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
스킨십과 일방적인 원조를 완강히 거부하는 혜수에게 전 남자 친구는 대체 뭐가 그리 복잡하냐고 성질을 냈다.
다른 여자를 끼고 눈앞에 나타날 만큼 당당하게 바람을 피운 건, 모든 문제를 떠밀어 버린 일종의 시위였다.
혐오하는 것도,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하고 싶지 않았다. 재촉하는 방식도 싫었고, 끌리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그렇게 딱딱하게 굳어 있던 무의식은 놀랍게도 모로코에서 처음 만난 남자와 대범하게 몸을 겹쳤다.
혜수는 응답 없는 수화기를 들고, 사무실 밖으로 보이는 서준을 바라봤다.
넓고, 크고, 두꺼운 몸에 달라붙은 하얀색 셔츠. 날카롭지만 시원스럽고 진한 인상.
때때로 여자들은 지나가며 그를 힐끔거렸다. 서준은 그런 시선을 받으면서도 익숙한 일인 듯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천연한 얼굴로 약간 젖은 머리를 넘겼다.
“그래, 저런 몸은 만국 공통이지.”
꿈도 꿈이지만, 저런 외형적인 요소에 끌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부정이 안 되니 이젠 핑계를 댔다.
‘자꾸 그렇게 쳐다보면 키스하고 싶어지는데.’
혜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럼 큰일 난다고 말하지도 못했고, 욕하지도 못했다. 그저 속절없이 저 남자에게 끌려갔다.
아까의 장면을 떠올리니 그의 손이 닿았던 귀와 턱끝이 다시 뜨거워졌다. 달콤하고 위험한 목소리를 애써 지워 내며 전화기를 내려놓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연락됐어요?”
“아니요. 담당자랑 대표 번호로 다 연락해 봤는데 신호도 안 가요. 서준 씨도 통화하고 오세요. 기다릴게요.”
서준은 혜수의 머리 위에 손바닥을 올리더니 달래 주듯 톡톡, 두드렸다.
하는 짓 하나하나에 죄목이 달리고 있다는 걸 모르는 그는 서둘러 사무실로 들어갔다.
신호가 몇 번 가지 않았지만, 요한은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
“나야.”
― 맙소사. 준! 도대체 지금 어디예요?!
“무슨 정원에 와 있어. 도심 광장에서 10분 정도 운전했는데, 중간에 차가 퍼졌어. 알아서 수거해.”
― 됐다, 됐어요. 그저 무사하면 됐어. 하아. 보스는 준이 죽으면 어떻게 시신을 찾아올지 계획까지 세웠어요.
“뭔지 몰라도 알고 싶지 않네. 엘리스는?”
― 국도 타고 중간 지점에 들렀다가 카사블랑카까지 이동한다는 정보는 확인했는데 지금 위치는 확인 안 돼요. 거기가 세컨드 하우스인 것 같은데. 하, 그리고 문제가 생겼어요.
“무슨 문제?”
― 이건 어디까지나…… 이 전화, 도청 안 되겠죠?
“관광지에 있는 평범한 사무실이야.”
― 믿을 만한 루트에 있는 친구가 슬쩍 흘려준 건데, CIA에서 엘리스를 주목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어요.
“왜?”
― 모르죠. 역외 법인으로 자금 세탁한 것도 모자라서 뭔가 더 있는 모양인데 단순히 잘리는 정도가 아니라 어쩌면 범법적인 행위를 하고 있을지도. 어쩌면 준이 말한 그거…….
수염이 조금 자란 것 같은 턱끝을 매만지던 그는 주위에 서 있던 직원의 눈치를 살피고 속삭였다.
“거기까지. 미술관 폭발 조사 결과는?”
― 아직 원인이나 범인은 모르겠어요. 미디어에선 극우 단체의 테러로 의심된다고 떠들고 있는데 그들은 아니라고 우기고 있어요.
“그쪽은 했으면 했다고 인정할 거야. 무선 통신은 왜 먹통이지?”
― 과부하죠.
“그나마 반가운 소식이네. 요한, 모로코랑 스페인은 가까워. 무리해서 3개 국가에 허술한 전시회를 기획한 것도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조사해 줘. 그리고 중간 지점이 그 여자가 말한 라브리카인의 남동쪽 3.5마일과 동일한지도 대조하고.”
― 알겠으니까 호텔로 돌아가요. 거기라면 시내에서 떨어져 있고, 안전할 거예요. 통신은 곧 복구될 거라고 발표했고 아, 그리고 내일 오후엔 뉴욕으로 반드시 돌아오래요!
“알겠어.”
― 통신망 회복되는 대로 바로 연락해 주세요. 난 제레마이한테 보고할게요!
사무실 직원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 나가자마자 그 앞에 주저앉아 있던 혜수가 벌떡 일어섰다.
“연락됐어요? 뭐래요? 혹시 그림에 대해서 들었어요?”
“아뇨, 연결 안 됐어요.”
“아…… 그렇구나.”
또, 또 억지웃음. 속상해하고, 짜증도 낼 수 있는 마당에 이 여자는 괜찮은 척만 했다. 확인된 게 없는 상황이라 아무것도 모르는 게 낫다고 판단했지만, 저렇게 참는 걸 보면 차라리 가혹하게 굴고 싶어졌다.
왜 그런지 몰라도 그냥 짜증이 났다. 저 가면을 벗겨 버리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애초에 말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니었지만.
“여기 직원이 택시를 불러 줬어요. 지금 이런 상황이라 거리에선 잡기 힘들 거라고. 입구에 나가 있죠.”
“네.”
두 사람은 30분 정도 기다리다 택시를 탔다. 슬슬 어두워지는 마당에 차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준은 타자마자 혜수가 묵고 있던 호텔로 목적지를 말했다.
“쿠르비아 호텔, 주소는…….”
기사가 서툰 영어로 띄엄띄엄 답하긴 했지만 친절한 말투였다.
어느새 창밖으로 석양이 저물고 있었다. 푸른색과 주홍빛이 어우러진 하늘에 멀리 보이는 지상의 형상들은 그림자처럼 점점이 박혀 있었다.
서준은 조금 지친 것 같은 혜수를 살폈다.
한국을 떠난 이후로 지금보다 위험한 상황은 수십 번도 더 있었다. 그때마다 드는 공포와 고통은 매끄럽게 넘긴 편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옆에 있는 이 여자 때문인지 몰라도 기민하게 서 있는 감각들이 좀처럼 꼬리를 내릴 줄 몰랐다.
거기다 택시에 앉은 이후로 계속 불안해 보여서 더 신경이 쓰였다.
혜수는 엄지손톱 끝을 물어뜯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길 반복하고, 조용히 긴 숨을 내쉬기도 했다.
“어디 불편해요?”
꾹 잡으면 부러질 것 같은 손목을 억지로 잡아 내리며 물었다. 짧은 경련 같은 떨림이 손바닥 안에서 느껴졌다.
“아뇨. 괜찮아요.”
입매 한쪽만 힘주어 올리는 억지웃음에 결국 화가 터졌다.
“억지로 안 웃으면 안 될까?”
“네? 아니, 난 정말 괜찮아서…….”
“그럼 허언증인가? 작가님, 억지로 웃을 때마다 오른쪽 볼이 확 굳어요.”
“제, 제가요?”
몰랐다. 들어 본 적도 없는 얘기에 괜히 제 오른쪽 볼을 만졌다. 아, 그래서 아까도 손등으로 문질렀던 모양이었다. 뒤늦게 남자가 보인 행동의 이유를 깨달았다.
“피가 날 정도로 손톱을 물어뜯어도 예쁘게 웃으면서 괜찮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은 믿어 줬나 보네요. 그러니 습관이 됐지. 가뜩이나 아프다는 손을 왜 이렇게 괴롭히는 거야.”
손목을 잡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어둠 안에서 손끝을 확인하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띄엄띄엄 서 있는 가로등 불빛에 붙잡은 손을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이 명암을 반복했다.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어안이 벙벙했다.
“사과 들으려고 한 말 아니잖아.”
작은 손을 다시 시트 위로 조심스레 내려놓고 제 손으로 덮어 눌렀다. 손가락 한 마디 이상으로 차이가 나는 것 같은 크기.
“물고 싶어지면 차라리 내 손을 물어요.”
문득 궁금했다.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남자가 어떻게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까. 근데 왜 울컥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는 강서준 씨는…… 왜 자꾸 끼를 부려요?”
황당한 물음에 서준은 잘못 들었나 싶어서 되물었다.
“뭐?”
“어차피 오늘만 지나가면 다 끝날 텐데 너무 그렇게 잘해 주지 말라고요.”
귀여운 발언에 그가 결국 푸흡, 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찌나 크게 웃는지 손으로 입을 가렸다가, 눈을 가렸다가 난리를 피우면서 웃었다.
“……저 내릴래요.”
민망함에 손을 빼고 돌아서려 하자 서준이 살포시 손목을 잡아당겼다. 씩씩거리는 게 눈에 보여서 또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아 내고, 진정했다.
“미안, 미안해요. 그만 웃을게요, 작가님. 응?”
“그렇게 부르지도 말아요.”
혜수는 대답 없이 반대편으로 몸을 돌려 버렸다. 커다란 손이 다시 작은 손등 위를 덮으며 말을 이었다.
“나야말로 불쾌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끼 부리는 건 자제해 볼게요.”
“……불쾌하다곤 안 했어요.”
몸에 힘이 들어가는 걸 들킬까 그저 왼손만 꼭 쥐고,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안 한다곤 안 했는데.”
이 남자, 선수가 확실했다.
***
사흘, 인생의 그 어느 순간보다 착실하게 쌓인 짧은 나날과 강서준이 혜수의 안에 문신처럼 새겨졌다.
얼굴만 보면 사막의 밤처럼 한없이 차가울 것 같은 남자였다.
날카로운 눈빛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읽어 냈고, 거짓말은 감히 통하지 않는다는 듯 단호하게 굴었다. 한 걸음 물러날라 치면 혀로 달콤함을 속삭였다. 불쑥 던지는 말이 너무 능숙할 땐 수상하다가도 다정함엔 다시 심장이 뛰었다.
같이 있는 내내 든든했던 건 두말하면 잔소리.
견고하게 쌓았다고 생각한 마음의 벽이 매력적인 이성 앞에서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혜수, 너 이렇게까지 쉬웠어?’
자문하다가도 커다란 손의 온기에 다분히 필요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사실 저 뒷좌석에 타는 게 좀 무서워서 그래요. 멀미 나는 것 같아요. 소화도 안 되는 것 같고, 숨도 막혀요. 좀 유별나죠?”
말은 그렇게 하면서 손을 빼거나 하진 않았다. 서준은 덤덤하게 말했다.
“진작 말하지.”
“신경 써 달라는 게 아니라……. 쓸데없는 말까지 해서 미안해요. 아무튼 난 괜찮다고요.”
“쓸데없긴. 이거 나중에 다 기억해 뒀다가 잡지사에 돈 받고 팔아넘길 거예요.”
다정함의 무게를 따라 길게 늘어지는 눈가가 반가웠다. 이런 상황에 그가 있어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