 말을 여러 번 곱씹었다. 싫은 것도, 좋은 것도 무엇 하나 분명히 하지 못해서 질질 끌려만 다니다가 고민과 후회만 안고 도망쳐 온 사막. 여기서 만난 낯선 남자는 우연하게도 여러 번 정답을 제시하고 있었다.
“작가님.”
혜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갔다.
“혼자서는 정말 위험해요.”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혼자 가야 했다. 이 사람에게 더 기댔다간, 이대로 헤어지지 않았다간…… 이 남자를 끝까지 붙잡을 게 뻔했으니까.
“5분 아니, 3분만 걸으면 돼요. 전시 관계자도 호텔에 있을 거고, 도착하자마자 연락할게요. 약속해요.”
오래된 자동차의 어둑어둑한 라이트 아래, 다정하던 시선이 날카로워지는 게 보였다.
“어제 낮에 추근거리던 나이 많은 새끼도 그 호텔에 있는 거 아녜요?”
“나이 많은 새끼…… 풋.”
진지한 얼굴에 미안하지만, 웃고 말았다. 남자의 기운이 스르륵 풀리는 게 느껴졌다.
“거절 못 하고 참는 건 알겠는데 그런 놈들한텐 조금 더 확실하게 표현하는 게 좋아요. 말로 해서 못 알아들을 것 같으면 욕이라도 해요.”
자신의 본명도 모르는 남자가 다 아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이상하게 거북하지 않았다.
“그땐 소란 피우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한 거고, 저 단호하게 거절 잘해요.”
“또 거짓말.”
혼잣말 같은 작은 목소리가 투정처럼 들려서 혜수는 달래 주듯 말했다.
“정말인데. 서준 씨가 도와준 덕에 하고 싶은 말 다 했잖아요.”
그때 자신의 그림을 보고 있던 남자가 이런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고, 지금까지 함께 있을 거라곤 더더욱 상상하지 못했다.
“앞으로는 소란 피우고, 하고 싶은 말도 다 해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게요.”
사랑스럽게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하더니 다시 잡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 여자가 사라진 빈 좌석에는 모로코 지폐가 몇 장 떨어져 있었다. 일부러 두고 간 게 분명했다.
서준은 혜수가 혼자 사라진 곳을 한참 쳐다보다가 시트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마른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손안에 그 작은 손의 촉감이 배어 버린 것 같았다.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 소리에 택시 기사가 뒷좌석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제 어디로 갑니까?”
“데나로…….”
“정말 갑니까?”
재차 확인하는 기사를 쳐다봤다. 말은 안 했지만, 정말 후회하지 않겠느냐는 눈이었다.
서준은 기사에게 지폐를 무작위로 쥐여 주고 차에서 내렸다.
뛰었다.
광장엔 붉고 노란 조명이 달렸고, 도망가지 않은 상인들이 남아 있었다. 흉흉했다.
커다란 덩치의 동양인 남자가 빠르게 달리는 모습에 시선이 쏠렸다. 몸을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불쾌함은 잠깐이었다. 떠오르는 건, 더 심한 취급을 받았을 그 여자뿐이었다.
벌써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을까.
그 잠깐 사이에 어디로 사라진 건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불안을 따라 호흡마저 거칠어졌다.
“작가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펄쩍펄쩍 뛰어도 안 보였다. 호텔로 가는 큰 길목이 경찰차 때문에 막혀 있었다.
“……젠장.”
불안함에 입술마저 떨렸다.
좁고, 어두운 방향으로 몸을 틀었지만, 인적은 점점 드물어졌다. 막다른 길이 나타났다.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이들에게 여자의 행방을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없었다.
다시 광장으로 나오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순식간에 커져서 귀가 아팠다. 드문드문 보였던 경찰은 그를 수상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돌아서 호텔까지 가 볼까 했지만, 뭔가 발목을 잡는 듯 찝찝했다. 제 본능을 믿기로 했다.
하릴없이 아까 걸었던 길로 다시 내려갔다. 제발 무사하기를 바라며 널따란 길목을 지나는데 시장 구석에 묘한 모양새로 움직이고 있는 군중이 보였다.
“하아.”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내고 사람들을 밀치며 다가서자, 몇몇 남자들이 격하게 소리쳤다.
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동양인 여자가 거기 있었다.
휴대폰을 꾹 쥐고, 심각한 표정이었지만 주변의 인파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것 같았다.
악몽 같은 광경이었다. 만약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조금만 더 늦었다면, 대체 이 여자한테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잠깐 가정한 것만으로 아찔해졌다.
“작가님.”
바로 뒤에 다가갔는데도 알아채지 못했다.
“은혜 씨.”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깜짝 놀란 표정으로 뒤돌아봤다.
“서준 씨?! 왜, 왜 다시 왔어요!”
서준은 대답 않고 그 작은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킥킥 웃고, 휘파람까지 불며 소란을 피웠다.
커다란 몸이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혜수는 별말 하지 못했다. 온몸으로 전달되는 걱정이나, 체온에 그저 그의 등을 몇 번 토닥였다. 그제야 제 뒤에 사람이 많이 몰려 있다는 걸 눈치챘다.
인파를 헤치고 광장에서 멀어진 두 사람은 다시 택시 정거장에 도착했다. 다행히 여기엔 남아 있는 택시가 몇 대 있었다.
“호텔 데나로.”
서준의 말에 기사들은 앞다투어 말도 안 되는 요금을 요구했다.
“350dirham!”
“300dirham!”
그는 고민 없이 가장 가까이에 있던 택시 기사에게 현금 다발을 건넸다.
“10분 정도 걸릴 텐데 앞에 탈래요?”
“어, 어디 가는 건데요?”
“이제야 좀 무서워요?”
“무서운 게 아니라……. 화났어요?”
혜수는 엉겁결에 뒷좌석에 타면서도 모든 게 갑작스러워 정신이 없었다. 처음 듣는 것 같은 차가운 말투에 조심스레 물었다.
서준은 화가 치밀어 올랐는데, 왜인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저작근이 움찔거리는 게 보일 정도로 어금니만 물었다.
“잘 모르는 놈이 끌고 가는데, 조금은 무서워해야 정상 아닌가? 겁을 상실했어요? 작가님. 방금 대단한 구경거리였어요. 다 늦은 시간에 동양인 여자 혼자 다니는 것도 신기한데 여권이랑 지갑까지 다 들어 있는 가방에 휴대폰까지 들고 길 한복판에서 넋 놓고 있었으니, 얼마나 별구경 같았겠어? 아니면 죽으려고 환장하기라도 한 건가!”
“호텔 가는 길이 막혀 있었어요. 잠깐 지도 보느라 그런 거고…… 나, 못 죽어요.”
택시 기사가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소리를 높였다.
“그럼 더더욱 나한테 돌아왔었어야지! 적어도 도와 달라고, 살려 달라고 소리라도 질러야 하는 거 아니야? 멍하니 서 있지 말고 그림 찾으려고 할 때처럼 열심히……. 자기 목숨 귀한 거 아는 사람이 그래요?”
“알았으니까, 좀 진정해요.”
그런 게 아니라고 소리를 지르거나 똑같이 화를 낼 거라는 예상과 달리 혜수는 조용히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토닥였다.
이 상황에서도 남을 달래고 있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 그 손을 뿌리치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